"소림? 중국에 있어요? 해외가려면 여권 필요하지 않아요?..."
승현의 현실적인 물음에 연화의 비장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그녀는 잡고 있던 승현의 손을 스르르 놓으며 눈을 깜빡였다.
"아... 맞다.. 보통은 여권이라는 게 있어야 움직일 수 있었지?"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저 학교도 가야 하고, 선생님들도 걱정하시는데 갑자기 중국이라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현은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뜨거운 감각은 사라져있었고, 그저 땀만 조금 배어 있을 뿐이었다.
연화는 난감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너를 바로 소림으로 끌고 가는 건 무리가 있겠어. 게다가 아직 힘을 조절하는 법도 전혀 모르고..."
연화는 결심한 듯 주먹을 쥐며 승현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그럼 당분간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네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네 보디가드가 되어주지!"
"보, 보디가드요?"
"당연하지! 아까 그 젤리 아저씨 같은 놈들이 또 나타나면, 넌 나 없인 1분도 못 버틸걸?"
앞으로 또 무슨일이 벌어지는걸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연화는 승현의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입술을 오므려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날카롭고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골목에 울려퍼졌다
잠시 후
어디선가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통통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연화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비둘기...?"
승현이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이, 연화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 조각과 붓펜을 꺼내 능숙하게 영어를 써 내려갔다.
연화는 정성스럽게 접은 쪽지를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작은 통에 넣었다.
"자, 부탁해. 최대한 빨리 전해줘."
그녀가 손등을 가볍게 튕기자, 비둘기는 마치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일반적인 비둘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와..."
승현이 감탄하자 연화가 씩 웃으며 답했다.
"가자, 승현."
연화는 승현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미 등교시간이 훌쩍 넘어버려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길을 걷다보니 마침 학교 명물 햄버거 가게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순간 연화의 걸음이 멈췄다
연화는 가게 안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 햄버거..?"
연화의 입술 아래로 침이 떨어진 거 같아 보이는 건 기분탓이겠지..
"..먹고 갈까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어서오세요~"
가게 안은 한산했고, 카운터 직원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햄버거 세트를 각자 주문하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은은한 햇빛이 들어오는 적당한 창가 자리였다.
자리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지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승현은 오른손을 쳐다보며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새 지쳤기 때문인가.
승현은 슬쩍 연화를 쳐다봤다.
연화는 한손으로 턱을 받치고, 조용히 창가 너머의 풍경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주문했던 햄버거 세트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주문한 매뉴가 모두 같았다.
치킨버거세트.
햄버거를 먹으면서 연화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데스트로소. 그들은 군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진 군사기업으로, 세계에 여러 분쟁과 전쟁들에 관여되어있고, 가이반은 그 곳에 소속된 간부로써, 데스트로소가 벌이는 대부분의 일들에 앞장서고 있는 행동대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화가 있는 소림이 있고, 세계평화유지군 산하 기관인 노벨이라는 곳이 있다
소림과 노벨, 그 둘은 정보를 공유하고 데스트로소를 없애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라고 한다
승현은 연화가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방금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그래서 데스트로스? 이 사람들이 왜 한국에 있는거에요?"
승현의 물음에 연화는 먹던 햄버거를 한 손에 든채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그..그건"
연화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며칠전에 데스트로소가 소림사를 대규모로 습격했다고 한다
소림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뒤늦게 노벨이 합류했지만, 이미 데스트로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소림에 보관중이던 몇 개의 보물들을 데스트로소가 훔쳐갔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그.. 구슬인가요?"
연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은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각성? 적합자는 뭔가요?"
승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연화는 뭔가를 생각하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구슬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큰 힘을 준다고 해.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깨달음 같은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몇 십년 동안 평생을 바쳐서 수행을 하기도 해..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구슬이 힘을 주는 건 아주 극소수라고 들었어."
승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된 건가요?"
연화는 승현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구슬이 주인을 선택한다고 들었어.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할아버지에게서 들었을 뿐,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끼익
정적을 깨고 햄버거 가게의 문이 열렸다.
"오, 여기 다 모여있었네? 헬로 헬로~"
전체적으로 성숙해보이는 외모와 검은 단발머리, 선명한 이목구비와 갈색피부 그리고 여름인 걸 알려주는 시원한 옷차림.
적어도 한국에서는, 누가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린다, 오랜만이에요."
연화가 일어나서 린다와 가볍게 포옹했다
"이분은 노벨 소속의 린다 언니야. 아까 말했지? 우리 소림이랑 협력 관계라고."
연화의 소개에 린다는 시원하게 웃으며 승현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승현의 쟁반에서 감자튀김 하나를 슥 집어 먹으며 윙크를 건넸다.
"네가 그 유명한 로또 당첨자구나? 반가워, 승현! 난 린다야. 이 근처 지부에서 데스트로소 놈들 뒤를 캐고 있었어."
승현은 린다의 거침없는 태도에 당황하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린다는 골목의 흔적을 이미 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들이 가이반 한 방 먹였다며? 그 녀석 표정을 봤었어야 했는데.."
린다는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무튼, 그렇게 난리친 덕분에 너희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데스트로소 놈들도 이제 새로운 각성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겠지."
연화가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서 노벨에서는 뭐라고 해요? 승현이를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린다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부에서도 난리야. 지금 상의 중이긴 하지만 워낙 희귀한 케이스라 노벨에서도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거같아 그래서..."
린다가 승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분간은 연화, 네가 승현을 지켜주는 역할을 계속해. 즉, 연화 너는 내일부터 승현이랑 같이 지내야 한다는 소리야."
"에에엑?! 제가요?"
"와... 진짜요?"
연화와 승현의 비명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린다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일어섰다.
"자, 서둘러 햄버거 다 먹고 일어나자고. 보디가드라면 일단 의뢰인 집 위치부터 파악해야지? 아, 그리고 승현 오늘 밤부턴 잠잘 때 조심해. 네 몸 안의 불꽃이 잠결에 방바닥을 다 태워버릴지도 모르니까."
린다가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승현은 콜라를 마시다가 콜록거렸다.
연화는 그런 승현의 어깨를 팍 치며 자신감있게 말했다.
"걱정 마, 승현! 내가 옆에서 불 꺼줄게!"
잠시 후
높은 골목길을 걸어올라 승현과 연화, 린다는 허름한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건물이었지만, 승현은 익숙한듯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린다와 연화도 그런 승현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엄청 낡.. 웁웁."
연화는 린다의 입을 재빨리 손으로 막았다
잠시 뒤 모두의 발걸음이 멈추고 승현은 녹슨 문 앞에 섰다
삐삐삐삑
띠링
문이 열리고, 승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도착했.."
"미안."
퍽
순식간에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치는듯한 충격을 느끼며, 승현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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