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완벽한 혜진이가 딱 하나 못하는 게 있다면 자기 바운더리를 사람들에게 오픈하는 거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매사 공정하고 성실하지만 지나친 관심과 간섭은 극도로 싫어해.

1화에 등장했던 이정은 배우님한테 대하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어.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혜진이 모습이 그냥 도시에 사는 우리들 모습 같았어. 다들 모르는 사람이 말걸고 아는 척 하면 그렇게 달갑지 않잖아.

이런 혜진이에게 유일한 친구는 미선이고 나머지는 경쟁자거나(ex.대학동기) 서로 상관않고 살아가고 싶은 존재일 뿐이야.


반면에 두식이는 오지랖이 취미이자 특기인 시골 청년이야. 혜진이가 제일 못 하는 걸 제일 잘 하는 사람이지.

두식이는 사람들한테 벽을 치는 혜진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본의 아니게(?) 자꾸 도와주게 돼.

덕분에 혜진이가 공진이라는 시골 마을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었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갈 수 있었지.

그게 바로 임플란트를 싸게 해준다던가 하는 말을 먼저 꺼내는 장면들이라고 생각해.

근데 생각해보면 혜진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어.


애초에 공진에 오게 된 것도 이정은 배우님이 연기했던 아주머니 일 때문이었잖아.

보통 직장인 같으면 상사가 그렇게 지시할 때 고객 한 명을 위해서 갈등을 만들진 않지.

혜진이는 원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 그걸 제대로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이 그동안 마련되지 않았던 거야.

두식이가 있는 공진이라는 마을은 어떻게 보면 혜진이 본래의 온화한 자질이 잘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두식이가 혜진이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라는 암시는 이런 부분 말고도 여러 곳에서 나와.

혜진이가 어릴 적에 찍었던 가족 사진에서 웃음을 만들어주는 것, 슈퍼에서 딱 백원이 부족할 때 그걸 채워주는 것, 짝을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주는 것 등등

그래서 두식이가 혜진이 인생에 다시 없을 행운목 같은 존재인거지.


반면에 두식이의 결핍은 인생에 '나' 라는 존재가 부재해 있다는 거야.

혜진이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바운더리를 오픈하는 거였어.

자신만의 세상에서 비대한 자아를 소중하게 간직해 왔기 때문에 치대도 가고 사회적 성공도 이룰 수 있었겠지.

반면에 두식이가 살아온 방식은 자기 자신이 아닌 주변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거였어.

이건 어려서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커온 탓도 있겠지만, 두식이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아.


이 부분과 관련해서 감리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일종의 메타포처럼 느껴지는데

두식이가 감리 할머니더러 한번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 적이 없다고 그랬잖아. 나는 그게 마치 두식이 얘기처럼 느껴졌어.

자격증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지만 사람들을 도와주고 난 다음에 집에 돌아오면 두식이라는 사람은 텅 비어 있는 느낌.

1년에 5만원 받는 홍반장 말고 두식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뭐지?

두식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해 주는 일은 원하는 날 휴식하고 서핑하고 사진 찍는 건데,

그건 언제까지나 일시적 휴식과 쾌락을 위한 거지 두식이의 자아를 실현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


사람들이 도와달라는 요청이 없으면 홍반장, 홍두식이라는 이름은 의미없는 것이 돼버려.

다들 중국집, 카페, 철물점 등 어딘가에 뿌리박고 사는데 두식이는 그렇지 않아. 과거의 상처 때문에 일부러 자기 자신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어떻게 보면 마을 사람들이 두식이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두식이가 마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처럼 보여.

두식이는 <월든>의 소로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중심에 단단한 자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소로우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 불필요한 관계들은 거부하고 혼자 살았다구..


이 드라마에서 이기성의 상징이 혜진이었다면 이타성의 상징은 두식이야.

이타적인 두식이는 누구든 도와주지만 정작 본인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어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울고 있어.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양 극단은 통한다는 말이 떠올랐어.

사람들이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자기 내면은 감춰버리는 두식이가 실은 더 매정한 거 아닐까.

술자리 씬만 봐도 혜진이는 공진에 왜 왔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은 반면에 두식이는 과거를 숨겼잖아. 누구의 바운더리가 더 엄격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해.


지금 두식이에게 필요한 건 자기를 생각하는 이기심이야.

남 얘기 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징징거릴 필요도 있다고 봐.

남들 일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 자아를 실현하는 길을 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감리씨 에피소드에서 혜진이가 말하길,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일은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는 거라고 그러잖아.

그 말처럼 자신을 위하는 일이 진심으로 타인을 위하는 일일 수도 있어.


스스로를 아주 잘 챙기는 혜진이는 자기를 챙길 줄 모르는 두식이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스펙을 갖춘 두식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원하는 일을 하고 혜진이 말마따나 정당하게 살도록 격려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나중에 두식이 과거 다 알고 둘이서 얘기할 때 혜진이가 두식이한테 상처주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는거ㅠㅠ

혜진이 성격상 두식이가 안타까움+세상으로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두식이한테 비겁하게 여기 숨어 살지 말아라는 둥 뭐라뭐라 할거같아ㅜㅜㅋㅋㅋㅋ




아 간만에 들마 과몰입해서 주절주절 썼네..

아 참고로 여기 나오는 조연 에피소드 중에 두식/혜진 관계 메타포인 거 많아보옄ㅋㅋㅋ

일단 그 통장님이 얼굴 근육 아플 때 혜진이가 "아픈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러잖아

이거부터가 통장/영국 관계 말하는 동시에 두식/혜진 관계까지도 암시하는거 같았어


(통장님 이야기를 주목해야 하는게 통장님도 혜진이처럼 엄마 돌아가시고 공진항이 엄마품 같다고 생각하는거부터 시작해서

남편 영국이랑 상극임+둘이 솔직하지 못한 관계 등등 작가가 통장서사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느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