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 사무실 불은 이미 대부분 꺼져 있었다.

늦은 가을밤, 상대 팀 엘지의 우승 세리머니의 소란이 사라진 자리엔 고요만 남아 있었다.

그 고요를 깨뜨리듯 창가에 앉은 김경문 감독의 한숨이 낮게 번졌다.


“하… 결국, 또 2위구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의 무게는 종잇장처럼 얇지 않았다.


손혁 단장은 잠시 감독을 바라보다 조용히 차 한 잔을 그의 앞에 놓았다.

“감독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팬들도 선수들도 그걸 다 압니다.”


김경문은 차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최선이 무슨 소용입니까. 평생 준우승만 하다 끝나는 감독도 있는 법이지요.

올해는 정말 될 줄 알았는데… 저는 우승을 할 운명은 아닌가 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손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이 사람은 생각보다 더 마음이 다쳤구나.’


손혁은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내년엔 우승 갑니다. 제가, 단장이 책임지고 도와드릴 겁니다.

이미… 중견수 좋은 용병 하나 데려올 생각도 이미 하고 있고요.”


하지만 김경문은 멀어지는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런 지원, 받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제 더는 우승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잠깐의 침묵.

방 안을 메운 무거운 정적 속에서 손혁 단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감독님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부정하는데…

그럼 방향을 바꿔야겠군.’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을 꺼냈다.


“감독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는 중견수 외국인 용병을 데려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김경문이 고개를 든다.

“무슨… 뜻입니까?”


“우승을 당장 못 노리겠다는 의미라면,”

손혁은 보고서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렸다.

“중견수는 용병이 아닌 신인 오재원으로 갑니다.”


“오재원을… 중견으로요?”


“예. 이번에 1라운드로 뽑은 오재원 선수.

그 아이를 한화의 다음 10년 중견수로 키우겠습니다.

과감한 변화가 필요할 때 아닙니까?”


김경문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인을 곧바로 주전 중견수로?

그런 선택은 웬만해선 하지 않는 모험이었다.


손혁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감독님은 이미 리그를 대표하는 중견수를 키운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외국인 타자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손혁은 자신 있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수비 문제 때문에 팀을 떠났던 그 친구, 기억하시죠?”


김경문의 눈이 커졌다.

“…설마. 페라자?”


“예. 요나단 페라자.

타격만큼은 리그 정상급이었잖습니까. 그 장점만큼은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페라자를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타선의 중심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감독의 얼굴엔 놀라움, 걱정, 기대가 복잡하게 섞였다.

“단장… 그건 정말 큰 결단입니다.”


“감독님도 결단하셨잖습니까.”

손혁은 미소 대신, 묵직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승을 노리든, 미래를 만들든—

전 언제나 감독님 곁에서 돕겠습니다.”


김경문은 손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낙담으로 흐려졌던 눈동자에 아주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단장. 고맙습니다.

당장은 우승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내년 시즌,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오재원도… 페라자도…

다시 시작해봅시다.”


손혁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창밖 야구장을 바라보았다.

패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곳에서—

새로운 시즌의 불꽃이, 조용히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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