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구개신(革舊改新,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1]"


  •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2]"


  •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 잘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2]"


  • "조선인의 악벽은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이다.[3]"


  •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3] 형제숙질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4]"


  • "한국인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다른 사람 욕설, 험담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 "김옥균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짓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2]"



  •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노력하고 큰 결과물을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만큼의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불평불만을 품는 자들이 많다."


  •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
    -1906년 10월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5]"


  •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6]"



  •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떄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2]"


  • "이완용은 시대가 낳은 피해자요 희생자였다."


  • "조선인들은 머리가 텅 비었어도 잘난척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


  • "조선인들은 나는 깨끗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깨끗함, 착함과 선량함을 요구한다"


  • "조선총독부에서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3]"


  •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6]"


  •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는 결과다"


  •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3]"


  • "(어떤 것을 평가할 때)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3]"


  •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

 

그는 한국인들이 아는 척,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았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6]'라는 것이다. 이어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6]'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박중양은 조선인들은 애국심만 있다면 범죄행위를 해도 허용되거나 묵인하는 습성이 있다고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37]'를 들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을 가진 덕에 조선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하였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6]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해방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박중양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 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 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며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볼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타인의 말을 듣기 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며, 타인의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 하였다.

그는 '편협성, 배타성, 폐쇄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137]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138]'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가족끼리 서로 봐 줄 수 있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몰리게 됐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조선인의 근성에 대한 성토와 규탄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괴짜, 정신질환자로 몰려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 애국자론

 

(그는 김옥균과 개화파의 비참한 최후를 슬퍼하였다.)

그는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며 195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도 매국노가 아니라 선각자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역적이라 조선 상하가 흉언하였지만 이조 말년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다[5]'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유신을 약모(계획)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당시 뜻대로 성사하였으면 분명 우리가 일본과 비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옥균 등 개신파가 실패하고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박영효 일인이 귀국하고 대개는 객사하였다. 그들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동정하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6]'고 하였다. 이어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의 최후를 두고도 '김옥균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6]'라며 분개하였다.

이어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던 제1공화국의 관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권영진, 조의형,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6]'라며 항변했다. 그는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을 할 필요가 없다며 역설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이 최초로 독립한 것을 청일전쟁 이후 때로 보기도 했다. 그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 신라, 고려, 조선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며, '선인들의 애국심이 금일에 기고만장 떠들고 있는 사람들만 못한 것이 아니고 충의가 금일의 큰 소리를 장담하는 자들만 못한 것도 아니다. 불가항력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소이다. 조선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6]'란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느냐며 항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느냐며 계속 되물었다.

 

국가와 국민관

 

그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의 일기나 해방 후에 쓴 술회,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그는 한결같이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민을 살피지 않는 국가와 정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서 반발이 나오자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9]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이완용 희생자론

 

박중양은 그가 어쩔수 없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했다고 봤다.

그는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사람들이 흔히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쉽고,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되어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6]

1945년 해방 직후부터 그는 이완용을 변호했고 그는 어쩔수 없는 희생자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외면당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거나 부역하던 당시의 국민들이 모든 책임을 이완용, 박제순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등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만 모든 공격이 쏟아지는 것에 분노하며 이완용 애국자론을 펼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완용 피해자론, 이완용이 희생자라는 견해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때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6]'라며 이완용이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또한 한일 합방 때나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을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6]'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을사 조약 때나 한일 합방 이후 관직을 버렸던 일부 인사들, 그들을 양심적인 선비로 보고 존경하던 사람들과 언쟁꺼리가 되었다.

 

친일에 대한 소신

 

그는 자신이 민족 반역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해방 직후 그는 자신을 성토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0]"라고 반박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 제국의 신민이고 조선총독부의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08]'고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벌을 당했더라도 그는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처벌받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비교적 공정했다고 봤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과, 지역차별을 없앤 것을 내심 높이 평가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는 과정에서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조선 왕조조선총독부 통치기와 비교하여 암흑기로도 평가했다.

그는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140]'며, 일제에 대한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음을 지적했다.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140]'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 통치에 대해 증오감이나 편견이 없이 평가해야 된다고 봤다.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140]' 그는 조선총독부 통치의 공정한 이유로 지역감정을 없앴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일정시대에 인재 등용이 실시되어 이조시대의 차별을 받고 있던 평안도 출신도 도지사, 참여관 등에 등용되었다.[140]'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나 일제 통치기라고 해도 무조건 실력없는 인사를 채용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긍정적으로 봤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비교적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넘쳐났던 지역감정이나 출신지 차별, 출신성분 차별을 배제하고 공개채용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한 점, 문벌과 학맥 등을 가리지 않고 선발한 점을 예로 들어 조선총독부 통치가 편파적인 통치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조선의 일본화

 

그는 조선이 선진국 내지는 문명인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하였듯 조선인들도 일본의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12]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중양 타령'[12])

그는 비문명화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위해 일본인들이 협조, 지원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1908년 무렵 일본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일본인들의 우월성을 앞세웠다.[12] 그리고 조선인들도 일본인을 본받아 문명화와 개척 정신, 자립 정신, 호전성을 지녀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형식적인 위선과 무능력함을 열등감처럼 여겼다.

박중양은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작대기를 들고 다니던 그는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을 석방시키는가 하면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 관헌들을 작대기로 끌어내리거나 내리쳐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도지사중추원 참의와 칙임관대우였고,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므로 일본인 관헌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한국인 한일합방 기여론

 

그는 해방 직후부터 한일 합방이나 을사 조약의 원인이 일제,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 중에는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과, 당시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 모두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민생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악랄함에 의해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본 독립운동가 및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견해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술회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정치의 부패와 국민들의 고통을 지금 70세 이상 되는 연로자는 모두 다 아는 바이다. 행락 매관이 공공연히 이를 행하였고, 대소 관리들의 민재 탐취가 강도와 다르지 않았다.[140]'며 당시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그는 한일 합방의 원인을 무조건 일본인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금에게 직신(直臣)이 없고 궁중의 난잡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이었다. 집정자는 자기 영달에만 몰두, 탐욕했고, 국정일비를 무관심하였다. 고위 고관자는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타등하고, 백성들은 죽든지 살든지 아불관어(무관심)하였다.[140]'는 점도 지적했다.

박중양은 한일 합방의 책임을 외부에서만 찾는 것은 일시적인 자기 위안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한국의 쇠망은 그 원인이 적년요정(積年要政, 매년 쌓은 정치의 잘못)에 있었지 일조일석에 있지 않았다. 한국을 쇠망케 한 자는 한국인 누구누구였겠는가.[140]'라며 한국 내부의 잘못도 존재함을 역설하였다.

 

 

현실주의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황국신민이라고 규정했다. 일제 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