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파 판정 사건 이후 2년, 달라진 게 없다.

지난 8월 말이었다. 처음 보는 아이디로 e메일이 왔다. 태권도 선수의 학부모였다. 2년 전 편파 판정 사건으로 한 학부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승부 조작은 횡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5월의 사건이 승부 조작이었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경찰 수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났고, 검찰에서도 1년 넘게 발효시키고 있으니 법적인 결론은 그들과 법정에 맡기겠다. 다만, 태권도계는 수십 년 동안 승부 조작이 잦았고, 당사자들이 여전히 시도협회의 간부로 있는 한 언제든지 승부 조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학부모가 승부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한 대회는 2개 대학의 품새 대회였다. 그중에 한 대회의 동영상을 입수해 보내줬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2가지 이유에서였다. 태권도 심판도 아닌 기자가 동영상을 본다고 승부 조작을 알 리가 없었다. 또, 그 동영상을 권위 있는 심판에게 가져다준들 그들이 문제 있다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우였다. 동영상을 보고 코웃음이 나왔다. 초등학생이 봐도 누가 잘하는지 못 하는지 구분할 수 있는 경기였다. 태권도의 품새와 유사한 경기는 많다. 가라테의 카타, 우슈의 투로 등이다. 공통점은 호흡에 의한 리듬, 동작의 정확성, 힘의 흐름을 보면 된다.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3가지 요소만 갖고 봐도 판단할 수 있었다.


▲ 심판 이름 없는 판정표

대한태권도협회를 찾았다. 해당 경기의 판정 내용을 요청했다. 전산 업체의 내부 자료를 받았다. 그런데 심판 이름이 없었다. 식별 번호도 없었다. 누가 감점을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협회에 해당 경기의 심판 명단을 요청했다. 자료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신 그 대회에 투입된 심판 전체 명단을 줄 뿐이었다. 

2년 전에도 그랬다. 기록은 없다. 다만, 전체 명단과 기본적인 조 편성을 주먹구구로 맞췄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존했다. 전 세계 8천만 명이 수련하고, 유품단자가 국내에만 8백만 명이고, 매년 40만 명이 승품단 심사를 보고, 큰 대회에 참가하는 국내 선수만 수천 명에 이른다. 학부모가 지출하는 승품단 심사비만 연간 6백억 원에 이르고, 도장 수련비를 더하면 1조 원 규모, 전자호구와 용품까지 더하면 얼마나 큰 시장일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구멍가게다. 제자리걸음이다.

■ 심판을 공개하면 청탁의 대상이 됩니다?

경기장을 찾았다. 협회 간부에게 물었다. 야구장에는 전광판에 심판 이름이 떠 있고, 복싱과 레슬링, 펜싱 등 대부분의 아마추어 투기 종목도 기록지에 심판 이름을 적는다. 물론 해당 종목들이 오심과 편파 판정, 승부 조작에서 완벽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기본을 지킨다. 그런데 태권도는 왜 기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 심판 어깨에 부착된 식별 번호

답변은 심판을 공개하면 청탁이 대상이 된다였다. 대신 판정에 이의가 있을 때 소청을 받아주기 위해 심판의 어깨에 식별 번호만 단다고 했다. 실소가 나왔다. 2천 년대 초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가 구속됐다. 승부 조작 때문이었다. 좁은 태권도 바닥에서 전문가들끼리 이름과 얼굴을 몰라서 청탁을 못 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도 심판위원장을 통해 승부 조작을 지시했다. 그래서 내가 물은 이유는 투명하게 공개돼야 비리가 줄어들 수 있는데 왜 안하냐였다. 

공개하면 누가 불편할까. 떳떳한 사람이 불편할 리가 없다. 체육계에는 메달값이라는 게 있다. 개인 종목이든 단체 종목이든 입상 성적이 있어야 진학을 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부터 이뤄져 온 승부 조작은 메달값을 받은 체육계 간부들과 심판들이 메달을 만들어주기 위해 벌여왔다. 세상이 밝아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요즘은 더 교묘하게 벌어질 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대한태권도협회를 찾았다. 의견을 물었다. 협회도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평가 문제 때문이었다. 대한체육회가 심판 비리를 근절하고,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상임 심판 제도를 도입했는데 태권도는 무려 11명이다. 물론 이 가운데 태권도계가 인정하는 심판도 있고, 미흡한 심판도 있을 터인데 협회와 체육회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심판을 추천하기 위해 평가를 하려는데 자료가 없다. 그동안 전산에 심판과 판정을 연결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증거를 댈 수가 없는 상황이다.

■ 영상 촬영과 기록 공개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그동안 심판의 판정 기록이 전산에 정확히 연결돼 있었다면 협회는 제대로 평가하고 원하는 심판을 추천할 수 있었다. 더불어 영상까지 확보되면 문제 있는 판정에 대한 추적도 가능하다. 먼저 판정에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선수가 출전한 대회 데이터를 모은다. 감점을 자주 받는 동작과 경기별 평균 감점을 파악한다. 해당 경기에서 받은 감점이 통계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감점을 받은 동작이 다른 경기에서 감점을 받지 않았다면 오심, 편파 판정, 승부 조작을 의심할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심판의 판정도 추적할 수 있다. 문제가 된 경기에서 감점을 준 동작에 대해 다른 경기에서도 감점을 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선수와 심판을 모두 추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공개된다면 그 누가 섣불리 승부 조작을 하겠는가. 이런 시스템은 이미 정부 지원으로 프로축구에 도입됐다. 태권도는 겨루기의 경우 전 경기가 녹화되고 있고, 품새도 같은 방식으로 얼마든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다만, 의지의 문제다.

대한태권도협회는 KBS의 취재 과정에서 우선 심판 명단과 실명을 기재한 판정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전산 업체와 협의해 시스템을 개선하고, 내년부터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지켜볼 일이다. 얼마나 많은 선수와 학부모가 울고 발길을 돌려야 근절될지 모를 체육계 비리지만, 이 조치가 조금이나마 그 아픔을 덜어줄 수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