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여러가지 종교가 존재한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주로 기독교(개신교 포함)와 불교, 천주교 등이 대 다수일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은 또 하나 한국만의 종교가 있다. 바로 소위 '종군위안부'라는것이다.
미디어매체를 보더라도 심심치 않게 위안부를 기사화한다. 그들중 한 명이 죽었다든가, 그들을 상품화에서 파는 물건을 구매하자는 취지의 SNS도 유행이다.
심지어 정부마저 애지중지 받들어 마지 않는, 한국에 있어서의 대일정책의 0순위가 바로 이 '종군위안부'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군가?
1931년에서 대동아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전쟁중에 군사들의 성적문제로 탈영, 또는 강간을 줄이기 위해 설치한 '위안소'의 창부나, 여급을 지칭하는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돌연, 1992년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열었다. 필자는 이때부터가 '종군위안부교'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강제로 끌려갔으며 성적착취를 당했다'며 '일본이 보상하고 사죄해야 한다'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여태까지 계속 하고있다.
왜 이런 주장이 엉터리인가?
이들은 일본에 의한 '취업사기' , '거짓말'에 속아서 끌려왔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버마를 탈환한 1944년, 그곳에서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심문 조서의 일부분이다. 이를 참고하면, 일본에이전트들은 'comfort service'를 위해 한국에서 여성들을 모집했으며, 이 'service'가 정확하게 명시되어있지않지만 심문의 과정에서 미루어볼때 붕대를 감아주거나, 환자를 보살피거나, 군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라고 예측된다고 했다. 즉, 제3자가 직접 위안부를 심문한 공식적인 내용에서도 이런 'comfort service'가 군인의 향락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할줄아는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성이 전쟁터에있는 군인에게 'comfort service'를 제공한다는것이 뭔지 몰랐다면 말이 안된다. 그래도 몰랐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무식함 때문이지, 결코 일본군의 책임은 아니란뜻이다.
RECRUITING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Japanese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다음 역시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심문 조서의 일부분이다. 위의 리쿠르팅과 같은 문서에 있는 내용이다.
PAY AND LIVING CONDITIONS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위에따르면 위안부는 한 달에 약 1500엔(평균총수입)을 얻고 약 750엔을 경영자에게 변제했다고한다. 그 당시 경찰관 초임금이 약 50엔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고수입이었다는것을 알 수있다. 또한 그 밖의 내용에서 일본 장병과 함께 스포츠,피크닉,오락을 즐겼다고 서술되어있으며, 축음기를 가지고 도회로 쇼핑을 할수도 있었다고 되어있다. 특히 본문에서 A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위안부는 매춘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위안부 심문 조서 전문 ( http://ww2db.com/doc.php?q=130 )
'종군위안부'들과 그들의 열렬한 신도인 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정부가 배상하고 사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종군위안부교도들의 망상은 아마 '한일기본조약'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설마, 알고서라도 전과 같은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문명인이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1951년 이후 5차례나 회담을가졌으나 의견이 엇갈렸다. 우선 일본은 개인배상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것을 거절했다. 반대로 한국정부는 국가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1961년 4월 28일, 예비회담 일반청구권 소위원회 제 12차 회의에서 일본측이 "보상금이란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라고 물은데 대해, 한국측은 "미수금은 그 당시 규정에 의해 받을 것을 받지못한것을 말하며 보상금은 생존자,부상자, 사망자를 포함하여 피징용자에 대한 보상 즉 정신적 고통에 대해 말하는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일본측은 "이 항목은 사적인 청구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여 종래 이러한 청구는 국교가 정상화하지 못하였기때문에 해결을 보지 못한것으로 앞으로 국교가 회복되고 정상화가 되면 일본의 일반 법률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점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한국측은 "우리는 나라가 대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며 국교회복에 앞서 선행해야할것이라고 생각된다"라고 답했다.
다음으로 보상의 형식에 관해, 일본 측이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을 해달란 말인가?라고 물은데 대해, 한국 측은 "우리는 나라로서 청구한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우리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 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에 일본측은"개인 베-스가 아니라는것은 이해 할수없다. 원래 정식 절차를 밟았더라면 지불할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측으로서는 현재라도 미불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것은 전 회담에서도 언급하였다. 요컨대 우리 입장은 미불금이 본인 손에 들어가지않으면 안된다고 본다"고 답했다. 일본은 원호법을 원용하여 개인 베-스로 지불하면 확실해진다라고 개인에 대한 직접 보상을 주장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국내 문제로서 조치할 생각이며 이 문제는 인원수라든가 금액의 문제가 있으나 여하튼 그 처분은 우리 정부 손으로 하겠다"라며 한국정부에 의한 국내조치를 고집했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기초로 위에 내용을 이어담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서 박정희 정권은 무상원조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관 차관 3억달러를 제공받았다. 여기에는 북조선의 것도 포함되어있다. 남한은 북한의 것도 모두 끌어다쓴것이다. 이 조약으로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완전히 말소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조선에 있던 일본의 자산과 채권을 포기했다. 종주국의 물건은 종속국이 독립을 해도 종주국의 소유였다. 한 예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때 오히려 60억달러를 청구하였고, 독일은 아예 식민지에 대한 아무런 배상을 하지않았으며, 당시 독일과 합병중이던 오스트리아에게 배상금을 지불시켰다.
사실, 일본은 한국에게 아무런 배상금을 주지않아도 되었다. 왜냐, 한국은 대동아전쟁의 승전국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한일조약 당시에는 '전쟁배상금'이 아니라 '일한 청구권 및 경제협력'이라고 표기해놓은것이다.
1993년, 일본의 변호사들이 인도네시아에 가서, '보상을 위해 일본에서 왔으니 위안부피해자들은 자진신고해주기를 부탁한다'라는 광고를 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국민들의 비판에 일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었다. 1) 인도네시아는 이 문제로 보상을 요구한적이 없다. 2) 그러나 일본정부가 배상을 원하므로, 이것을 존중해 위안부에게 배상하는 대신 여성의 복지와 보건을 위해 사용한다. 3)일본과의 보상문제는 1958년 완결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종군위안부'들은 아무런 의미없는 투쟁을 하고있다. 사실 이러한 행위의 근본적인 탓은 '종군위안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들의 탓이크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국가간의 상호체결조약을 무시한채 '계속 투쟁하면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암묵적으로 등 떠미는것이다. 그러자 정말 세뇌당한 노파들은 그 말만 곧이대로 듣고 현재까지 시위를 하는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을 후원하는 단체들 중에는 필시 중국의 對韓공작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너무 감정적이여서,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달아오르니 말이다.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 중에 하나는 '외교'다 이 외교에 대해서도 '종군위안부'들은 너무나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이 일본과 가까워지는 것을 극도로 반대한다. 또한 이들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반일여론'을 형성시켜 근본적으로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정부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종군위안부'를 이용해 일본의 저자세를 이끌어내 조금이라도 對日외교를 수월하게 할 생각인가 보다. 아마 그들이 죽으면 '종군위안부교' 신도들은 그들을 등신불로 만들어 시체장사라도 할 생각인가보다. 좌익들의 전유물이 시체장사 아닌가. 실제로 빨갱이들은 박정희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것을 매우 비난한다. 아마 한국에서 우익정부나 인사들에 대해 비난선전용으로 끌어다 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종군위안부'들에게 쓸데없는 시간낭비하지말고, 당신들의 보상금을 받아간 한국정부에게 받을것을 권하고 싶다.
또한 '종군위안부'들이 강제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있는 반면, 매춘부에 불과하다는 증거도 있다. 더군다나 현재 55명 '종군위안부'중 그들이 실제로 위안소에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단지 그들의 증언뿐. 또, '정신대'와'종군위안부'를 구분못하고 시위하는 늙은노파들도 있다.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없다. 그러니 '종군위안부는 매춘부였으며 그 중에 일부가 억울하게 취업사기를 당했거나, 납치당했다는것'을 인정하면 된다. 그러면 일본도 사과할 명분이 없어지고, 당신들도 더 이상 사과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지는것이다.
아무런 의미없는것을 정부와 추종자들의 이득을 위해 강제로 투쟁을 강요하는것이 앵벌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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