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 나 그런곳 에 조공무역이 조선에서 이득 이라고 쓰여있지 그러나 그글에 해당하는 증거가 어딨는데
적어도 실록에 일본과의 공무역 여진 과의 공무역 전부 물품교환 한 내용이 쓰여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과의 조공무역 한
물품 기록이 없다. 그 얼마 안되는 고려 기록에는 있어
고려 도경
장화전(長和殿)
장화전은 회경전 뒤 정북 방향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
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 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엄중하다.
왕마(王馬)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옥으로 된 것도 있으니, 모두 조정(朝廷 중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 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帕]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狨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를 까는 것과 같다.
고려는 송나라 와의 외교로 어마 어마 한 경제적 이득을 얻고 있었지
그러나 정작 조선은 500년 중국과의 외교 로 그렇게 거지 처럼 살고 고려왕실 보물고에 송나라 황제가 준 보물이 쌓여있고 말에 금은 보화까지 주렁 주렁 달고 다녔는데 조선은 그런 기록이 없어 , 물품 받아 왔다는 기록또한 없고 김남이 쓴 노컷 조선왕조 실록 이란 책에 보면 조선인들이 병신 처럼 뜯기는 내용이 나와있고 죽천행록 이란 책도 보면 조선인들이 중국 가서 중국황제가 준 회사품 전부 중국인몫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록이 있어 애초에 중국 회사품이 더 많았다면 조선인들이 그렇게 거지 처럼 살수가 없어 , 군역 문란 하나 제대로 해결도 못하던 나라 조선 이었어
명나라 관례상 조공을 받으면 그것보다 크게 화답하는게 관례였다고 국사선생이 글던데 사료까진 모르겄다
그리고 조선에서 중국과의 무역양이 고려보다 많다고 쓴글들을 봤는데 애초에 뭘주고 뭘가져왔는지를 봐야지 인삼이나 은 주고 일상 생활품인 거울 , 붓 , 모자 , 바늘 이런거 사가져 왔는데 그이유는 내수산업이 씹창인 국가 라서 그런거지 이런걸 무역 이라고 한다면 무역이겠지만 이런짓을 백날 해봤자 부유해질수가 없지
115.23.*.* / 자세히 알고 싶으면 본문글에 쓰여있는 책을 보면 알수 있지 , 죽천행록 추천한다.
그야 고려는 거란 송나라 금나라 몽골한테 두루두루 조공바쳣으니까 당연 송나라가 고려놈 마음 붙잡으려고 존나 좋은거 우르르 준거지 좋아서 줬겠어 ?
애초에 회사품이라는건 통일신라 시절에 황금을 정기적으로 갖다바쳐도 책이나 주는게 고작이야. 고려는 하도 이곳 저곳 다 조공바치니 송나라가 고려놈 마음 붙잡으려고 좋은거 존나 준거고. 이씨조선은 다시 통일신라 시절로 돌아간거지.
반도 다 차지하지못한 고려라는 병.신. 관모 관복 건축 법제도 전부 중국 따라하는 새끼 머가 좋다고 보물주것냐 거란 여진족이랑 좀 헤어져 ㅠㅠ 새끼야! 하며 우르르 준거징.
그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공녀도 수 없이 바쳤지요
조공무역 조선이 더 이득 이라고 말하는 국뽕들이 정작 실록은 무료공개인데 1차 사료 도 못가져 오는게 말이 되겠나
'조선은 공녀를 수출하여 얼마의 무역흑자를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해줄 사람이 있을까? 무역이라는 말로 치장해봤자 조공은 결국 치욕의 역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