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 이영훈 교수님이 미래한국에 발표하신 글입니다. 이 글 하나로 모든 역사적 문제가 명쾌히 다 정리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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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반복해서 읽은 나의 소감은 한마디로 몽환의 당혹감이다. 대통령의 연설은 꿈속을 헤매듯이 지난 70년의 한국사를 회고했다. 대통령은 “70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헌신적인 투쟁으로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해마다 되풀이되어 온 이 같은 광복절 치사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그 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제국의 패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성립도 국제적 협의 과정에 의했다.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미국은 1941년 8월 대서양선언을 통해 전쟁이 끝난 뒤 후진 민족이 강탈된 주권과 자치를 회복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상을 밝혔다
1942년에는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시킨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를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했다. 이 같은 미국의 선택은 필리핀의 독립 방침과 밀접한 연관을 이뤘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한국 방침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영유한다는 1905년에 이뤄진 양국의 밀약을 파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같은 미국의 전후(戰後) 처리 방침에 한국인들이 유효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 전후 처리를 위해 미국의 젊은이 10만 명이 태평양에서 죽었다. 300만의 일본인이 그의 제국을 지키다가 죽었다.
일본의 영토로 지배된 한국에서는 23만 명의 젊은이들이 군인과 군속으로 징발되어 그 중 2만 2000 명이 태평양에서 일본인과 함께 죽었다. 그런 이유에서 1951년 48개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에서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카이로 선언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스크바 회담, 미소(美蘇)공동위원회,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라는 국제적 협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48년 한반도 남부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이 신생국의 주권에 시비를 걸었는데, 그 마지막 국제적 협의가 1954년의 제네바 회담이다.
한국의 외교관들이 그 회담에 나가 대한민국을 취소하자는 중국, 북한, 인도 등의 공세를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3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6,574명이 이 땅에서 죽은 덕분이었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 체제를 대신한 미국의 전후 처리 방침과 그 실천 과정에서 태어난 나라다.
내가 대통령의 연설이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이 나라의 성립을 둘러싼 이 같은 국제정치의 역사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웅장한 군세를 이뤄 두만강을 넘어 일본군을 몰아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역사를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솔직히 지적해 우리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역사 인식이나 김 씨 왕조의 위선적인 역사 서술은 그 거리가 멀지 않다.
대통령은 마땅히 이 나라를 독립시키고 방어해 준 미국에 대해 한국인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다. 아베 총리가 일본의 잘못을 용서한 연합국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 이상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읽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냉소와 경멸의 눈초리로 한반도를 응시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마음을 다해 감사할 수 있을 때, 역사의 원망은 은혜로 바뀐다. 일본과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미국의 백악관이 아베 담화를 긍정한 것을 보라. 명확히 미국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웃음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요 미덕이다.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은 대한민국을 성립시킨 해방 후 3년간의 국내 정치에 대해서 심한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은 오늘은 ‘조국의 광복’을 이룬 70년이자 ‘건국’ 또는 ‘정부수립’을 이룬 67년이라 했다. 광복은 무엇이고, 건국은 무엇인가. 나는 본지 505호에 게재한 글에서 광복과 건국은 실은 동어 반복임을 지적했다. 한 나라가 그의 최대 국경일을 기념하면서 이런 식의 혼란을 드러냄은 더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70년 전의 그 날은 미국에 의해 이뤄진 해방의 날이다. 이후 3년간 한국인들은 어떤 국가를 세울지를 두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자유민주주의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 공산주의로 가는 것은, 그럴 위험이 큰 좌우합작은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과 같다.”
그러한 외침으로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고 다중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바로 잡아 결국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혜안과 투지가 없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그 고고의 성을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의 대통령은 67년 전의 건국 사건을 회고하면서 초대 대통령의 아름다운 공적을 기렸어야 했다. 그 역시 국민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첩경이다.
대통령이 이 나라가 지난 세대에 이룩한 경제적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송한 것도 적절치 않다. 저(低)성장 추세가 이미 10년을 넘겨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자연이나 역사에 있어서 기적은 없다. 경제성장의 기초적 조건이라 할 시장경제제도는 일정기(日政期)에 걸쳐 정비되었다.
해방 후 분단과 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난 경제를 일으킨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1967년까지 군사원조를 포함하여 근 100억 달러의 원조가 공여되었다. 그를 통해 식량, 비료, 정유, 면방직 등의 기초공업이 1960년대 전반까지 건설되었다. 1950년대에는 국민교육 열풍이 불었다.
1965년 반일(反日) 민족감정의 큰 장벽을 넘고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이후 한국, 미국, 일본을 연결한 소재, 부품, 시장의 국제적 연관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지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후진경제가 조만간 봉착하기 마련인 기술개발의 애로를 한국경제가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손쉽게 고급 소재, 부품, 기계를 수입할 수 있는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웃 효과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누리는 매년 30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는 매년 2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일(對日) 적자에 기초한 것이다.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개도국의 교과서로 찬양하기 전에, 그것을 가능케 한 내외의 조건과 역사에 대해 겸허하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했다.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100년 전의 조선왕조는 무엇인가. 중화(中華)제국의 번병(藩屛)으로 존재했던 그 나라가 무리하게 외세를 끌어들여 사직을 보존하려고 했을 때, 동아시아의 역사는 얼마나 불행해졌는가. 그에 대한 한국인의 책임은 없는가.
한국인의 책임은 없는가?
인간은 누구나 제 나름의 개성적 기억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서로 독립적인 것은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을 존중해서다. 격동의 역사에 대한 나라마다의 기억은 각각의 처지가 달랐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부드러운 얼굴로 각자의 기억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선을 함께 미래로 맞춰야 한다.
역사의 해석을 두고 다투는 외교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것은 어떤 상징으로써만 통합이 가능한 부족사회에 고유한 일이다. 자유와 독립의 인간에게 역사는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용기와 비겁을 배우는 성찰로 있을 뿐이다. 아베 담화의 한 구절을 빌리면 역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당대인들의 가열한 선택이었다.
한국은 아직 부족사회인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인가. 아베 담화가 던지는 물음에 답할 차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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