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사실, 예술품이라는 것은
그 예술품을 원하는 수요층이 어떠한 수준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어느 나라 역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귀족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국의 육조시대 때 왕희지, 고개지, 도연명, 사영운 등
탐미주의적 예술인들이 나온 것을 그저 우연일까?

중국 통일신라의 사치품이 그토록 화려하며
고려 청자가 중국인들에게도 인정받은 이유 또한 그저 우연일까?

이탈리아 성당 천장에 그려진 수많은 명작들은
그저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이 천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것들은 예술품을 수요하는 사회적 매커니즘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자는 어떠한가?

우리는 조선 백자가 담백하고 검소한 멋을 가졌다고
한국사 교과서에서 어릴 때부터 배운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고매한 인품을 가진 양반들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학생 때부터 배운 그 주입식 교육이 맞는 말일까??
당시 조선사회는 일본처럼 귀족문화나 부루주아 문화가 전무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딱딱한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았다. 때문에 조선의 백자는 당연히
밋밋한 겉멋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농공상의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하에서 어느 도자기공이 자신의 도자기에 창의성과 창조적 반항정신을 심겠는가?

반면에, 일본 에도막부는 오사카를 기점으로 신흥 상인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이들은 다이묘들 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 했다.

이들은 과거에 감히 '무사'계급만이 누리던 도자기와 같은 사치품을 감히 구입할 역량이 됐고, 이 시절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크게 발달하게 된다. 더불어 우키요에나 가부키 등의 문화도 꽃피게 된다.

일본의 예술가들은 수요층들의 사치수런 요구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들의 창의적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상업의 융성으로 그 경제적 보답이 확실하고, 에도 막부가 중국과 조선에서 유교를 수입했다고는 하나 일본인들에게 그리 큰 그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조선의 성리학처럼 획일화된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창의적 역량은 조선보다 비교적 더 잘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당한 도자기공이 조선 귀화를 거부한 예가 있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 사상으로 인해 농부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디 도자기 뿐이랴? 미술사를 살펴봐도,
우리나라는 중국의 산수화를 모방하는 데 그쳤지만..
일본의 우키요에는 희대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그럼 같은 유교권 국가인 중국은 어떤가?

중국의 역사는 조선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조선은 임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지배층의 그 권위가 약해져, 자신들의 통치권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적 독재체제는 오히려 심해졌다.


반면, 중국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 성리학 뿐만이 아니라, 양명학이 나타났고
한족이 오랑캐라 깔보던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는 청나라 시기에는
전통 공예 기술이 가장 발달하게 된다.

그 시기는 바로 건륭제 치세다.
이때 황실에서는 여러 예술인들을 적극 후원했는데, 기존의 축적되있던
중국의 기술과 더불어 중국 미술, 공예품이 크게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청황실은 자신들이 문화에서 한족보다 딸리는 오랑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중원 지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한 것이다.

여기 까지는 관(官) 주도의 예술 수요라는 매커니즘 측면에서 보면
조선과 비슷하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수백만 달러에 팔릴정도로 중국의 도자기같은 공예품들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뭘까.

당시 청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건륭제 치세에는
서북으로는 외몽골의 준가르, 동북쪽으로는 동몽골, 만주, 서로는 위구르까지..
한마디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해야만 하는 세계제국이었다.

따라서 청은 조선처럼 성리학적 입맛에 맛는 예술품만을 수요하지 않았다.
부유하고 사치스런 청황실과 귀족들을 위해서는 럭셔리한 예술품이 요구됐으며,
덕치를 펴는 문인의 모습으로서의 황제를 위해서는 유교적 미학이,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유목민족의 지배자인 대칸으로서는 절대군주적 이미지가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티벳과 외몽골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라마교 미술을
후원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었기에
서양인들이 중국의 도자기에 열광하여
서구에서 '쉬누아즈리' 열풍이 일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예술품은 화려하고사치스러운 것이 다는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조선 백자처럼 은은하고 담백하며 검소한 멋도 하나의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왜 조선에서는 그러한 아름다움 밖에 존재할 수 밖에 없었나 반문해야 한다.

나는 조선 백자에서 답답하고 경직됨을 느낀다.
그것에서 창의성과 실험정신 반항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예술의 창조정신을 통제당한 흔적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