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자주 오는 편도 아닌지라 가끔 글쓰기도 뻘쭘하지만 어제 중계도 잠시 했던 만큼 마무리 의미에서 간단히.

지금 30 조금 넘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용노사 빠였으니 나름은 오래되었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첫 입문작은 독보건곤이었고 이전 이후 다 읽었다.
처음 읽은 무협지가 김용선생이고 다음이 용노사였으니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가다. 개인적으로 연차는 많이 나지만 대학 후배이기도 해서 생각하는 바가 조금 남다르다. 성격이 급한 걸 좋아하지 않고 문장에 까다로워서 변화는 적을지언정 견실하고 기본기가 잘 된 용노사 글이 잘 읽히기도 했다.
사인회가 있다는 걸 안 게 목요일쯤이었다. 생각없이 북큐브 공지 누르니 거기 있었다. 검색해 봐도 별 자료가 안 나오는 것이 홍보가 부족했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일하는 곳은 광화문까지 한시간 조금 안 걸리는 위치다. 토요일 오후에도 근무는 있었지만 적당히 말하고 점심때 나왔다.
금전적으로 몇만원 손해도 있었지만 십수년 팬인 작가분을 직접 뵙는데 그 정도는 하고 가볍게 감수했다.
헐레벌떡 교보문고에 도착하니 두시 가까이 되더라. 일단 책부터 샀는데 서고번호였다. 직원분께 문의하니 바로 옆에 쌓아두었다가 건네주었다.

사인회 위치는 전에 민훈기 기자 사인회를 지나가다 봐서 짐작으로 달려갔는데(그만큼 교보에서 안내가 부족했다) 딱 거기였다. 달려가니 사인하고 계신 용노사가 보였다ㅠㅠ). 후딱 뒤에 가서 줄서서 이름 쓸 용지 받았다.
막상 차례가 오니 참 두근두근하더라. 가수니 아이돌이니 같은 쪽에 영 관심없이 살아온 덕후인생이라 누구한테 싸인 받아야지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평소에 존경하던 작가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생각하니 참 기쁜 마음이 생겼다.
애초 머그컵엔 별 관심이 없었고(단가 생각하면 그런데 나올 머그컵이 질이 좋을 리가 없다) 싸인이나 받아 오면 행복하겠다 했는데 줄 서고 보니 의외로 사람 자체가 적더라. 싸인용지는 수백장이나 쌓여 있던데 그때부터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분쯤 기다리니 금새 차례가 왔다.
가까이서 본 용노사를 보니 심장이 쉬 진정이 안 되더라. 뭔가 드립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를 못했다.
그냥 진심 담아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첨 팬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 민방위가 되었습니다.`
하니
`시간이 많이 흘렀지요.`
하고 대답해 주시더라.
용노사 글들 읽어보면 직하인 선생 정도 되는 전문가까지는 아니라도 근현대 동서양 소설하고 한학에 조예 있는 사람이란 느낌 강하게 받는데 글씨도 행서에 가깝게 잘 흘려쓰시더라.
같이 서서 사진 찍을까 했지만 본디 사진 찍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 관두었다.
이것저것 여쭈어 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따로 대화시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이 점이 참 맘에 안 들었다) 기다리실 뒷분들 생각해서 물러났다.
잠시 보고 있으니 웬 체구 건실한 분 오시던데 건너보니 용노사가 책에 이름 적는데 `좌백 선생님께`라고 적으시더라. 헉 싶었다. 다시 보니 사진에서 보던 좌백선생하고 좀 닮았다.

이후는 좌백선생한테 가서 사인 받으려고 책 찾아봤는데 무협 단편집 재고가 딱 한부 떴지만(아무리 그래도 읽은 적도 없는 철학책 갖고 가서 싸인은 못 받겠더라) 책장에 없었다. 누가 들고 갔나 보더라.

죄송하다고 싸인지 한장 얻어서 뒷면에 싸인 받았다.
`책 사오지 못해 죄송합니다.`하니
`여긴 저도 손님으로 왔는걸요`하시더라.
작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팬으로서 팬심으로 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자세가 인상에 남았다.
글씨는 용노사만큼 유려하진 않지만 싸인 하나는 전서에 가까운 栢자로 유려하게 써주시더구먼.
이후는 잠시 근방에서 지켜보았는데 사람 끊겨서 두분이서 이야기만 죽 하시더라.
너무 급하게 오느라 조공 하나도 못 챙겼구나 싶었다. 소흥주라도 사다드리고 싶었지만 근방에 주류 파는 곳이 없었다.

한바퀴 돌면서 보니 사인지도 치우고ㅠㅠ).
괜스레 미안해지는 감정까지 생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회에 사람이 적게 온다는게 이리도 쓰라린 일인지.

밤에 들어오는데 지하철에 풍선 든 아가씨들이 꽉 찼더라. 알고보니 드림콘서트인가 했다는데 차라리 아이돌 가수나 좋아했으면 속이 덜 쓰렸을 것 같다.


용노사는 마초스런 분이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생각 이상이신 분이었다.
사람 볼 때도 눈을 마주치기보다는 고개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수줍음 타는 성격처럼 보이더라. 물론 독자 싸인회가 낯설어 그랬을 확률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우악스런 성격은 아닐 것 같다. 교실에 보면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책만 읽고 있을 얌전한 학생이 딱 떠올랐다. 눈에는 깊이가 있었다. 용노사가 스스로 쓰기 좋아하는 사천성의 깊은 우물 생각이 딱 나더라(유성검하고 군림에서 본 기억이 난다). 물론 그렇게 반박귀진스러운 깊이는 아니지만 인생의 단맛쓴맛을 다 녹여낸 맛은 확실했다.
좌백선생한테 싸인할 때도 `좌백선생님께`라고 꼬박꼬박 써주는 걸 보니 성품은 짐작할 만 하다.

좌백선생은 괜히 판무삼흉에 걸맞게 우락부락한 사진만 봤는데 실제로 뵈니 사진과는 영 달랐다. 체격도 생각보다 왜소했고(전엔 탄탄했을 것 같다) 
머리도 박박 깎았고 이빨상태나 혈색도 그리 좋지는 않은데다 발산하는 기가 영 약해 보이는 게 확실히 큰 병 하나 앓고 난 사람 얼굴이더라.
마님 소식이나 연재소식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를 못했다.
연재를 방치한 건 확실히 프로로서 실격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모습 보니 참 속이 약해지더라. 평소 좋아하던 작가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멀리서 오신 분도 있겠지만 일단 다녀온 것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안 오신 분들을 차마 나무라고 싶지는 않은데 다들 자기 삶이 있고 방향성이 있기때문이다. 다만 자기가 용노사 빠라고 자부하는 사람 중 덜 바빴던 분은 어떻게라도 왔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장래의 용노사나 나아가 이 좁은 시장을생각해서라도. 꽤나 소심한 얼굴을 하고 계신 용노사가 이번 일로 상처나 받지 않을까 그게 걱정될 뿐이다ㅠㅠ). 

이번 일로 자신도 가능하다면 용노사 책은 종이책을 따로 사서 보려는 결심을 했다. 조금이라도 행동하는 게 팬으로서 할 일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