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내러티브 내에서의 주인공의 역할은 지대하다.
이는 소위 무협 소설이라는 작품들이 대부분 취하고 있는 배경의 특징과 연관이 깊다.
이들이 배경으로 취하고 있는 강호는 비록 현실을 기반으로 한 '있음직한 세계'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허구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수백 년 전을 그 시점으로 삼기 때문에 고풍스럽고, 일정한 틀이 잡혀 있기에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제는 강호가 과거의 겉모습 중 일부만을 빌려 왔기 때문에 실제 인간들이 살아 숨쉬던 모습을 그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아무리 무협소설이 발전하고 씬이 확장되더라도, <장길산>에서의 눈 앞으로 밀려오던 것 같은 묘사가 무협의 틀 안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 차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기 때문인지, 한국의 현대 무협은 대체로 임팩트와 연출에 힘쓰며 이야기의 진행을 주인공에게 맡기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무협의 장르적 쾌감은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과거인들의 땀내 나는 모습이 아닌, 등장 캐릭터들의 강력한 힘과 그 힘을 빌린 통쾌하고 비장한 상황 전개에 있기 때문이다.
<쟁선계>의 석대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강력함은 수없이 많은 고수가 날뛰는 작중에서 한 손에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통쾌함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이제 <쟁선계>에서, 주인공 석대원의 매력과 비중은 연재 재개 이후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승한 필력에 비례하듯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고수들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쟁선계>의 등장인물을 살펴보자면, 가장 클래시컬한 주인공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석대문이다. 석대문이야말로 높은 무공과 호탕한 기개, 시련의 극복 등을 갖춘 진정한 주인공의 모습을 갖지 않았는가.
석대원의 처지가 저렇게 된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재일의 개인적인 성향이 대체로 이러하다.
이재일은 <묘왕동주>에서도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를 흐트러뜨렸던 전적이 있다. 이전 단편들인 <문지기> 나 <삼휘도..>를 보더라도 이재일의 이야기 창작 성향은 '훌륭한 한 인물이 성장하여 적을 무찌르고 뜻을 이루는 과정'을 철저히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것과 이미 등을 돌린 상태임을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언젠가 가볍게 쓴 적이 있는데 이재일의 성향은 군상극에 가까운 것 같다.
둘째, 석대원은 주체적인 주인공이 아니다.
무릇 주인공이라는 것은 서술하는 시점이 누구냐, 어떤 이야기를 그리느냐와 관계 없이 극의 큰 줄기를 휘어잡고 이끌어가야 할 임무를 띤다. <셜록 홈즈>에서의 셜록 홈즈가 그렇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당테스가 그렇다. <셜록 홈즈> 장편 중 하나인 '바스커빌 가의 개'에서는 이야기 중반에 홈즈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재(不在) 상태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다른 등장인물들과 비교를 불허한다. 이는 극중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명실상부하게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석대원 만큼이나 처절한 행보를 이어가던 심연호가, 노독행이, 주인공답지 않았던 적은 없다.
석대원의 경우는 어떤가? 비각에 대한 복수와 강호 말살 예방이 온전히 그의 뜻인가? 그것을 위한 움직임 중 그가 스스로 주도했던 것이 있는가? 심하게 말하자면, 그는 운리학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잔혹한 수레바퀴 속에 끼여 강제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또, 주인공이 뜻을 이루기 위해 남의 힘을 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석대원의 경우는 남에게 자신의 힘을 의탁하고 있다. 그는 비각과 싸우기 위해 무양문에 의존했다. 작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에피소드인 금부도 원정에서는 아예 석대원의 신분으로 움직이지조차 못한다. 기세좋게 집에 다녀와야겠다며 나선 군조와의 싸움은 어떤가? 때맞춰 나타난 석대문이 아니었다면 목숨과 인간성 둘 중 하나는 잃었을 것이 확실하다. 심지어 그는 한로가 없이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버겁다. 현재 작품의 절정 부분인 태원 격돌은 무려 적의 가짜 편지를 보고 속아 그 행보를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멋과 힘은 퇴색하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멋이 부각되고 있다. 주변 캐릭터에 주인공이 함몰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게도 단운룡이 떠오른다.
셋째,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부족하다.
석대원은 황약사나 소연신처럼 다재다능하지 못하다. 홍칠공처럼 의 하나만을 보는 남자다움을 갖고 있지 않다. 곽정처럼 대쪽같고 줏대있는 모습을 보이지도 못한다. 진화 이후의 진산월처럼 날카롭고 시크하지도 않다. 양과처럼 재기발랄하고 열정이 넘치지도 않는다. 영호충과 같이 긍정적이고 호쾌하지도 못하다. 하다못해 양판소의 주인공들처럼 전대 고수들을 코웃음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힘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비극적인 배경과 무지막지한 무공, 거대한 체구와 약간의 넉살, 이에 홀린 여자들에 불과하다.
(물론 캐릭터의 매력이라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므로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
이재일은 일부러 주인공이 학대당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앞을 다투는 세상'에서 남들과 함께 어깨를 견주지만, 막상 왜 남들과 앞을 다투는지는 알 수 없는 운명. 자신은 알지도 못했던 남들의 욕심에 휘말려 엉겁결에 부모를 잃고 살인의 길에 들어선 석대원이 아닌가. 그 끝에 평화가 오기를.
졸려서 더이상 못쓰겠음
금요일 빨리와라 얍
글 잘쓴다
재밌게 잘봤어. 난 요즘 1주일에 1회 올라오는거 기다리는게 너무 힘들어서 짬날때마다 1권부터 복습중인데 초반의 석대원은 사실 주인공으로서 매력이 충분했다고 봐. 1권에서 가짜혈랑곡(비각)애들 때려잡는거나 주점에서 염련애들 때려잡는건 그렇다치고 2권에서 수상싸움씬은 상당히 임팩트 있게 잘 썼다고 생각하거든. 금부도편이 좀 늘어지는게 아닌가 싶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쟁선계 지금까지 분량중 금부도가 가장 석대원에 포커스를 맞춰 진행한 (금부도 잡입,그 안에서 사건만들고 결국 최종적으로 해결,그 와중에 여주인공과 맺어지기까지했으니) 에피소드라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석대원의 이미지가 흐려진 가장 우선적인 원인은 장기간의 연중(...)을 꼽고 싶어. 쟁선계가 어느 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게 큰 특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연중전에는 석대원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에피소드가 절반 가까이 되었던데 반해 연중이후 다시 재개된 10권부터는 좀 심하게 말해 석대원을 주인공이 아닌 쟁선계내 한 인물로 그리는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거든. 당장 10권이후 석대원에 대한 분량은 군조와의 싸움때 찔끔, 복귀해서 태원으로 가기까지 찔끔, 태원 가는 와중에 사씨남매와의 만남과 싸움 찔끔 정도였고 군조와의 싸움 마무리가 결국 석대문손에 이뤄졌던걸 감안하면 그닥 쟁선계내 영향을 끼칠 중요한 에피소드도 아니었으니.
이재일도 이부분에 대해 인지를 해서 중양회편 말미에 본격적으로 석대원의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썼었고 실제로 태원 에피소드에선 지금까지보다 석대원 관점에서 에피소드가 진행되거나 석대원과 뗄수없는 진금영 관점에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경우가 늘어났지. 지난주 금요일 연재분 처럼 슬슬 석대원이 강하다 '카더라'수준이 아닌 팬들이 선상싸움 이후 잊고있었던 그 강함을 다시 보여주려 하고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남는건 쟁선계내 최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연벽제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가 아닐까 싶어. 태원 에피소드의 주역은 석대원인데 분량으로 따지면 얼마 안되는 연벽제가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모든 주목을 끌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야.
각설하고 나도 이재일의 쟁선계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적인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전개가 아닌 쟁선계월드내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이들이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주인공에 대한 비중이 낮아지고 매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감수해야할 부분일테고. 하지만 그럼에도 1권부터 다시 재독하고 있는 입장에선 석대원이라는 캐릭터가 (비록 두부멘탈 스럽긴 하지만...) 무협이라는 장르의 주인공으로서 매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라고 봐. 갖고있는게 얼마 안되고 그나마 피동적으로 움직이는게 무매력의 원인이라 했지만 한편으론 노독행이나 심연호를 쟁선계월드에 갖다놓고 이재일이 쓴다해도 해당작품의 맛을 살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거든.
태빠횽이 언급한 묘왕동주에서도 가장 정통 무협 주인공 스러운 배경의 장머시기(이름이 생각 안나네 ㄷㄷ..)보다 단탈이나 박한의 캐릭터성과 임팩트가 더 강했던걸 감안하면 (물론 묘왕동주의 주인공은 단탈이고 박한과 장머시기가 서브주인공이었긴 하지만) 여러 캐릭터를 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걸 이재일의 특성이라 보고 주인공의 비중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독자들이 해야지 않을까 싶어. 에잉 다 때려치고 나의 석대원짜응은 그렇지 않다능!! 진금영짜응이랑 잘될거라능 하악하악!!!
흥 석대원은 비극적으로 죽을거라능! 어쨌든 읽어줘서 ㄱㅅㄱㅅ
잘 썼네. 두 사람의 의견에 다 공감.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