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보필중 정하성은 감자(甘蔗. 사탕수수)차를 즐겨 마셨다.
그는 그 달콤쌉싸름한 맛이 좋았다. 혀끝을 타고 입안에서 맴도는 부드러운 맛과 향.
어염집 자식들이라면 감히 꿈도 꾸기 힘든 취미겠지만 정하성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전대 무림맹 정보처장. 열 걸음 안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그의 비도를 피할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별호.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십보필중의 명성을 모르는 이는 강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날이 찾아오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네놈의 정체를 알고 있다. 내일 자시가 끝나기 전까지 유색객잔으로 찾아와라.
만약 이 말을 어길 시에 온 천지에 네놈의 정체를 폭로하겠다.
"......"
정하성은 전서로 날아온 삐뚤삐뚤한 글씨들을 읽고는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정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강호에서 정체를 숨기고 활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곰곰히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잘못 온 전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분명 인감과 자신의 이름이 찍혀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이 전서를 보낸 작자의 정체였다.
'대체 누굴까?'
정하성은 한숨을 쉬며 더운 김을 내뿜고 있는 감자차를 홀짝였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감자차만한 물건도 없다.
이윽고 찻잔을 비운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선반을 열었다.
'금분세수한 이후로 다시 잡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 쌍의 비도를 품에 넣고,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석양을 감상했다.
아름답게 불타는 석양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다.
유색객잔은 정하성의 집으로부터 약 이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객잔이다.
주인이란 놈은 술시만 지나면 곧장 문을 닫아거는 손님 배려라곤 모르는 자식이다.
이따금씩 찾아가서 술찌끼나 조금 얻어먹기도 했는데, 그날도 역시 유색객잔의 문은 닫혀있었다.
굳게 잠긴 문을 보는 정하성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감돌았다.
여기 내려와선 그나마 정하성과 트고 사는 사람인데 마지막 가는 길에 보지도 못하다니.
"들어가지 마."
어께 너머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정하성의 얼굴이 굳었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놈은 반로환동한 고수일 가능성이 크다!
"고개를 돌려도 괜찮겠소?"
"그러시든지."
정하성은 품 속의 비도로 손을 뻗었다. 긴장된 얼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줬다.
목소리로 보아 놈은 지금 십 보 안에 들어와있다. 명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바로 지금이다!'
정하성의 허리가 백팔십도로 회전하며 품 속의 비도 한 쌍이 날았다.
거리와 방향은 정확했다. 다만 놈이 상승의 고수라면 잡아챌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했다.
하나는 미간을 향해, 하나는 심장을 향해서 던졌으니 살아남을 수는 없으리라.
침묵을 깨뜨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퍼졌다. 정하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의 미간과 심장을 꿰뚫어야할 비도가 나무둥치에 꽂힌 채 대롱거리는 것이 아닌가!
'실패다.'
정하성은 자신을 조소하며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저벅하는 발소리, 자신쪽으로 치달아오는 사신의 것이 분명했다.
정하성은 마지막으로 사신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무엇이 부족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그것을 듣지 못한다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네."
소녀의 비아냥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성은 쓰러진 채 고개를 들어 소녀를 향했다.
이제 겨우 십 오세는 되었을까, 정하성이 손녀딸을 봤더라면 아마 저 정도쯤 되었으리라.
어둠 속에서도 빛을 흩뿌리는 은발과 홍옥빛 눈동자. 틀림없는 색목인이다.
그제서야 정하성은 놈이 자신을 왜 죽이려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녀석은 한족에게 살해당한 색목인 관리를 부모로 둔 아이일 것이리라.
'업보는 결국 돌고 도는 것인가...'
정하성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몽고의 잔재를 쓸어낸다는 명분으로 죽인 색목인만 해도 부지기수다.
언젠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정하성은 눈을 떴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 사이로 감자차의 향기가 흘렀다.
여기가 대체 어딘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닥을 짚은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볼을 꼬집어봤지만 시야가 흐려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한참을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정하성은 비로소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자기 방이다.
"일어났어?"
은발의 색목인 소녀가 차가 놓여진 쟁반 하나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하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의 소녀다.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어제 만났던 그 소녀라는 것이다.
정하성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차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유은향. 들어는 봤지?"
정하성의 입에서 탄성의 신음이 흘렀다. 유은향이라면 마교 교주를 잡아죽였다는 협객의 이름이 아닌가!
정사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금분세수한 입장이라 소문으로만 익히 들었는데 이렇게나 어린 아이일 줄은 예상조차 못했다.
"왜 날 죽이려고 했나?"
감자차를 한 모금 홀짝거린 정하성이 물었다. 은향이라는 소녀가 고개를 젓고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모르는 오해가 조금 있었어.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오해? 설마 무림맹에서..."
"무림맹하고는 관계없어. 일종의 나와 사부의 관계라고 해둘게."
"그런가."
정하성은 그렇게 말을 받으며 다시 감자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달큰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군. 이 맛을 다시 맛보지 못할까봐 걱정했었다."
"이게 대체 뭐길래 그래? 주전자에 남아있는게 조금 있길래 끓여봤는데."
"감자차라는 것이다. 자네도 한 모금 들지않겠나?"
감자차라고?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하성의 찻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감자에서 우러나오는 달콤쌉쌀함이 입안을 맴돌며 사람의 뇌 속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입안을 헹구듯이 차를 음미한 소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감탄했다.
"우와, 이거 맛있잖아...?"
"꽤 비싼 물건이다. 나야 돈이 있으니 여생동안은 마음껏 마실 수 있겠지만. 급하게 마셨다간 단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 천천히 들이키게."
"으응."
소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 모금을 머금었다. 우물거리는 얼굴에서 화색이, 눈에서는 기쁨이 감돌았다.
이런 건 생전 처음 먹어보는 표정이다. 어제밤까지만 해도 자비 없는 살인마의 얼굴이 오늘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변해있었다.
"느낌이 어떤가?"
"달고 맛있어."
정하성은 해탈한 듯한 소녀의 얼굴을 감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 잔의 감자차로 맺어진 소녀와 노인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자차로 통할줄이야
좆중딩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