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에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였고 쟁선계에서도 결국 왕진 에센 이악 세명의 연결 고리가 중요한데 실존 인물인 왕진 에센에 대한 이야기니깐 심심하면 읽어보셈 우겸도 등장임요.
나라는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즉위하여 전대미문의 10족을 멸하는 등 수많은 사람이 연좌되어 죽었으나 어찌되었던 영락제의 치세하에서 명나라는 초기 기틀을 완전히 확립하였고 수차레 몽고정벌(물론 1차를 제외하면 변변한 성과가 없었지만)과 정화의 하서양으로 국력을 떨쳤습니다.
후에 홍희제-선덕제가 연달아 즉위했는데...명나라는 중국역사상 손꼽히는 암흑왕조라 불리는데...그나마 성군이라 할만했던 홍희-선덕 그리고 훗날의 홍치제가 단명했다는 점이 참 아쉬울 뿐입니다.홍희-선덕의 치세는 인선의 치 라고 불리웠는데 아쉽게도 홍희제 재위1년도 안되어..그리고 선덕제는 7년간 즉위했으나 죽었을때의 나이는 아버지인 홍희제보다 어렸다는 점에서 명나라의 암울한 앞날을 예견하는듯 했습니다.
선덕제가 죽고 죽위하니 이가 영종 주기진 입니다.영종황제는 특이하게 정통 그리고 천순 이라는 두개의 연호를 가지고있는데 그렇게된 이유는 바로 그가 두번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입니다.영종은 9살의 나이에 즉위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영락제 이래 중신인 양부 양영 양사기 이 세명의 양씨가 대학사로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고령이었습니다.영종 입장에서는 새로운 젊은 측근이 필요했는데 이때 발탁된 것이 바로 왕진이라는 환관이었습니다.
왕진은 영종이 왕자시절부터 옆에끼고 놀아주던 사이었고 영종은 왕진을 늘"왕선생"이라며 친근하게 대했습니다.영종 즉위후 할머니인 장태후는 사람을 내각으로 보내 정사를 물었는데 왕진이 거짓보고를 하는 바람에 장태후는 노발대발하여 왕진을 죽이려 했으나 주변에서 만류하여 넘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장태후는 병으로 죽게되고 왕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명의 양씨는 이미 늙고 병들어 왕진을 견제할수없었고 왕전은 이내 조정대사를 장악하게 됩니다.
권세를 손에쥔 왕진은 온갖 전횡을 일삼는데 어느날 황제의 개인교사라 할수있는 한림원시강인 유구가 황제에게 친정(국사를 황제의 손으로 직접 결정함)을 권했는데 왕진은 이건 나를 음해하려는 수작이다 라고 판단해 유구를 금의위(황궁경호대+대신들을 감시하고 첩보를 윕수하는 군사기관)로 잡아가 난도질을 해서 죽이고 시체는 들에 버려버립니다.
다음은 경가국자감좨주(서울대학교 총장)이시면이 어느날 왕진을 마주쳤으나 별 인사를 하지않았고 이에 화가난 왕진은 이시면이 공부(건설부)에서 사용해야할 목재를 흠쳐다 썻다는 죄목으로 목에다 칼을 채워 국자감 문 앞에 3일동안 꿇게합니다. 국자감 학생 천여명이 애원했으나 구할길이 없었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영종의 어머니 이태후가 영종에게 말하여 이시면을 구해줍니다.
대리소경(헌법재판소 부소장)설선 또한 왕진에게 인사를 안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뇌물수수의 죄를 덮어씌운뒤 죽이려 했으나 어느날 왕진이 퇴근하자 부리는 요리사인 머슴하나가 눈물을 흘리는걸 보고 연유를 물었고 설선과 같은고향이라 눈물을 흘린다며 하소연을 하였고 왕진은 설선을 살려줍니다.하지만 철령(정도전에서도 나왔던 그곳)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금의위 소속 왕영은 왕진에 대한 비리를 익명으로 써서 전단을 돌렸다가 잡혀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또한 어느날 왕진의 악행을 적은 전단이 도성에 부착되자 왕진은 이게 누구소행이냐며 조정대신을 모두 풀밭에 꿇어앉혔고 3일동안 물한모금 주지않았습니다.3일후 환관 내부소행이 밝혀지자 풀어주었지만 이미 몇몇 조정대신은 탈진해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왕진이 무소불위한 권세를 휘둘렀지만 이에 아부하는 대신도 있었는데 공부시랑(건설부 차관)왕우는 수염을 일부러 기르지 않았는데 왕진이 왜 그러냐고 묻자"아버지가 수염이 없는데 자식이 어떻게 감히 수염을 가진다는 말입니까?"라며 아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방에서 변화가 생기는데...당초 명나라에게 내쫓긴 몽고족은 영락제에게 토랍하(울란바토르 근처)에서 다시한번 패하였는데 얼마뒤 와랍이라는 부락이 세력을 떨치게 되어 명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이 와랍부락의 대칸이 에센이라는 자였는데 에센은 처음에는 중국에 공경적인 태조로 나와 매해 말 등을 조공했는데 왜 전쟁을 하게되었느냐면...
첫째로는 사신단과 말 무역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명나라 아니 중국 역대 왕조들이 늘 곤혹스러워 했던 것으로 중국은 늘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대국답게 모범과 포용력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사신이 가져온 예물 그 이상으로 답례를 해서 보내게 되었는데 오죽하면 당나라때는 서역의 아주 조그만한 나라에서 금 알갱이 몇개를 조공으로 바치면 당나라 정부에서 금궤와 비단등으로 보답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엄청나게 남는장사를 할수있으니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나라에서는 일부러 사신단을 많이 보내고 또 더 부풀려서 중국에 통보하여 최대한 많은 예물을 타가는게 관례로 되어있었습니다.명나라나 중국 왕조도 바보가 아닌이상 다 알고있었지만 걍 재물로 평화를 산다고 생각하는 개념이었조..말 무역은 당시 몽고는 말을 통하여 중국의 비단 차 소금 향신료 등을 교역했는데 몽고에서 사신단이 올때 말 교역이 이루어졌고 몽고에서는 이러한 말값을 시세보다 몇배 부풀려 장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중국정부는 내심 모르는척하고 걍 다 사주는 것이었조
영종13년 1448년 에센은 매년11월에 사신단을 보내는 관례대로 사신단을 보냅니다. 당초 명나라는 사신단이나 무역으로인한 손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사신수를 50명으로 정해놓고 있었는데 에센은 2500명(실제로를 1천명)의 사신을 보낸다고 통보해옵니다. 왕진은 이런 에센의 사신들에 대해 실제 숫자에 대해서만 예물을 내리고 말값도 1/5로 깎아버립니다. 에센은 이러한 명나라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에센은 명나라와 사돈을 맺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통역관인 마운 이라는 자가 에센의 뇌물이 탐이나서 자기 마음대로 명나라가 혼인동맹을 수락했다고 대답해버렸고 기뻐한 에센은 말1천필을 명나라에 혼수로 보냅니다.
명나라로서는 뭥미?...인 상황이었고 혼인을 수락한적이 없다고 알려왔고 에센은 자신이 명나라에 농락당했다고 판단해 매우 화를 내며 명나라 변방에 전면적인 도발을 가합니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변방의 대동 선부 태원 등 군사요충지에서 잇달아 패배하게 되고 참장(중대장급) 오호 서령후 송영 무진백 주연 등이 전사하고 양화에서는 감군태감 곽경의 작전미숙으로 대패를 하게됩니다.
감군태감은 환관을 보내 일선의 군대를 감시하기위한 목적이었는데...문제는 감시를 해야하는 환관이 군사작전에 감놔라 배놔롸하는일이 잦았습니다.결정적인 문제는 감군태감은 무려 3품관이었기 때문에...최고 군사력관인 제독이나 경략 정도가 아니면 감군태감의 명령을 거부할수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군사지식이 전혀없는 감군태감이 작전에 영향을 미치다보니 패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훗날 원숭환이 죽은것도 감군태감이 청나라의 간계에 속아서 그리되거고 자금성이 함락된것도 감군태감이 성문을 열어버렸기 때문...)
뭐 아무튼 이렇게 변방에서 연패를 하자 조정은 사태를 실감했고 대책마련에 고심하는데...뜬금없이 왕진은 영종황제가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병부상서(국방장관)광야와 병부시랑(국방차관)우겸은 안된다며 친정을 반대하였지만 사흘만에 50만 대군이 출전하게 됩니다.이 50망을 사흘만에 모았으니 준비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고 병사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지만 왕진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왕진은 영락제때 대군이 출병하자 몽고족은 알아서 도망가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큰 공을 세우게 될것이라며 망상에 빠져있었습니다.양화전투에서 에센에게 참패한 같은 환관인 곽경마저도 에센의 전력이 만만치않다며 철군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왕진은 듣지 않습니다.
부대가 대동에 이르자 병부상서 광야는"이곳부터는 작전구역이니 폐하께서는 뒤에 계시고 장수들을 앞에우라"고 주장하지만 왕진은 듣지않습니다.선두부대가 몇갈래 출전하여 모두 전멸하고 곽경이 아직 우리군은 준비가 모자르다고 끈질기게 설득하자 그제서야 왕진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 후퇴하기로 마음먹는데..
본래 자형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면 문제없는 루트였으나 왕진은 울주라는 곳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왕진의 고향이 울주였고 황제를 자기내 고향에 모시고가 고향사람들에게 과시하고싶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행군하다보니 왕진은 생각해보니 군대가 지나가면 자기내 고향의 농지가 훼손되게 되므로 안되겠다 생각하고 길을 변경하여 선부로 또 우회합니다.
이렇게 계속 우회하자 병사들을 더욱 피로해졌는데 이때 광야가"정예군으로 호위병을 만들어 황제를 호위해 즉각 거용관으로 직행하게해야합니다"라고 말하자 왕진은 "썩은 선비가 무슨 병법을 안다고 그런말을 하는거요!" 라며 광야를 무시했고 그러자 광야는"나는 사직과 백성을 위해서 말한건데 어찌 당신을 두려워 하겠소!!"라고 맞서자 왕진은 광야를 태양빛 아래에서 종일 꿇어앉히게 합니다.
에센은 첩보망을 통해 명나라군대의 이동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의 후속부대에 공격을 개시합니다.이 싸움에서 공순후 오극충과 도독(연대장급)오극근, 성국공 주용, 영순백 설수 그리고 4만의 명나라 군대가 전멸당합니다.후속부대가 궤멸된 명군은 토목보 라는곳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10km 떨어진곳에 회래성이 있어 광야는 당장 이곳으로 가서 군사를 재정비해야한다 주장했지만 왕진은 아직 부대가 다 당도하지않았으므로 기다려야 한다 우깁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느데 토목보의 성에는 물이 한방울도 나지않았고 명나라 지휘관들도 이를 알고있었지만 왕진이 고집을 부립니다.물이 안나는곳에 50만 군대를 몰아넣었으니 이것은 멸망을 부채질하는 꼴이었고다음날 에센의 군대는 토목보 성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고 물이없는 명나라 군대의 사기는 바닥을 칩니다.4만의 에센의 기병은 이미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명나라 군대를 잡아먹었고 명나라 군대는 대참패를 하게됩니다.
수십만의 전사자를 낳았고 병부상서 광야. 영국공 장보. 장군 조정, 왕좌 등은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고 왕진은 이 상황에 분개한 한 장교에게 철퇴로 맞아죽습니다.영종는 이를 어찌할지 모르고 풀밭에 앉아 훌쩍이고 있다가 포로로 잡히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북경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황태후의 명에 따라 영종의 이복동생인 성왕 주기옥이 재위를 이어받아 경태제로 즉위합니다.신하들은 정벌의 책임소재를가려야 한다며 아우성쳤고 경태제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다 마지못해 마순이라는 환관에게 조사를 명합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마순도 왕진과 한패다!!!" 라며 달려와 마순을 난도질해 죽입니다. 경태제는 벌벌떨며 두려워했는데 그때 병부시랑 우겸이 나섭니다."폐하 마순은 죽어마땅합니다 백관들의 이같은 행동은 우국충정에서 나오는 일이니 알아주셔야 합니다"
우겸의 수완으로 인해 상황은 어느정도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왕진의 일종은모두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재산도 모두 몰수됩니다.왕진은 재산으로 은괴가 든 창고만 60개에 옥반지 1백개 산호수 20그루 등 전례에 없는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있었다고 합니다.(아전 중국 최고의 부자라던 석숭도 산호수 7그루밖에 없었음)물론 훗날의 화신에 비하면 발톱의 떼같은 수준이지만 ㅋㅋ..
아무튼 황제를 사로잡은 에센은 이를 미끼로 명나라와 협상하려했지만 이미 명나라에서는 새로운 황제가 들어서버렸으므로 협상에서의 우위를 점하기가 힘들어 졌습니다.그리하여 북경으로 쳐들어와 공격을 하게되는데...이러자 북경의 대신들은 모두 두려워했고 가족들을 미리 다 피신시킨 서정이라는 대신이
"제가 점을 쳐보니 이상한 징조가 보이고 있으니 북경을 버리고 남경으로 천도하는것이 좋을 듯 하오"라고 주장하자 대신들은 침통해하고 통곡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때 우겸이
"천도를 주장하는 자는 나오시오 내가 머리를 깨버리겠소 북경은 천하의 근본인데 이 근본을 지키지 못하면 천하는 반드시 어지러워 질것이오 남똑으로 도망쳤던 송나라를 되풀이 해서야 되겠소이까?"
우겸이 이렇게 주장하자 대신들도 정신을 차렸고 북경성을 사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집니다.그리하여 우겸을 병부상서로 삼아 결사항전의 태세를 가추게 되느데 당시 북경에는 10여만 군대가있었지만 정작 무기를 갖춘 병사는 1만도 채 안되는 상황이었는데 우겸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자며 장병들을 독려하여 사기가 충천한 상황이었습니다.
에센은 북경을 공격했고 우겸은 성문중 하나인 덕승문에 복병을 배치하여 에센을 크게 무찌릅니다 이 싸움에서 에센의 동생인 소로와 재상 마오나하이가 전사하였고 1만명의 전사자를 낳습니다.게다가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첫 싸움에서 대패한 에센은 퇴각할 결심을 하고 명나라에 교섭을 제의합니다.
에센이 전쟁을 선언한건 무역문제가 컸고 전쟁으로 무역이 중단되자 당장 에센 입장에서도 여러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는데 영종을 잡고있어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 영종을 돌려주겠다고 제의하게 되지요..
경태제 입장에서는 몹시 곤란한 제의였는데...이유는 치욕의 역사 1편에서의 남송 고종황제와 같은 이유였습니다.영종황제가 돌아오면 그런 나는?...영종을 어케 대우해야하지?라는 어려움이었는데...같은 이유로 남송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의 귀환을 한사코 거부하였지만 이번 경우에는...명나라 대신들이 이 사태는 부득이 했던것이니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경태제를 설득합니다.
그리하여 1451년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에센은 주기진을 명나라에 돌려보냅니다.이에 앞서 예부시랑(외교.교육부 차관)이실이 주기진을 접견했는데 그때 주기진은
"나는 평민으로 사는데 만족하겠노라ㅠㅠ"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실이"어찌하여 왕진같은 자를 중용하셨습니까?라고 하니 주기진은.."왕진이 살아있을때는 아무도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다들 나를 탓하는 구먼?" 이란 말을 합니다.주기진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볼 수 있는 대목이조..
어찌되었건 주기진은 돌아왔고 상황으로 봉해져 우울한 생활을 하게됩니다.경태제는 주기진을 연금했고 혹시모를 반란을 경계했습니다.주기진이 돌아오자 경태제는 주기진의 아들인 주견심을 태자로 삼았는데..생각해보니 경태제는 자신의 아들로 뒤를 잇고 싶다라는 생각을했고..태자를 패위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태자로 세웁니다.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경태제8년 경태제가 병석에 눕게됩니다.황제는 병이깊고 태자는 없다....뭔가 심상치않은 상황속에서 장군인 서유정과 환관인 조길상은 음모를 꾸며 주기진을 찾아가 쿠테타를 제의합니다.그리고 가문의 사병과 머슴들을 모아 쿠테타를 성사시킵니다.그리고 다음날 출근하는 조정 대신들에게"경태제가 중병이라 짐이 다시 재위하니 경들은 맡은바 직분에 충실하라"라는 명을 내립니다.
상황이 이상했지만 권력의 추가 기운것으로 판단한 조정대신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는데 이 쿠테타를"탈문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즉위한 주기진은 천순 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이것이 바로 주기진이 정통과 천순 두개의 연호를 가지기된 원인이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고 이내 사망하고 맙니다.쿠테타를 일으켰으니 정통성을 세워야 하고..당연히 그 재물이 필요했던 주기진과 서유정 일파는 우겸과 대학사 왕문 등 대신 수십명을 양양(삼국지의 그 양양)에 있던 친왕 주후경을 옹립하려했다는 죄를 씌워 체포합니다.
하지만 그 친왕을 부르려 했다는 징표였던 금패가 태후의 궁중에서 발견되어 이것이 명백한 누명임에 밝혀졌고 이미 민족의 영웅이엇던 우겸의 무죄를 호소하는 시위와 상소문이 빗발치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겸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서유정은 주기진에게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한 일은 더욱 명분을 잃게 되고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주기진에게 우겸을 죽이라고 주장했고...삼법사(대법원+헌법재판소)는 우겸에게 역도의 의도를 품었다 라는 해괴한 죄명으로 증거도 증언도 없었던 우겸과 왕문에게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왕문은 하소연을 해보려 했지만 우겸은"이것은 법률문제도 아니고 법률문제도 아닐세 그러니 더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네"라고 탄식하며 죽음을 맡습니다.
우겸이 처형된 날 북경성은 암흑에 휩싸여 비바람이 몰아쳤다고 하며 우겸의 가택을 수색해보니 재물은 없고 서책들만 나왔다고 합니다.우겸이 죽은 후 변방은 다시 소란해졌고 주기진은 그제서야 우겸을 죽인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잘봤음 참고로 본문에도 나오지만 경태제가 쟁선계 10권즈음에 잠깐 언급되는 성왕부의 성왕ㅋㅋ
ㅇㅇ 글치 우겸이랑 하도지가 기를 쓰고 지키려는 이유가 있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