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전개되어야 뭘 패러디하든가 말든가 할텐데.. 노잼주의




 인중용왕은 물론이고 산중용왕의 표정마저 모두 변했다. 특히 산중용왕은 무척이나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라도 강호제일 암봉의 입에서 솜씨를 보자는 말을 듣게 되면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산중용왕 사여명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당각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평상시에 자신들을 만날 때와는 달리 오늘따라 당각은 허리에 암기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다행히 인중용왕은 누구보다 두뇌가 영민하고 냉정한 인물이었기에 즉시 당각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천살령주께서는 그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은 모양이구려?"


 "그렇다네."


 인중용왕은 여유를 되찾았는지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웃음이었다.


 "이틀 후에 있을 비무에 대한 대비 때문이라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사여명도 겨우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당각이 자신과 싸우기 위해 부른 게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살짝 당각에게 윙크하였다.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소문이 자자한 천수나타의 솜씨를 직접 보게 되는 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지 뭡니까?"


 당각은 담담하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자네가 보고 싶다면 기꺼이 보여줄 의향이 있네."


 "그런 두근거림은 이틀 후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산중용왕에게 도움을 부탁해야겠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여명은 갑자기 활기찬 표정으로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령주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네가 종남파의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네."


 사여명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천하의 구석구석에 종남의 흔적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다 배신했지만."


 당각은 손으로 후원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 나무 등걸을 향해 뭉게뭉게 검법을 사용해 줬으면 좋겠군."


 "뭉게뭉게? 유운검법 말입니까?"


 "검법의 이름은 모르겠군. 진산월이 사용하는 검법을 말하는 것이네.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난다 하더군. 종남 제일의 기재로 이름 높았던 자네라면 필시 익힌 바 있겠지?"


 "유운검법은 종남오선 중의 정립병의 독문무공으로서..."


 "자네가 종남꽃뱀 조심향의 진전을 이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네. 정립병은 조심향에게 뼛골까지 빨린 위인이야. 유운검법의 진수는 물론 파훼식까지 연마하고 있을터."


 당각의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사여명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심향에게서 전래한 심법의 부작용이 드러나기 전에 사여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입니까?"


 사여명이 슬쩍 검을 휘두르자 희뿌연 검기가 일어나 구름처럼 허공을 휘저었다. 그것은 어느새 당각이 가리킨 나무를 휘감아 베어넘겼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기가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본 사람이 없었다.


 당각은 진지한 얼굴로 나무를 가로지르는 상흔을 바라보고 있더니 사여명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방금 몇 성의 공력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사여명은 살짝 미소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밝히지 않겠지만 천살령주께서 궁금해하신다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육성을 썼습니다. 유운검법의 18초 중에 유운검봉을 사용했지요."


 당각은 미소지었다.


 "어려운 질문에 답해줘서 고맙군."


 무공의 시범을 보여달라는 것도 모자라 그 무공에 몇 성의 공력을 사용했는지까지 알려달라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무례하고 위험한 부탁이 될 수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당각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산월에게 유명을 달리한 자 몇이던가? 다 이긴 줄 알고 방심하다가 썰린 고수들과 늙으막에 허세부리다가 황천길에 오른 자들이 몇이던가. 당각은 진산월을 허투로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사여명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알려주었기에 당각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네."


 "말씀하십시오."


 당각은 사여명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운검법... 자네가 전력을 다한 솜씨를 보고 싶네."


 사여명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저 나무에 말입니까?"


 당각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향해 펼쳐 보게."


 사여명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여명은 당각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진심임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천살령주께서는 저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아니네."


 "그게 아니라면...?"


 "한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기 때문이네."


 "제 검법이 령주께 통할지 안 통할지 몸으로 직접 확인해보시겠다는 겁니까?"


 당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닥치고 시키면 좀 해라, 존만한 새끼야."


 이어 그는 가볍게 신형을 움직여 사여명으로부터 삼 장 떨어진 공간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다음 양손을 늘어뜨린 채로 담담한 음성을 발했다.


 "이왕이면 아까와 같은 초식을 써줬으면 하네. 유운검봉이었던가?"


 당각이 자신의 의사를 무시한 채 욕설까지 입에 담자 사여명의 뺨에 붉은 빛이 일렁거렸다. 사실 그는 잘못된 심공을 익히는 바람에 남성임에도 꽃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보다 강한 남자를 만나면 유혹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미 당각에게도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각의 다소 무리한 부탁에 그가 선뜻 응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지금 당각의 요구는 강압적이고 모욕적인 것이다. 하여 사여명의 심장은 더욱 두근거리고 달뜬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인중용왕 또한 당각의 그런 모습에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구나. 자고로 선빵필승이라 했거늘 멀리서 암기로 슉! 죽여버리면 될 것을 어째서 종남의 검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사여명은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이윽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저는 전력을 다하겠으니 령주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말이 많다."


 당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여명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팔을 타고 손으로, 손을 지나 검으로 옮겨가더니 곧 검봉에서 구름과 같은 검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한 줄기 빛이 구름을 꿰뚫었다.


 땅!


 동시에 터져나오는 날카로운 음향 하나!


 인중용왕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 꺾였는지 사여명의 검은 두동강이 나 있었다. 당각의 암기가 부러뜨린 것이다.


 사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차례 검광이 번뜩이더니 그의 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소리없이 검을 뽑고 납검하는 경지는 아무나 할 수 있어서 이미 당각도 소리없이 암기를 던졌고 진산월도 소리없이 발검 납검한다고 들었다. 이정도는 해야 칼밥을 먹는다고 할 수 있었다.


 당각은 미소지었다.


 "산중용왕의 도움 잊지 않겠네.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


 사여명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눈으로 당각을 바라보았다.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대체 무엇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까? 설마 검이나 암기의 소리를 듣겠다는 건 아니었겠지요? 개나소나 소리없이 암기를 던지고 검을 뽑는 강호에서 그따위 쓸데없는 실험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뭉게뭉게 구름을 일으킨다는 검법이 신기해서 구경 좀 하고 싶었네."


 사여명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 변화를 보셨습니까?"


 "그래."


 사여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당각을 쳐다보았다.


 "저의 유운검봉은 열두개의 봉우리를 만들어내는 희대의 절초인데... 예전 천하제일인 곽일산의 독문검법인데..."


 "처음 자네가 나무를 깎을 때 변화를 외웠네. 하지만 그따위 변화로 천하제일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 한 3년만 마음먹고 익히면 아무나 익힐 수 있겠더군. 그래서 나는 자네가 전력을 다한 상태에서 다른 변화가 일어날 지 궁금했다네."


 그제야 알겠다는 듯 사여명이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래서 두 번째는 몸으로 직접 확인하려 했던 거로군요."


 "접근을 허용하면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냥 멀리서 검을 부러뜨렸네. 깽값은 물겠네."


 인중용왕은 새삼스런 눈으로 사여명의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천수나타조차 접근을 두려워할 정도로 가공할 검법을 지닌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드랍고 고운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자신의 남자였다.


 그 눈길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사여명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당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령주께서 단순히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것 같지는 않군요."


 당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솔직히 나는 자네의 공격을 막아내기보다는 검봉의 숫자를 보는 것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당각의 음성은 차분했다.


 "그 초식 유운검봉이라 했던가? 나는 십육봉을 만들어내는 검을 본 적이 있네."


 그 말에 산중용왕은 물론이고 좀처럼 놀라는 법이 없는 인중용왕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사여명은 충격이 컸던지 표정이 굳어지고 입술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십...육봉을.... 십! 육봉!을 보았단 말입니까?"


 "그래."


 "그가 누구입니까?"


 "내일 모레 싸우기로 한 사람이네."


 사여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그로군요. 그럼 령주께서는 이미 그의 검법을 견식한 적이 있었군요."


 인중용왕이 그의 말에 놀라 황급히 되물었다.


 "그럼 정말로 뭉게뭉게 검법으로 십! 육봉! 을 만들 수 있단 말이야?"


 "방금 듣지 못했소? 그건 유운검법의 최고 경지인 유운검봉의 발전형입니다. 내가 듣기로는 유운십육봉을 완성했거나 완성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단지 세 명뿐이오."


 "그들이 누구야?"


 "첫째는 종남파의 5대 장문인 곽일산이오. 풍운무적검이라 불렸으며 무적의 초식 검정중원을 연구하다가 죽었다고 알려져 있소. 그리고 또 한사람은 정립병이오. 그건 사모님의 유진에 남겨져 있었소."


 두 절대고수의 이름을 듣자 인중용왕은 이내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지막 인물은 나도 알겠군. 신검무적 진산월이지?"


 "그렇소. 그동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진산월이라면 그 경지에 올라있을 수도 있을거라고 예상했었소. 그런데 령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는 이미 유운 십육봉을 이룬 것이 분명합니다."


 당각은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가 더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검중용왕을 죽인 초식의 이름이 밝혀졌네. 검정중원이라 하더군."


 사여명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여성적인 말투가 터져나왔다.


 "뭐라고요? 그건 불가능해요!"


 인중용왕이 황급히 그를 다독거렸다.


 "진정해. 령주께서 없는 말을 지어낼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에요."


 "뭐가?"


 사여명은 넋이라도 놓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검정중원은 단지 전설로만 전해지는 경지에요. 종남검을 익히는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도 이루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해서 그저 마음속의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경지란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생각해보세요. 진산월이 검정중원을 이루었다면 능히 중원을 평정할 수 있을 거에요. 소수마후에게 털리거나 천살령주에게 털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작가 공인 최강의 검초인데 어찌 꺾을 수 있겠어요? 야율척이고 모용단죽이고 그냥 쑤셔버리면 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천수나타의 남은 수명은 이틀입니다. 그는 뒈질거에요. 검중용왕처럼 스트립쇼를 하다가 온갖 수치를 당하고 비참하게 뒈져버릴거라구요!"


 그의 말을 듣자 인중용왕은 갑자기 소름이 쭈욱 끼쳐왔다.


 당각이 사여명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