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후
칠흑같은 어둠.
거친 숨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
또 그 꿈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길을 달리고 있다.
"개 같은 년!"
"망할 애새끼가!"
산적들이 쫓아오고 있다. 어머니와 나를 욕하며 쫓아오고 있다. 왜 한밤중에 산을 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지금쯤 아버지는 죽고 없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허억.. 허억..."
느리다.
이번에도 느려터졌다.
아홉살 꼬마의 몸으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오늘밤에도 나 때문에 어머니가 죽게 될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뭇가지와 거친 풀들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어댔지만 아무런 감각조차 느낄 수 없다. 그저 달리고 있다. 도망쳐야 한다.
산적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보였다 말았다 한다. 등 뒤까지 쫓아왔던 자들은 우리를 놓친 것인지 아니면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혹시 여기에 가만히 숨어있으면 그들은 우리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진우야."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신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을 다시 하실 것이다.
"여기에 숨어 있어라. 아뭇소리 하지 말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거부감도, 슬픔도 이미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달릴 수 없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하다.
어머니가 날 풀더미속으로 밀어넣는다. 거친 힘이었다. 난 나동그라졌다.
"아버지가 꼭 구하러 오실거다. 아버지는 강하시단다."
아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표사였다. 표국일로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평범한 표사였다. 그리고 우리를 쫓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산적일 뿐이다.
"아버지를 믿어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니라."
이제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버지는 지금쯤 죽었을거라구요! 더이상 말하지 마시고 같이 도망쳐야 해요!
하지만 내 몸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안돼. 어머니가 죽고 만다.
"날이 밝으면 아버지가 찾으러 오실 것이다."
어머니가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나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도, 어머니에게도 건네줄 아무런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산적들에게서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하셨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셨다.
날이 밝았고, 다시 날이 저물었고, 다시 날이 밝았을때,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
"하아."
또 우울한 꿈을 꿔버리고 말았다. 벌써 6년전의 일인데.
"이놈아, 아침부터 재수없게 웬 한숨이냐?"
또 아침부터 시비를 건다. 벌써 6년째의 일이다. 부는 바람이 조금은 싸늘한, 언제나처럼의 아침이었다.
"제가 한숨을 쉬건 말건 염노(廉老)가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있지. 아침에 네 한숨을 들은 날은 무조건 잃는단 말이다."
또 억지를 부린다. 염노는 나와 같은 장무관의 하인이었다. 환갑도 넘긴 나이에 나를 놀려먹는 재미로 연명하고 있는 땅딸막한 노인이었다.
내가 기억상실로 6년 전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매일같이 시비를 거는 것이다. 뭐, 내가 이름난 무가의 자손일지도 모른대나, 했을때에는 내심 혹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언제나 실없는 소리만 하구."
"어허, 실없다니?"
"그럼 실없는 걸 실없다 하지 뭐라 하나요?"
냉큼 쏘아주고는 도망쳐버렸다. 염노와 잡담하느라 낭비할 시간따위는 없었으니까. 아침에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장무관의 연무장을 청소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늦어졌다가는 경을 치게 될 것이라 자연 발걸음이 서둘기 시작했다.
"허잇! 허잇!"
"하아! 하아!"
연무장을 청소하기 무섭게 장무관의 제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줄을 맞추어 검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열세명의 장정들이 목검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땀을 흘리는 것이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이었고, 익숙한 동작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루한 반복 동작의 순서가 바뀌는 것은 대략 두 달에 한 번 정도였고, 지금 보고 있는 '일로육상(一路六像)'의 초식은 일주일 전부터 그들의 연습 과제였다.
한번의 찌르기로 여섯군데를 노린다는 뜻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 여섯군데나 찌를 수 있는 목검은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이나 반복했으면서 그들의 찌르기는 일로일상(一路一像), 기껏해야 일로이상(一路二像)에 그치고 있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을 생각도 않고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장사범은 날 쫓아내려 하지 않는다. 최근 1년동안 매일같이 있었던 일이다. 나도 장무관의 식구인데 공짜 구경정도는 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저들도 술을 마실 때면 내 노래를 공짜로 듣곤 하니까 말이다.
"이대춘! 검 끝이 둔하다!"
"네엡!"
고래고래 악을 지르면서 가르치는 장사범이나 그걸 생각없이 반복하고 있는 대춘이 형이나 솔직히 멋지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무림이라던가, 강호라던가 하는 걸 안다. 무림에 사는 사람들은 칼로 산도 자르고 불도 밝히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림이 어느 지방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가촌보다는 큰 도시일 것이다. 난 장사범이 산은 커녕 바위를 자를 수 있을거라고도 생각치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 매일 아침 연무장을 구경하는 것은 중요한 일과다. 이들을 동경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칼의 기초라도 배우고 싶었다. 칼은 강한 것이다. 강한 것은 좋은 것이니까.
그러나 오늘의 구경은 여기까지였다. 마음을 정한 난 구경을 그만두고 엉덩이를 툭툭 털어 숙사로 향했다.
이가촌에 사는 사람은 이백명 정도라고 했다. 허나 그 중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오십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난 기억이 있을때부터 장무관의 하인이었고, 관 밖을 나돌아다니는 일도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돌아다닐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무관은 이가촌에서 가장 큰 장원이었다. 그리고 장태식 관주는 이가촌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가장 강한 사람이 그 주인이고 가장 강한 단체가 바로 장무관이다. 공연히 촌마을을 나돌아다닐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장무관의 남자 하인이래봤자 나와 염노뿐인데 나돌아다닐 시간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관주는 왕년에 하남의 정주라는 곳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 표두였다고 했다. 불혹의 나이에 크게 성공해서 고향에 무관을 차렸다는 경우인데, 한때는 그의 모상검법(矛像劍法)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가끔 멀리 관주의 심부름을 나가는 염노에게서 세상의 물정을 이것저것 얻어들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난 그 모상검법이라는게 그리 별볼일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몇년동안 그렇게 검법을 훔쳐배우려 안달했던 것이 바보같아지는 기분이었다.
"염노, 이번의 외출은 사흘 후이지요?"
"엉? 그것은 왜 묻느냐?"
염노는 정리하던 장작을 들고 바보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표정을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하니 그런일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나도 데려가줘요."
"뭐?"
"염노도 이제 무덤에 들어갈 준비가 필요한 나이가 아닌가요? 그러니까 염노가 하는 일들도 이제부터 제가 하나씩 배워두어야지요."
본론을 단도직입적으로 찔러주었다. 염노의 후계자따위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명분은 확실하게 일러두어야 하는 것이다.
염노는 말문이 막힌 듯 더욱 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버릇없게 말한 것일까? "네놈의 변덕은 하늘과 땅이 안다 이놈아!" 라면
서 빈정거리지나 않을까? 하지만 이정도로 말해두지 않으면..
"관주님께 말씀드려보마."
"네?"
기뻤다. 하지만 이정도로 일이 쉽게 풀리면 괜히 불안하기도 하다.
관주가 현역 표두이던 시절에 만들어 놓았다는 인맥은 꽤나 방대했다. 하남성의 정주까지 걸어서 도착한 후에도 한동안은 쉴새가 없었다. 염노와 나는 관주가 몸담았던 등봉표국을 비롯해, 정주에 이름있는 무관 몇 군데와 정주에 사는 어떤 말단 관리의 저택, 그리고 몇개의 기루(妓樓)에 편지를 배달해야 했고 이가촌을 떠난 후의 한달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그동안 염노가 해준 이야기는 아주 많았다. 세상물정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여자 꼬시는 법, 항간에 이름높은 미녀들, 유명한 무림 고수이야기 등등, 그가 가진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주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죄다 허풍인지도.
그리고 '쉴 수 있을때 쉬어야한다'는 염노의 주장대로 정주에서 칠일정도 놀았다. 오늘은 다시 이가촌으로 향한지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아야 한다'는 염노의 지론대로 등봉표국의 표행에 빌붙어 가는 중이다. 새삼 염노의 수완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지금 가장 이름높은 사람들이라면 오검(五劍), 칠도(七刀), 칠수(七手)가 있겠지."
"그럼 그 사람들이 가장 강한 사람들인가요?"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최근 활발하게 실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호사가들이 멋대로 순위를 매긴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고수들의 실력을 재고자 덤비겠느냐. 그냥 알만한 사람이 '그럴거다~' 하면 '그렇구나~' 하는 것이지."
"그럼 그 사람들 외에도 대단한 사람은 많이 있겠네요?"
"그렇지. 넌 소림이니, 무당이니 하는 이름도 못 들어봤느냐? 지금 당장은 오검칠도칠수에 속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명문가의 인물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고수로 유명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 이름높은 소림사 방장만 하여도 강호에 당해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중들이 싸움을 배운다니 거짓말 같기도 하고."
"왜, 못 믿겠느냐?"
"그런건 미신 아닌가요? 공자왈 괴력난신을 멀리하라 하셨는데 이가촌의 전 촌장도, 이름이, 음, 어쨌든 무슨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집안을 말아먹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장태식 관주님이랑 사돈간인.. 이름이, 하여튼 그 사람이 새 촌장이 되었잖아요."
염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림은 믿으면서 구파일방은 못 믿는다니.. 그건 그렇고 네놈은 이름을 정말 못 외우는구나."
딱히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서 의미없이 고개를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가만히 표국의 수레가 덜컹덜컹하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노라니 또다른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검을 쓰는 사람만 다섯명인가요? 구색을 맞추려면 칠검칠도칠수라고 하는게 좋을텐데."
"원래는 칠검이었지."
"원래는?"
"그래, 한때는 네가 말한대로 칠검이라는 구별이 있었으나 그 중에 셋이 검을 놓고 하나가 새로 등장하니 오검이 된 것이다."
"으음...."
"검마(劍魔)라는 이름은 아느냐?"
"네. 무슨 마검을 익힌 사악한 사람이라고.."
바로 어제 염노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원래의 칠검 중에 섬서일검을 죽이고 철협을 폐인으로 만들고 군자검의 팔을 잘라버리고 새로이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 그 검마라는 사람이다."
"대단하네요..."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는데 즉시 염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두(魔頭) 중의 마두이기도 하지. 성정이 괴팍해 자신을 거스르는 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고도 한다."
"무림에는 그 놈의 마두가 많기도 하군요."
염노가 반쯤은 겁을 줄 의도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식인괴마(食人怪魔)라느니, 봉산음마(封山淫魔)라느니, 철혈권투살마(鐵血拳鬪殺魔)라느니 하는 자들이, 대충 염노가 즉석에서 만든 것 같은 이름들을 붙이고 대명천지를 활보한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비꼬는 목적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염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많지.. 많고말고..." 하며 숨겨둔 꿀단지 생각하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장무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번에 그와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청승맞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한동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괜히 똥개가 똥 쳐다보듯이 나를 훔쳐보곤 하겠지.
표행은 관도를 따라가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많은 길들 중에 가장 안전한 길이 바로 관도이기 때문이다. 오가는 사람도 가장 많고 가장 넓고 깨끗이 닦여진 길이 관도라고 한다. 바로 그 점을 도적이나 장사치들이 노리기도 한다지만 어쨌든 관도를 따라 걷는것이 불필요한 고생을 줄
이는 길이라고 들었다.
등봉표국의 표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특별한 상황이라는 말이 된다.
"형제들! 물 좀 나눠주시오."
라는 뻔뻔한 말과 함께 접근한 네명의 사내는 보잘것없는 표행원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표행원이라고 해봐야, 후줄근한 표사 셋에 쟁자수 하나, 노새가 끄는 작은 수레가 하나, 늙은이 하나, 15살의 미소년 하나.. 뿐이다. 대단한 표물도 아니었고 위험한 길도 아니라고 들었다. 내 판단으로도 이들이 노상강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노상강도에 매우 근접한 자들임은 확실했다. 생면부지의 흉악한 장정들이 형이니 아우니 불러대는 것도 기분나쁘지만 만난지 한 시진쯤 후에는 먹을걸 달라, 술은 없느냐, 아주 행패였다.
하지만 염노는 이들이 밝힌 '염포사걸(殮布四傑)'이라는 이름이 대단하기 때문에 화를 내선 안된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묻자 장태식 관주보다 강할거라고도 했다.
이들은 무림인일까? 노자라도 떨어져서 우리에게 빌붙으려는 것일까?
"하하! 우리는 무림의 허명은 믿지 않소! 그리고 우리의 허명도 과시할 생각이 없소!"
그렇다. 그들이 과시하고 있는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저 끔찍해보이는 백정칼과 방망이며 쇠사슬이며 하는 것들이었다. 염노는 그것들을 구구도(九鉤刀)니 낭아봉(狼牙棒)이니 설명해주었지만 굳이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저 쇳덩이들은 강해보이는게 아니라 단지 흉칙할 뿐이었다. 어째서 이런자들이 관도를 돌아다니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저런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다간 관병들에게 치도곤을 당하기 십상일텐데.
"하하 소형제, 너무 겁먹을 것 없네! 쇄혼도는 나의 수족과 같아서 형제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거라네!"
입냄새나게 웃으면서 아프게 내 등을 후려갈기는 자의 이름은 전모형이며, 염포사걸의 첫째라고 했다. 자기 칼에 쇄혼도라고 이름도 붙인 모양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가파른 고개를 만났다. 고갯길은 그리 잘 닦여있지 않았다. 수레가 돌을 밟을때마다 덜커덩 하고 비틀거리는게 저러다 뒤집어지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수레를 끌고 있는 노새의 표정도 매우 불쌍했다.
염포사걸이라는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 걸으며 그들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별로 없었다. 단지 염노는 그들이 염포사웅(熊 : 곰) 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표사들과 왁자하게 떠들며 앞장서고 있었다. 표행의 우두머리인 백 아저씨도, 당 아저씨도 두 아저씨도 모두 곤란한 안색으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곰들은 꽤나 신난 모양이었다. 나불나불 끝도없이 떠들었다.
다만 쟁자수와 늙은이와 꼬마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것은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은 편하게 노새의 곁에서 걸어갈 여유가 생겼다.
염노와 쟁자수 채 할아버지는 어느새 조금 친분이 깊어진 모양이어서, 나는 채 할아버지의 만두를 약간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염포사걸은 저래뵈도 협사들이다. 무명도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야. 표행 입장에서는 동행하는게 결코 손해는 아닐거다."
"얼마나 유명한데요?"
"많이 유명하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염포사걸의 목소리는 대단히 컸다. 그들이 껄껄 웃으며 떠들때면 관도가 다 쩌렁하니 울려댔고, 특히 첫째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덕택에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걸의 셋째가 곧 득남할 예정이고, 그 전에 협(俠)을 행하여 덕을 쌓겠다는 이야기였다. 곧 태어날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들은 운양산의 산적들을 토벌하러 간다고 했다. 그런데 노자계산을 잘못하여 곤란에 처했다고도 했다. 이는 내 짐작이 들어맞은 것이었다. 빌붙으면서 전혀 부끄럽지도 않은 기색이다. 득남을 앞둔 부모가 피를 보는것이 정말 길한 일인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기는 하다. 운양산이 여기 운양고개에서 수십리 더 떨어진 곳이고 우리 일정과도 수십리 떨어진 곳이긴 해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뜨거운 계절은 아니건만 해가 중천에 오르자 슬슬 더위가 올라왔다. 특히 노새가 대단히 지쳐보여, 채 할아버지가 조금 쉬어갈 것을 건의했다. 사실 나도 쉬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럼 저기 고갯마루에서 쉬도록 하십시다."
백 아저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와는 달리 고갯마루는 평평한 편이었다. 쉬어가라고 심어놓은 듯한 소나무도 굽어있었고, 그 그늘아래에는 널찌막한 바위가 있었다.
그러나 바위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걸터앉아 있었다. 왠지 좋은 자리를 부당하게 뺏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아니라 해도 염노나 채 할아버지가 앉게 되었을테지.
"아이고 죽겠다."
별로 피곤하지는 않은 표정으로 주저앉으며 염노가 중얼거렸다. 채 할아버지도 표사 아저씨들도 자리를 잡아 앉고 있었다. 염포사걸도 각자 앉아서 입을 다물었다. 간만에 조용한 시간이었다.
다만 사걸의 첫째, 전모형이란 사람은 선객(先客)이 차지한 바위그늘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수염이 꺼칠한 턱을 잡고 쓰다듬다가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선객에게 말을 걸었다.
"형제, 나도 이 바위를 같이 쓸 수 없겠소?"
정말 얼굴도 두꺼운 사람이다.
선객은 까만 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옷과 대비된 얼굴색은 무척이나 희어보였고, 눈은 고개 아래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 듯했다. 첫째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난 너의 형제가 아냐. 그리고 내게 말을 걸지 마라. 입냄새난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혹시 잘못들은게 아닌가 하는 멍한 기분이 되었다.
"어..."
그러나 변변한 대답도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첫째곰의 얼굴에서 곧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 청년은, 자기보다 십년은 연상인, 흉흉한 병기를 들고 있고, 덩치는 곰만하고, 명성은 쟁쟁한, 염포사걸중에서도, 첫째의 기분을 매우 나쁘게 만든 것이었다.
"으..."
난데없이 내가 다 식은땀이 흘렀다. 첫째는 가만히 서서 청년을 바라보다가 돌연 크게 웃어버렸다.
"으하하하! 이런, 내가 실례를 했소. 나는 전모형이란 사람이외다. 저들은 나의 형제들이고, 우린 염포사걸이라 불리고 있소이다. 괜찮다면 우리에게 소협의 소개를 해주지 않겠소?"
호탕하게 털어버린 것인지, 호탕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염포사걸의 다른 동생들의 기분이 상한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들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행원들도, 염노도, 나도 청년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염포사걸이나 표사들은 청년의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이것저것을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 청년도 허리에 무언가 무기를 차고 있었으니 무림인일것 같았다. 무림인들은 다들 사람 불편하게 하는 뭐가 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꽤나 썰렁해졌다.
그런데도 전혀 동요가 없는 걸 보면 저 청년 역시 어지간히 뻔뻔한 모양이다.
"독청."
청년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낮익은 이름에 기억을 더듬는가 보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독청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확실히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모두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니까. 나만 일어날 시기를 놓쳐서 뻘쭘하게 앉아있는 중이었다.
"검마 독청!"
이름은 모르겠지만 염포사걸중의 한명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이 휘익 그에게로 향했다. 청년은 싸늘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냉기가 한꺼풀 입혀진 듯 했다.
"그래, 내가 검마라 불리는 독청이다."
표사들이 멈칫멈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표물 수레를 호위하듯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의 표정은 귀신을 만난것처럼 창백했다. 염노가 내 옷깃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염포사걸이다."
방금까지 웃고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안색을 굳히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염포사걸은 딱딱한 얼굴로 검마의 정면에 나란히 섰다. 각기 병장기를 불끈 쥐고 나름의 자세를 잡고 있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얼어붙어갔다. 나도 일어나서 수레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리에 힘이 없는것이 느껴졌다.
"검마에게 염포사걸이 결투를 청한다."
첫째가 뚜벅뚜벅 씹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참 듣기 싫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그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아오르고 있었다. 그 울림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느껴져서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염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내 팔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아프게 힘이 들어갔다.
검마는 냉오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염포사걸과 검마 사이에는 알수없는 또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 듯, 내 머리를 흩날리는 바람마저 그들에게는 불어오지 않고 있었다.
"난 미숙해서 상대를 살리는 검을 쓰지는 못한다."
검마가 바위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에 아담한 검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먼저 덤비지 않는다면 나도 죽이지 않아. 그냥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한다."
"우리는 여기서 너의 검을 꺾고 강호의 정의를 세우고야 말겠다!"
소나무를 쩌렁 울리는 외침이었으나 검마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언어를 허공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죽고싶다면 어쩔 수 없지."
숨결을 붓 삼고 바람을 종이삼아 정성스럽게 써내려가는 듯한 검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내가 짓눌린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저 사람은 정말 우아하다.
그리고 강해보인다.
그래서 나는 또 우울해지고 말았다. 염포사걸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검마를 만났다해도 그냥 스쳐보냈을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네 명은 재앙덩어리였던게 분명했다.
내 마음이야 어쨌든 저들은 정말 싸우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검마는 묘한 비웃음을 지으며 염포사걸을 한명 한명 스쳐보았는데 그것이 내 눈에는 마치 "어느 놈부터 죽여버릴까" 감정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정말 길바닥에서 칼부림을 해도 괜찮은거에요? 염노가 말하기를 이런 결투는 날짜와 장소를 신중하게 잡고..."
백 아저씨에게 질문했으나, 백 아저씨는 나를 돌아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꾹 붙잡고 동상이 된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두 아저씨도 당 아저씨도 다를게 없는 모습이었고 채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합장하고 중얼중얼 무어라 외어대고 있었다.
떠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확실히 싸움구경을 하려면 집중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염포사걸이 이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둘째, 아니 넷째일지도 모를 사람이 방망이를 들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른 세명은 왜인지 뒤로 조금씩 물러나서 반원을 그리며 섰다.
"난 전모광이라 한다. 도전하겠다."
그러자 검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꺼번에 덤벼라. 오래 상대하고 싶지 않다."
염포사걸은 정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
내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화려하게 부서졌다.
금빛의 알을 깨고 영혼이 비상하는 것과도 같은 쾌감, 전율, 설레임.
나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무수한 감정의 조각들. 그것들이 폭발하고 흩어졌다가 바람에 휘날려버렸다.
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돌이켜보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나도 없이 금빛의 알이 깨어지는 모습만이 가득하다.
나는 그 빛을 보고, 다시 보고 또다시 보고 있었다.
가시달린 방망이가 검마의 얼굴을 수평으로 후려쳐갔다. 철뭉치가 달린 쇠사슬이 검마의 발치를 강하게 휘감아갔다. 첫째가 낮게 자세를 숙이고 튀어나가듯이 검마의 허리를 베었다. 그리고 창을 든 이는 그것을 꼬나쥔 채 검마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방망이가 얼굴에서 한자 정도 거리를 두었을 때, 사슬이 거의 발목을 부러뜨리기 직전이었을 때, 첫째의 칼이 허공에서 강하게 방향을 바꾸었을 때, 검마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광채를! 그 강렬함을! 영혼을 태우는 듯한 순백의 냉기를!
빛이 허공에 빠르고 유연한 궤적을 그렸다. 계란을 그리는 것 같은 부드러운 곡선의 끝에서, 방망이가 잘리고 사슬이 끊어지고 첫째의 목이 베어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곡선이었다. 검마는 그 곡선을 그리기 위해 검을 뽑지 않고 위협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춤과 같은 아름다운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염포사걸, 아니 삼걸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잠시 몸이 굳은 것 같았다.
검마는 그들을 오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검마의 눈높이가 그들보다 훨씬 낮은데도, 검마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마의 오른손에서는 작고 앙증맞은 그의 검이 이글이글 냉기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그 광채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저것이다. 저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검마는 그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흔들, 하더니 그는 순식간에 창을 든 사내 앞에 다가가 있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방망이를 든 사내의 목이 허공에 치솟는 것이 보였다. 피가 촤악 솟았으나 그 피는 감히 검마에게 범접하지 못했다.
모든 이물질은 검마를 피해가는 것이었다. 흙먼지조차 그의 광채를 더럽히지 못했다.
검마가 창을 든 사내의 목을 쳐날렸다. 과일을 따는 것처럼 수월하게 사람의 목이 잘려나갔다. 이번에도 그에게 피가 튀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백색의 광채는 면면히 잔상을 그리며 처음 그가 서있던 자리에서 지금 휘어올리고 있는 오른손에 이르도록 눈부신 곡선을 이루었다.
그리고 검마는 뒤로 퉁기듯이 이동해 등을 돌리지 않은 채 시야 밖에 있을 상대에게로 곡선을 유도했다. 하늘을 향해 휘감겨 올랐던 백색의 비단이 폭포처럼 떨어져내리며 쇠사슬 사내의 목을 향했다.
쇠사슬을 쓰는 이의 동작은 너무나도 느렸다. 느려터졌다.
이대로라면 그의 목 역시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검마의 검은 어김없이 그의 목을 절단하고 지나갔다. 그 후 그것은 허공에 한바퀴 원을 그렸다가 강하게 진동하며 피를 털어내고 순식간에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의 눈을 어지럽히던 광채도 어느새 씻은듯이 사라져 어느곳에서도 그 눈부신 강렬함을 찾을 수 없었다.
아쉬움을 느꼈다. 나는 그 빛을 좀 더 보고 싶었다. 그 백광을 나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검마는 자신의 몸을 두리번 스쳐보았다. 피라도 튀지 않았나 저어하는 기색이었다.
표사들은 정말로 창백하게 질려서 곧 죽을 사람들 같았다. 채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는가 실감을 못하는지 멍하니 허공을 보며 무언가 읊고 있다.
그리고 염노는 입을 지그시 악물고 내 옷깃을 붙들고 있었다. 옷이 찢어질 것만 같은 힘이었다.
시간이 다시 멈추고 염포사걸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검마가 다시 검을 뽑았다. 순백의 광채가 일어나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그 빛은....
"이놈아, 정신 차려라!"
염노가 따귀를 후려갈겼다. 고개가 왼쪽으로 휙 돌아가며 오른뺨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피내음이 났다.
"진우야! 이 놈 진우야!"
염노가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왼 뺨이 아픈 것을 보니 이쪽도 후려쳤군. 젠장, 쓸데없이 힘만 넘치는 늙은이같으니라구.
"아퍼요! 그만 좀 쳐요!"
멱살을 잡고 있는 염노를 밀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꿈을 꾼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 가운데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아..."
염포사걸은 수없이 바라본 모습 그대로 땅에 엎어져 있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뒹굴고 있었는데, 표사들이 그것을 수습하려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하지만 어느 머리가 어느 몸의 주인인지 헷갈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신이 드느냐?"
고개를 돌려 염노의 얼굴을 확인했다. 늙은이가 뜻밖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코 끝이 찡하다.
꿈이 아니었다.
채 할아버지는 놀라서 바둥거리는 노새를 진정시키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염노는 주저앉은 나를 꽈악 붙들고 있었다. 표사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시체를 만지고 있다. 그리고 검마는...
머리속에 백색의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검마! 검마는 어떻게 되었죠?"
"염포사걸을 도륙하고는 그대로 고개를 내려갔다. 이놈, 크게 액땜 한 셈 치거라."
눈앞에서 사람들이 떼로 죽었는데 액땜으로 생각하라니 염노도 참 어이없는 노인네다.
그 순간 머리속에서 백색의 섬광이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쪽으로 내려갔는데요!"
"저 쪽인데.. 왜그러느냐?"
염노가 가리킨 방향은 지금껏 우리가 지나온 길이었다. 검마의 행선은 우리와 반대였던 것이다.
"저는 검마를 따라가겠어요."
"...뭐야!"
잠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무말도 않던 염노가 별안간 호통을 쳤다. 표사들과 채 할아버지마저 돌아볼만큼 우렁찬 호통이었다. 소나무가 다시한번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검마를 따라갈거라구요!"
"이, 이놈이!"
염노가 또 내 따귀를 후려쳤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노기가 담긴 무시무시한 손이었다. 난 땅바닥에 패대기쳐져 벌레처럼 뒹굴어버렸다.
"네... 네놈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다시 한번 말해봐라 이놈!"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나도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입에서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검마를 따라갈 거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그가 멀어지기 전에! 지금 당장! 검마를 따라갈거라고 했어요!"
염노가 화를 내며 다시 따귀를 올려붙이려 했으나 나는 왼쪽 뒤로 한걸음, 허리를 비틀되 힘을 주지 말고, 허리를 비튼 것처럼 어깨의 방향은 염노에게로, 고개를 살짝 젖혀주며 그것을 피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염노가 틈틈이 가르쳐준 따귀를 맞지 않는 수법이었다.
"전 봤어요! 제가 지금껏 무얼 바라고 있었는가를 봤어요! 절 말리려고 하지 마세요! 전 장무관에 돌아가지 않겠어요!"
"누가 너를 장무관따위에 들인다더냐! 너는 이런곳에서 망가질 재목이 아니다... 내 너를 정말로 아끼는 때문에 너는!"
헛손질을 해서인지 염노도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안색이 크게 변한 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검마의 검술때문에 그러느냐? 부러울 것 없다. 저만한 나이에 저런 검공을 성취할 수 있을리 없다. 분명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것이다. 20년만 지나면 너는 훨씬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도 싫습니다. 저는 검마의 피냄새를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서 빛을 봤어요! 매일 밤 저를 부르는 것 같은 그 빛을 봤어요! 염노도 알고 있었잖아요!"
"이놈아. 그것이 아니다..."
"어쨌든 전 이제 제 갈길을 가겠어요!"
염노의 면전에 최대한 독하게 쏘아붙였다. 염노는 마치 혼이 나간것 같은 눈으로 무어라 말을 하였지만 이미 그런것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검마가 향했다는 내리막으로 힘껏 달려가기 시작했다.
염노는 나를 잡지 않았다.
*****
어쩌면 이 길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이 길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눈으로 본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이 외에 길이라고 할만한 게 어디 있다는거야?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까, 숲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그럴리 없어, 무엇때문에?
수많은 상념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달렸다 쉬었다를 번갈아하며 검마의 뒤를 쫓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뒤통수조차 찾지 못하고 있
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지치고 길도 찾기 어려워져서, 나를 감싸고 있던 광기가 점점 두려움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염노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검마를 이대로 찾지 못하는게 아닐까?
아니, 검마를 찾고나면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검마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걸까.
나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거지?
생각할수록 어렵고 암담한 길이었다. 으슬으슬 춥기까지했다. 해가 저물어가면서 기온이 떨어지는 때문만은 아닐것이었다.
내가 무슨 사냥개도 아니고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낼 재주가 있을 리 없었다. 검마가 그 고개에서 향했던 방향이 이쪽이라 해서 그 행선이 우리의 여정과 일치했으리란 이유도 없었다. 하다못해 방향도 맞고 행선도 일치하여 내가 정확하게 그를 향하고 있다 하여도 그에겐 무척이나 빨리 걷는 재주가 있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절망스러운 기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그와 마주칠 수 있게 된다 하여도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런데 나는 왜 그를 쫓고 있는걸까? 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해버린것일까!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각종 고민들을 일일이 상대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어둑한 숲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름모를 새가 울었다. 밤에 우는 새는 재수없다고 염노가 말했었는데. 길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숲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이제와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에 그냥 전진하기로 했다.
염노가 했던 말이 다 맞을지도 모른다. 염노는 나보다 경험도 많고 힘도 세고 아는 것도 많다. 내가 그보다 뛰어난 점이라면 오직 젊다는 것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 염노의 말처럼 젊음이란 그저 어리고 철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염노는 기꺼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어쩌면 장무관의 제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염노가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숲인지 산인지 오르막이 많이 나타났다. 길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사위는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이 불자 숲의 곳곳에서 후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왠지 불길해서 겁이 덜컥 났다.
숲의 길은 어디나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특히 밤의 숲은 길도 나무도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
꿈 속에서 보았던 그 때의 숲과도 같았다.
밤이고, 숲이고, 혼자다.
그것을 깨닫자 극심한 불안감이 덮쳐왔다. 나는 또 숲을 정처없이 헤매고 있다. 길도 모르고 날은 저물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내 발로 나의 꿈을 향해 걷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후회스럽다.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웠다. 앞길이 너무나도 막막해서 이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싶었다. 염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장무관으로 갔어야 했다. 염노는 나를 정말로 아껴줬었다.
길이 너무 험하다.
언뜻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였다 말았다 하는 그것을 발견한 순간 공포로 가득한 내 뇌리에 그 날의 추적자들이, 횃불이, 고함소리가 밀려들었다.
나는 혼자다.
비명을 억누르고 뒤돌아 달렸다. 나뭇가지에 세차게 부딪치고 나가떨어지고 꼴사납게 뒹굴거리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허겁지겁 나뒹굴고 나서야 지금 내가 이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리에 닿았던 풀바닥에 엎드려서 바보같이 땅을 바라보았다.
"후우... 후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지금 나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 검마를 찾아낼 가능성이 있을까?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대로 장무관으로 돌아갈까? 그럴 염치도 없다.
"후우..."
난 떠돌이가 되어버린 거다. 한 때의 우연스러운 감정에 욱 하고 달려나와 집도 염노도 팽개치고 떠돌이가 되어버린 거다.
"젠장."
눈물이 나려고 했다. 등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기로 했다. 별들이 우렁우렁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제도 별을 봤었다. 오늘의 별과 어제의 별은 같은 별이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더 나빠졌다.
"난 강해질거야."
하인 주제에 매일밤 중얼거리던 말. 덧없는 줄 알면서도 언제나 품어왔던 꿈.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한심했다. 별들이 입을 모아 질문했다.
덧없는 일인가? 덧없는 일인가?
"흐으..."
덧없는 일인가? 덧없는 일인가?
별들이 조잘댔다. 서로 묻고 서로 대답하였다.
덧없는 일인가? 아니야.
덧없는 일인가? 약하기 때문이 덧없는거야.
강해지면 돼.
강해지면 된다. 무엇이든 힘을 얻어서 떳떳해진 다음에 염노를 만나는거다. 부자가 되어서 염노를 총관으로 앉힐까? 조정 대신이 되어서 염노에게 한 자리라도 내려줄까?
잠깐 눈이 돌아갔던거다. 인정하자. 바보짓을 했다.
나는 잃었고 보이지 않고 꿈만 꾸고 있다.
돌아갈 염치가 없다.
이젠 나의 길을 가야 할 때다.
어떻게든 냉정을 찾고 일어서야 한다.
몸을 일으켰다. 옷은 풀즙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다행히 찢어진 곳은 없는 것 같았지만 거지꼴이 된 셈이다. 새삼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말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였다. 숲 속에서 흉한 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이없게 인생이 끝나게 된다. 우선 숲을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크게 다친곳도 하나 없잖아. 처음부터 대단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보잘것 없어서 잃은 것도 보잘것 없는 것들 뿐이다.
그래, 아무 문제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이 있다.
웃자. 이럴때일수록 당당하게 마음을 먹자.
"후우..."
홀로 밤길을 걷는 건 여전히 무섭다.
나는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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