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운(38)은 우리 장르문학계에서 가장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로 꼽힌다. ‘취업이 잘 된다고 해서’ 진학한 한양대 전자공학과 2학년 때인 1998년 인육요리를 소재로 한 무협소설 <양각양>으로 등단한 뒤 여러 장르를 두루 거치면서 독특한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았고,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를 아우르는 넓은 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좌백의 <대도오>를 읽고 무협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도 있고, 용대운의 <태극문> 때문에 무협을 쓰기 시작했다고도 하셨는데요.
-립 서비스죠. 원래 글 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무협지 읽다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문과나 문창과 갔으면 나름 귀염 받고 잘했을 것 같은데... 공대 간 게 논리적으로 도움이 된 거 같긴 해요. 도서출판 뫼의 책을 읽다가 거기 실린 작가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갔어요. 97년 봄이었습니다. 2학년이 될 무렵이었지요. 설봉 몽강호 석송 냉죽생 장상수 유사하 같은 작가들이 같은 사무실에 있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98년 5월에 입대하기까지 두 작품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뫼에서 작품을 내지는 않았잖아요?
-뫼의 작가사무실에 1년간 있으면서 첫 작품으로 <양각양>을 썼는데, 뫼의 야설록대표한테서 ‘책이 너무 잔인해서 낼 수 없다’는 메모지를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메모지’가 날아왔어요. 그래서 씨알에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두달후 <독비객>도 넘겼구요. <독비객>은 입대 전에 마무리하고 가려고 빨리 썼지요. 그렇게 해서 군대 가기 직전에 두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고월과의 공저로 되어 있는데요.
-그때 씨알에선 다 고월 공저로 나왔어요. 전 그냥 책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군에 있으면서 <무림맹 연쇄살인사건>(2001)을 써서 제대한 뒤 출간했는데, 스스로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은 정통 추리무협이다.”라고 해서 독자들이 속았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추리하는 대목이 하나도 없어서요. 그런데도 추리무협이 맞나요?
-탐정인 만화량이 용의자들을 몽땅 모아놓고 "네가 범인이다!" 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정통추리소설의 전형이잖아요.
-후속작인 <도살객잔>(전2권. 2001)은 연재 당시엔 ‘주홍글씨’라는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제가 하이텔 무림동에서는 구경만 하고 연재는 안 했었는데, 작가친목사이트 격인 ‘무적’에 연재를 하게 됐어요. 무료연재라 가볍게 셜록 홈스 같은 느낌으로 했다가(셜록 홈스의 <주홍색 연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다.) 책 낼 때 새 제목을 붙인 거죠.
원래 <무림맹 연쇄살인사건>과 <도살객잔>은 만화량 시리즈로 쓰려고 했던 건데요. 시간이 점점 앞으로 가는 이야기 5개를 하려고 했는데 앞의 것이 망하는 바람에 접었지요. 그때가 장편시대라 짧은 것을 시도해 봤는데 역시 안 되더군요.
-한상운님 작품중에서 야한 것으로 유명한 게 <신체강탈자>(전2권. 2001)잖아요. ‘신체강탈자’라면 저 유명한 SF <The Body Snatchers>가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런 야한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는지 신기합니다. 여주인공은 이효리를 모델로 한 거라 이름도 효리라고 하려다가 편집자 반대로 바꾸었다고도 하고...
-원래는 훨씬 야했는데, 편집자 요구로 거의 안 야한 걸로 순화된 거예요. 무협작가인 이재일이 편집자였거든요. 이름도 효린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십팔금>이라는 소설을 쓸 거라고 공언한 걸로 아는데요. <신체강탈자> 작가 서문에 “혹시 야한 무협을 찾는 분이었다면 시간을 낭비시킨 점 사죄드리고 차후에 발표할 본격 성인 무협 <십팔금(十八禁)>을 기대하시란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고...
-그 소리 꽤 하고 다녔지만, 그냥 농담이었습니다.
-<특공무림>(전8권. 2005)은 우리 장르소설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타임슬립이나 이계진입물, 무협과 판타지의 퓨전인 소위 ‘환협지’라는 것이 유행을 했는데, <특공무림>은 특이하게도 SF와 무협을 결합시킨 작품이었으니까요.(<특공무림>에서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현대군인들을 무림으로 파견한다.)
-타임슬립물이 유행할 땐데 막상 왜 그 세계로 갔는지가 설명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의도적인 이계진입을 시도해본 거죠.
-<특공무림>을 보면 <독비객>에 나오는 이름이나 사건들이 나오는데요. <특공무림>이 <독비객>의 프리퀄인가요?
-세계관을 맞추려는 생각은 없고, 가끔 그런 거 넣으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넣은 것뿐입니다.
-<무림사계>(전6권. 2008)에서는 작품세계가 큰 변화를 보입니다. 원래 한상운님 작품엔 나쁜 놈들만 가득했잖아요. 착한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악당만 등장시킨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이 작품에선 꼭 나쁘지만은 않은, 오히려 속은 착한 주인공이 나와요. 이게 단편으로 먼저 발표된 <그해 여름>을 개작해서 늘린 건데, 단편은 여전히 나쁜 놈들 천지인데 장편이 되면서 사람이 달라졌어요.
-시선의 차이가 생겼던 같아요. 객관적으로 보면 나쁜 놈인데... 도박으로 돈을 따서 사부에게 주려고 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변명일 뿐이죠. 행동만 놓고 보면 똑같은 놈이에요.
서른 살쯤 되니 이젠 돌이키기도 늦은 것 같고 해서 여러 감정이 참 복잡하던 타이밍이었거든요. 큰 잘못을 저지른 악당이었던 남자가 그 죄를 벗어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벗어던질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제를 명확히 가지고 쓴 건 이거밖에 없어요.
<무림사계> 이후 책들은 다 착한 책들입니다. 성장물이죠. 작용과 반작용으로 착한 책들을 썼던 듯합니다. 요새 다시 소설은 내 맘대로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맘대로 쓴다는 건...?
-어릴 땐 쓰고 싶은 대로 썼어요. 그런데 나이 먹으며 겁이 나게 되니까, 내가 맞나, 남도 그런가 생각하게 되더군요. 전에 무협 쓸 때엔 남 생각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드라마나 영화는 투입되는 돈의 양만큼 관련된 사람도 많고, 누구를 노린다는 타깃이 분명해야 성공하니까 내부적으로 다 타깃이 있지요. 플랫폼 따라 어떤 거 쓰느냐 계산할 필요가 있어요. 계산한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낫지 않나 싶어서요.
-<특공무림>에도 아도인이라는 인물이 나오고, 만화량의 부하중에도 아도인이 있잖아요. 아도인님은 무협계의 선배인데 그 이름을 차용한 이유는요? (아도인은 이재일의 <쟁선계>에도 네 명의 거지 ‘기아구제’중 하나로 등장한다. 후배들에게 사랑받는 이름인듯하다.)
-왕년의 무협작가중 아도인이라는 이름이 인상 깊었고, 나쁜 놈에 어울리는 거 같아서요.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도 없습니다.
-이름 얘기를 좀더 하자면, 배상훈이라는 이름이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걸로 나름 유명합니다.
-배상훈은 무협 전작품에 나옵니다.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인데 처음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등장인물 이름을 공들여 짓기보다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이름을 썼어요. 친구 이름도 여럿 썼는데 다른 이름은 한두 번 쓰다가 말았지만 배상훈이란 이름은 <무림사계>까지 계속 가져갔네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아마 배상훈 군이 무협 매니아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재치 있는 패러디를 삽입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작가로도 이름이 났는데요. 인기 광고의 장면을 패러디한다든가, <양각양>에 나오는 십객 이름을 야객, 도객, 화객 등등 야설록의 시리즈 제목에서 따온다든가...
-개인적으로 패러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전을 모르면 의미가 없잖아요. 아무도 못 알아봐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넣은 거예요. 몰라도 상관없고 아는 사람이 보면 재밌다는 정도로. 그런데 당시 패러디시대라 그런지 의외로 많이 알아보더라구요.
-<무림사계> 이후로는 무협소설을 쓰지 않고 있는데...
-<무림사계>는 본류로 돌아와서 무협 자체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때가 무협시장이 붕괴될 무렵이었지요. 나이도 30줄 넘어갔을 때고요. 서른 기념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대여점 수는 줄고 장편 무협 질은 떨어지고 상황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계약조건이 더 박하게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보장부수라는 것도 없어지고요. 그러다보니 중견작가들이 중국으로 가버리기도 하던 때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대여점용이 아닌, 서점용 소설을 써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무협만 써서 다른 것을 써보고 싶기도 했구요. 제가 쓰는데 오래 걸리는 편이라 서점용 책 써봐야 돈이 안 되는데, 어차피 돈이 안 될 거면 무협 외부의 독자들도 만나보고 싶어서 다른 걸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무림을 떠나 딴데로 갔다가 한 2년 최악의 상태를 겪기도 했지요. 그래도 다른 분야의 소설부터 시나리오, 드라마까지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 드라마는 2010년에 시작해서, 올초엔 KBS에서 16부작 드라마 <스파이>를 했구요. 단편 <푸른 수염>은 <내 연애의 기억>(2014)으로 영화화되었고, <백야행>의 각색을 맡기도 했어요.
-기본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무협을 처음 본 것은요?
-<영웅문> 1부인 <사조영웅전>이었습니다. 김용의 작품들을 보고 <태극문>(용대운)으로 뛰었어요. 그 사이가 없었지요. 그 후에 옛날 것을 찾아서 봤습니다.
-왜 소설을 쓰시는지요?
-뭔가 결핍이 있어서 아닐까요? 인생이 만족스러우면 쓸 리가 없지요.
-소설중에서도 왜 무협이었나요?
-장르소설을 열심히 읽을 때였는데, 그땐 책 내기도 쉽지 않고 그나마 무협이 할 만하다고 생각됐어요. 장르계에서 제일 잘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무협엔 어떤 걸 넣어도 다 돼요. 포용성이 강해서 딴 장르를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거든요. 장르라기보단 무림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에 가까운 거 같아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선 서부랑 비슷하기도 하고.
-한상운님이 생각하시는 무협이란 어떤 것인지요.
-무술/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누군가는 무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누군가는 무로 옳은 일을 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무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하고 누군가는 복수를 하려고 하고.... 뭐 그런 인간군상의 이야기요.
-게임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무협, 좀비물, 추리소설, 연애소설 등등 여러 장르를 해보셨는데...
-사실 다양한 장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작품들이 명확하게 무슨 장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장르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타이밍을 배신했던 건데, 사실 그것도 한번 돌려서 쓴다는 법칙을 따르는 것이거든요. 진짜 잘 쓰려면 장르의 법칙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데...
-집필 스타일은 어떤가요?
-초창기 같은 경우는 한 줄 콘셉트였어요. 써보고 싶은 글을 한 줄로 써놓는... 한 부분이 명확해지면 거기 맞춰 구조를 짜는 거죠. 전부 다 계획하고 씁니다. 그 계획이 남들의 것과 다를 순 있지만요.
-앞으로 무협을 다시 쓰실 건가요?
-네. 한권 반쯤 써놓은 것도 있고, 새로 쓸 거 생각해 놓은 것도 있는데 법정드라마를 쓰기로 한 계약이 있어서 상황이 좀 그러네요. 다음 무협은 길어봐야 5권정도 될 거 같습니다.
성의가 없어보이냐 ㅋㅋ
근데 드라마쪽에서 돈은 벌고 있는건가?
한상운 작가님 돌아오시기만 하신다면 내시는 책이란 책은 다 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