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십년 가깝게 책방에 들락거리며 수백 쏟아붓긴 했어도 판타지 위주로만 읽던 놈이라(그나마도 요즘 것은 재미가 없어 예전부터 읽던 것 중 완결 안난 것이나 가끔 찾아보는 수준) 무협은 많이 읽었어도 남에게 재밌다고 추천해줄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영웅문 3부작과 군림천하 외에는 읽어본 게 없는데, 군대에서 1권이 빠진 무협지 세트를 읽었던 것은 기억하고 그게 좌백의 책이라는 것 또한 기억한다


당시에는 진중문고를 다 읽고도 읽을 책이 없어서 판무 소설을 뒤적거렸기 때문에 책방 주인장의 조언을 통해 정공서만 읽어왔던 예전과는 달리 분별없이 온갖 마공서를 접하게 됐었는데, 마공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의를 상하게 하고 그 벌어진 틈을 공략해 결국에는 사람을 홀리는 데에 요를 두는 것인지라 한동안은 갈일없던 의무대를 괜히 왔다갔다거리며 의무병 아저씨들이 사온 마공서들을 닥치는대로 읽어댔었다. 


병장이 되고서 석 달 가까이를 시간만 나면 마공서를 읽었다. 똥을 쌀 때도, 당직병이 되어 밤을 새게 될 때에도, 연등 시간에도, 심지어는 그 좋아하던 농구를 하던 시간에도 나는 공을 버리고 마공서를 탐독했다


그렇게 온갖 마공서를 읽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1권을 읽고나면 그 다음의 전개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지도 대강 감이 왔다. 

내가 읽어온 바에 의하면, 마공서를 써내려가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간이 영웅문 같은 중국정통무협에 있다기보다는 그 전에 인기있었던 한국 현지화 된 무협, 그중에서도 쉬이 읽어내릴 수 있게 가벼운 내용만을 담은 라이트 노벨 비스무리한 마공서에 있기 때문에 대체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비슷하고 사람 간의 싸움에 우열을 가리는 방법을 그들에게 각자 등급을 매겨주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최대한 줄인다. 이고깽 판타지나 마공서나 흑도의 방식은 한결같다. 차원을 넘어와서 마나의 밀도가 다른 이유로 숨만 쉬어도 마나가 드래곤에 필적하게 되는 고딩이나 길 걸어가다 자빠졌는데 천하제일인이 안쓰럽다며 약도 먹이고 수련도 시켜주는 기연을 얻는 동네 코흘리개 꼬마나 자신이 왜 갑자기 강해진건지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공서를 쓰는 사람들은 정통 판타지 혹은 무협을 쓰기 위해 필요한 사전조사를 하고, 글 쓰는 연습을 하는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급무사 이야기를 쓰기 전에 잡설이 길었던 이유는, 정통무협과 마공서는 성장형 소설의 면모를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갈린다는 것이 내 의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무협지는 무와 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야기까지 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마친다.


제대 이후 판무 소설을 읽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더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작가로 치면 김훈이나 천운영같은 무겁고 투박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작품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신간이랍시고 나오는 책들은 너무 가볍고 얕아 기껏해야 고등학생이 닥치는대로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고전문학으로 돌아갔었다. 근 삼 년 정도는 아예 판무를 잊고 살았다. 그게 더 재미있었으니까. 물론 집 앞 책방이 제대하고 나니 망해 없어져있었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 우리 동네 최후의 책방이었으니까.


하급무사를 읽게 된 것은 얼마 전 버스를 탔다가 깜빡 잠이 들어 두어 정거장 쯤 더 가서 내리게 된 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새로 오픈한 책방을 발견하게 되어서였다.


책방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라 많이 반가웠었나 보다. 나는 찐따답지 않게 나와 동류로 보이는 책방 알바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하급무사 있느냐고 물었고, 공교롭게도 알바생이 하급무사 2권을 읽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의 겸연쩍은 웃음과 알바생의 떨리는 눈동자가 서로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채게 했고, 나는 그냥 여기서 1권부터 읽고 가겠다고 말했다. 알바생은 처음의 퉁명스러움을 버리고 친히 그 육중한 몸까지 일으켜가며 내게 자리를 안내했다. 덕후들끼리의 만남 치고는 좋은 시작이었다. 대개 덕후에게는 동족 혐오가 있어 서로 내가 저 놈보단 낫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멸하게 마련이니까.


처음 읽기 시작해서 장천의 이야기가 나올 때 까지는 그냥 마두 중에서도 잘나가는 마두들, 마공서임에도 마기를 갈무리할 수 있는 그런 마두들이 힘 좀 써서 집필한 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기대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정도면 내가 예전에 읽었던 이름 모를 좌백의 그 작품보다는 확실히 못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 한 까치를 태웠다. 그래도 읽기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어 재밌네? 라는 생각을 하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하급무사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있었다. 


책장을 덮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그동안 읽었던 마공서는 이런 작품을 쓰고 싶었던 마두들의 눈물이었구나. 하는 생각.


확실히 하급무사는 김용의 작품처럼 중국 역사와 맞물리고, 주인공들의 기구한 운명이 얽히며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그 와중에서도 무를 단련하고 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식의 중국식 정통무협과는 거리가 있다. 하급무사는 조금 더 추리물에 가까운 성향을 띄고 있는 성장형 무협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장천이 무를 숭상하고 자신만의 협을 지켜나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통무협이라고 할 만 하다.


하급무사가 정통무협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첫째로 앞서 말했듯 장천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너무 느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아 여실히 느낄 수 있다는 점. 둘째로 협=정의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마두들과는 달리 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한 작가의 철학이 엿보이는 점. 마지막으로 탄탄한 배경 설정 때문이었다.


마지막 이유를 가장 짧게 썼지만, 가장 마음에 든 이유이다. 기실 장르 문학이라는 것은 그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씀으로써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잡혀가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인물들이 나와야만 독자들이 제대로 몰입하고 즐거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점에서 좌백은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해 굉장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기존의 마공서들을 읽던 독자들도 거부감 없이 사자성어나 기타 한자어들을 읽고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씀으로써, 또한 무협이랍시고 말투가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여져 독자들이 장천의 옆에 함께 서있고 살아 숨쉬는 인물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 그 첫째 이유고, 클리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클리셰가 나오게 되는 경우에는 그 클리셰가 어떤 이유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알게 해 그것이 클리셰라고 의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게 편히 적어내린 것이 그 두번째 이유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무협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도 무협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을때 부담없이 추천해줄 수 있는 책에 하급무사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재밌게 하급무사를 읽고서 중급무사를 검색해 연재중임을 확인했는데, 7월에 쓴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재 중지 중인 것이 안타깝다. 베르세르크나 헌터헌터 같은 만화를 읽는 독자들이 가지는 염원이나, 하급무사를 읽고서 내가 가진 염원이나 딱히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작가분께서 쾌차하시어, 하루빨리 연재물을 재밌는 작품으로 끝날 수 있게 무사히 마무리 지어줬으면 하는 것. 그런 염원때문에 토가시 씨발럼 납치해서 가두고 그림만 그리게 하고 싶다 같은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좌백 작가님의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