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윽!"


님사일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다. 그의 안색은 유달리 창백했는데,왼쪽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뼈는 피했소. 다리를 자르지는 않아도 되겠으나 거동에는 불편함이 있을 것이오."


남사일에 앞에 선 사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더벅머리가 인상적인 청년은 아직 삼심대도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놀랍게도 화산파 장로 남사일을 패퇴시킨 것이었다. 승패가 결정나자 비무를 관전하던 관객들은 함성을 질렀다.


"와아! 대해검! 대해검!"


"역시 이번에도 종남파의 낙승이겠구나."


"이런 젠장! 역시 대해검에게 돈을 걸 걸 그랬지.."


더벅머리 청년은 근래 혜성처럼 떠오르는 종남파의 인물 대해검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은 종남삼검(終南三劍)의 일인으로,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과 냉정함으로 높게 평가받는 고수였다. 하지만 남사일은 소지산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수십 년간 검과 벗해온 그였다. 비록 대해검의 명성이 대단하다 하나 남사일은 자신을 믿었고, 화산파의 모두도 남사일이 승리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단 9초만에 남사일은 패배한 것이다. 



털썩..


남사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소지산의 검기(劍氣)가 남사일의 왼쪽 허벅지 근맥을 끊어버린 까닭이었다. 평생 한겨울 매화처럼 고고하던 검군(劍君) 남사일이 군중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것이다.


"어이구?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해검의 기세에 눌려 주저앉았군. 하하. 이젠 화산파도 끝물이란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조롱의 외침이 쏟아졌다. 불과 오 년 전만 해도 화산파의 본산에서 이렇게 무례한 언동을 행할 배짱을 지닌 이는 없었다. 하지만 종남파가 화산파의 세력을 누르고 섬서제일문파로 등극한 당금의 상황에서, 화산파는 비참할 정도로 쭈그러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화산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이는 남사일이었다.  


".......하시오."


그의 앞에서 소지산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남사일은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망연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영혼이 육신을 떠나버린 것처럼.


'지고 말았다...'


이번 비무는 화산파의 구파 퇴출을 건 것이었다. 5판 3선승제의 비무에서 화산파는 이미 1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남사일 자신의 패배로 이제는 단 한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무의식 와중에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몸담아온 문파의 몰락을 막지 못한 장로의 눈물이었다. 


비무를 관전하던 용진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사일마저 패배한 것이다. 저번 비무에서는 옥면신권 낙일방의 일권에 화산파 수석장로 선우정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제 이전에서 남사일마저 패퇴해 버렸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종남파의 최강전력인 신검무적은 아직 출전하지 않았고, 화산파의 제일고수인 자신도 신검무적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종남파는 과거의 원한을 풀기 위해 최대한 잔인하게 비무를 끝맺을 것이다. 평소 씀씀이가 인자하기로 유명한 대해검도 남사일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아마 세 번째 비무 주자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설 수밖에는 없겠군."


평소 용렬하고 감성적인 처사로 알음알음 비판당하던 그였다. 하지만 용진산은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화산파 제일 검객으로서 문파와 운명을 함께할 책임감은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용진산에게 각인된 화산의 고절한 매화혼(梅花魂)이었다. 용진산은 소매 속 매화검령을 만지작거렸다. 수려하게 깎인 그 작은 목검은 수석 장로 선우정이 손수 깎은 것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검도 있었고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는 검밖에는 없었다. 용진산은 매화검령을 어루만지며 선우통을 그렸다. 그는 용진산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으며, 아무도 모르던 비밀의 정인(精人)이기도 했다. 용진산의 마음 속에 떠오른 선우정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세상의 그 누가 자신의 정인이 죽음의 길로 뛰어드는 것을 반기겠는가? 하지만 그 역시 화산파의 장로였다. 아마 그가 살아 있었어도 용진산의 선택을 존중했을 것이다.


'내 화산을 위해, 그리고 저승에서 정가가(可可)를 떳떳히 뵈기 위해 나서오.'


용진산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그가 상념에 잠긴 사이 비무대는 정리되었고, 소지산은 종남파 측으로 돌아갔다. 정신을 추스리지 못한 남사일도 화산파 이대 제자들의 부축으로 화산파의 자리에 누웠다. 이제는 마지막 대결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종남파와 화산파, 제 삼차전 주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개방 용두방주 나자행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오늘 비무의 주관자이자 심판이었다. 종남파의 주구가 되다시피 한 개방의 방주가 비무의 주관자라는 점에서 형평성은 이미 한참 어긋났지만, 화산파는 이에 대해 항의할 힘이 없었다. 먼저 출전한 것은 용진산이었다. 그의 등에 매인 삼척 한매신검(寒梅神劍)과 매화 문양이 수놓아진 새까만 장포는 매우 멋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용진산 본인의 외모도 볼 만한 것이었다. 깔끔하게 빗어올린 흑발에 교룡과도 같은 세 갈래 수염, 매끄러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은 실로 미남이라 할 만했다. 


"워어어..종남파에 옥면신권이 있다지만 화산파에도 옥면이 있었군 그래."


"다만 좀 늙은 게 흠이지.."


용진산의 수려한 용모에 관객들은 술렁거렸다.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이란 지고한 위치에 있었으나 강호에 얼굴을 내비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런고로 무림인들 중 그의 얼굴을 직접 본 이는 드물었다. 관객들 중 드물게 남색(男色)취향을 지닌 이들은 남모르게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소란은 곧 가라앉고 좌중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종남파의 장문인, 신검무적 일검혈해 (神劍無敵 一劍血海) 진산월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진산월은 용진산의 수려함과는 대비되는 깡마른 외모였다.특히 좌측 뺨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는 그를 더욱 험악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의 고즈넉한 눈빛과 절대 고수에서만 풍기는 분위기는 진산월을 인간을 넘어선 반선(半仙)의 초인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비무대에 올랐다. 먼저 자리하고 있던 용진산은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물론 진산월은 용진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비무에 자리한 모두는 여전히 조용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백로의 구슬픈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진산월과 용진산은 비무 전 으레 하는 상대방과의 인사나 사담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지긋이 바라볼 뿐. 수 분간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진산월이었다.


"오시오."


그는 용진산을 향해 세 글자를 말했으나 한 글자 글자 마다에 상대를 옭아매는 강력한 위압감이 묻어나왔다.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오자 좌중의 고수들은 몸이 떨리며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아마 그는 말을 내뱉으면서 비범한 무공을 함께 운용한 모양이었는데, 그 누구도 진산월이 어떤 공력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용진산은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가야겠소?" 


진산월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느새 진산월의 오른손은 그의 애검 용영의 손잡이를 감아쥐고 있었다.


"그건 사양하는 바이오."


드디어 용진산이 입을 열었다.그 역시 등에 쥔 한매신검을 뽑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드디어 화산파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싸움의 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