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린외전’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 왕일의 무용담이다. 부자집 아들을대신해 군대에 갔다가 7년 만에 돌아왔더니 집안이 몰락해 있었다. 가족을돌봐주겠다던 부자가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가족의 복수를 한 뒤 천하제일의 고수 혈기림의 후계자가 된다. 죽어버린 혈기림을 대신해 무림에 나가 화려한 활약을 펼친다.

영웅이 무림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과 싸워 평정한다는 무협소설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구도다. “그러나 출발이 다르다. 대의(大義) 대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극히 개인적 명분으로 시작한다”고 좌백은 ‘신무협’으로 불리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설명한다. 비약적 구성, 허술한 문체 같은 기존 무협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실감을 살리고 문장을 다듬는 데도 힘썼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설을 쓰는 내내 ‘협객이란 무엇인가’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며, 1부 제목 ‘협객불망원(俠客不忘怨ㆍ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2부 ‘협객불상신(俠客不喪信ㆍ협객은 신의를 지킨다)’, 3부 ‘협객불기의(俠客不棄義ㆍ협객은 의를 버리지 않는다)’가 그 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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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혈기린이 된 왕일은 군호맹을 도와 제룡련과 싸운다. ‘왕일’이라는 실존과 ‘혈기린’이라는 신분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은 최후의 전장에서 자신이 왕일이면서 동시에 혈기린임을 밝히고 청룡왕과 백호왕을 물리친다. 무림의 전쟁은 종결되고 군호맹과 제룡련은 해체된다. 왕일은 남만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황보장군의 죽음을 지켜본다. 3부는 왜 ‘협객불기의’, 즉 ‘협객은 의를 버리지 않는다’인가. 여기서 ‘의’의 주체는 황보장군이다. 감옥에서 만난 황보장군은 탈옥을 거절하고 죽음을 자청하는데 그것은 ‘의’ 때문이다. 3부의 주제가 ‘의’이기 때문에 황보장군의 처형이 마지막 장면으로 배치된 것이다.

‘혈기린외전’의 주제는 좌백이 후기에서 밝혔듯이, 옛사람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아래 인용의 번역은 좌백이 택한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① 남에게 머리카락 하나라도 뽑히면 이를 매 맞은 것으로 여기었고,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았다. -맹자(孟子)

②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그 능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기(史記)

‘혈기린외전’의 1부는 ①의 맹자의 말과 관계된다. 원한에 대한 복수는 ‘협’의 정신에서 불가결한 기본 원리 중 하나이다. 2부는 ②의 사마천의 말 중 첫 문장과 관계된다. 약속에 대한 믿음 역시 ‘협’ 정신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3부는 ②의 두 번째 문장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의’는 주로 이타성(利他性)과 관계되는 덕목인데, 이것 역시 ‘협’ 정신의 기본 원리이다. 그런데 ①은 맹자가 ‘협’을 폄훼하면서 한 말이고 ②는 사마천이 ‘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 말이기 때문에 ①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협’의 복수정신을 똑같이 묘사하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냥 두어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복수와 믿음, 그리고 의(義)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부에서 왕일의 복수는 원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 2부에서 혈기린의 ‘믿음 잃지 않기’는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속는 어리석음일 수 있고, 단지 어리석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애매한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또 3부에서 황보장군이 ‘대의’를 위해 순순히 처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복수 정신에 위배되며, 나아가서는 악의 횡행을 방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1부에서 악산삼귀는 이타 정신과 복수 정신에 입각해 행동했지만, 그 행동은 역시 그들을 따르는 많은 청년들을 죽게 만든다.

모순 끌어안는 실존적 진정성

요컨대 고대의 ‘협’ 사상은 순수한 반면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으며 동시에 그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는 나이브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혈기린외전’에서 빈농 왕일이 왕일인 동시에 혈기린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협’의 내적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의식화하며 그로 인해 고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대의 ‘협’ 사상을 단순히 액면 그대로 행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근거로(좌백에게 근거는 오직 실존뿐이다) 그 모순을 끌어안으려 하기 때문에 고뇌가 생긴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적인 태도이다. 좌백은 “이런 규정(‘협’에 대한 고대인들의 규정)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를 시험해본다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꾸며 거기에 주인공을 띄워보냈습니다”라고 고백했거니와, 말하자면 이는 고대인의 ‘규정’에 대한 현대인의 시험이다. 악산삼귀나 혈기린, 황보장군의 ‘협’이 고대인의 그것이라면 왕일-혈기린의 ‘협’은 현대인의 그것이다. 그래서 왕일은 황보장군의 ‘대의’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간신 동한신을 암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이르러 왕일이 ‘협’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명확한 개념이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모순과 갈등을 끌어안는 실존의 진정성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혈기린외전’은 하위주체의 실존주의가 수행한 ‘협’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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