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서요.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어요."



 .......전략....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래?"


 소년은 무릎에 파묻은 머리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요상스런 백의 소녀를 마주 보았다. 크고 투명한 소녀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거의 코앞까지 내밀어진 소녀의 손을 보았다. 

 하얀 손. 잊혀진 기억속에서 언젠가 보았던 그 겨울의 눈발보다도 하얀 손. 몸서리치게 작고 앙증맞은 손이 그곳에 있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죠?"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이 물었다. 소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글쎄... 나는 이름을 잊어버렸어. 이름을 불리게 된지 너무 긴 시간이 지나버렸거든."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소년은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이 소녀는 모든면에서 너무 이상했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의 소녀는 작달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용노사라고 부르더구나."

 

 소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앞의 여인을, 아니 작은 소녀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사라니, 그런 말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필사적으로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희고 맑은 그녀의 얼굴은 자신보다는 두어살 연상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다. 

 노사라는 이름은 도저히 눈앞의 소녀에겐 어울린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말하지 못했다. 소녀 또한 말없이 미소만을 지으며 소년을 볼뿐이었다. 청초하고 가녀린, 그러나 한켠으로는 위압되고 마는 그런 묘한 미소였다. '그럼 이제 너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겠니?' 무언의 눈길을 소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더듬더듬 소년이 입술을 움직였다.


 "저는 백림... 백림이라고 해요."

 "예쁜 이름이구나. 백림이라...백림."


 소녀는 몇번이나 백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면 백림의 이름을 영원히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 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소녀는 예쁘장한 얼굴을 갸우뚱 우로 기울였다. 그리고 고민이 된다는 얼굴로 곁에 있는 녹의미녀에게 물었다.


 "백아. 백아는 어떻게 생각하지?"


 백아라 불린 여자. 녹의미녀는 대꾸않고 백의소녀를 보았다.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이다.


 "이 아이에게도 백아가 좋을까? 그러면 백아는 둘이 되는데..."


 백의 소녀의 눈에는 다분한 장난기가 어려있다. '칫.' 녹의 여인이 앙다문 입술 사이로 잇소리를 냈다.

 한숨을 쉬며, 녹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용사저는 항상 심술궂군요. 제 이름은 백이고, 이 아이의 이름은 림이니. 이 아이를 림아라고 부르면 될게 아니겠어요?"

 "그럼 되겠구나! 림아, 림아! 너를 림아라고 부를테야."


 뜻밖의 이름이지만 소년에겐 그런것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사저? 사저라구? 백림은 얼빠진 얼굴로 백의 소녀와 녹의 미녀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백의 소녀보다는 녹의 미녀의 나이가 많아보였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지? 모든 것이 이상했다. 희미한 의구심이 백림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백의 소녀는 작게 손뼉을 쳤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사슴처럼 투명한 눈망울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일어난 희미한 의구심은 물로 씻은듯 사라져버렸다.

 백림은 그저 당황스러웠다. 백의 소녀를 보며 어느샌가 미소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미소를 알지못하던 소년, 백림이 웃고 있었다.


 "그럼 저녀석이 사저의 제자가 되는건가요?"


 그 질문에 백의 소녀가 머뭇거렸다. 무슨 대단한 고민거리라도 생긴 것 처럼 작은 이마를 찡그렸다.  


 "...제자.... 제자 보다는 사제가 더 좋지 않을까? 이 아이를 제자로 거둔다면 남들이 나를 보고 웃을테야. 이 아이와 나는 어떻게 보아도 동갑내기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걸."

 "흥!"


 녹의미녀가 냉랭히 콧소리를 냈다.


"사저는 여전히 어린애처럼 구는 걸 좋아하는군요. 반로환동을 한지가 이미... 아얏! 아야앗! 꼬집지 말아요 사저! 사저!"


 녹의 미녀가 비명을 질렀다. 백림은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휙, 백의 소녀의 소맷자락이 조금 펄력였고, 어째서인지 녹의 미녀는 불이라도 맞은 듯 파닥거리더니, 어느새 팔을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두 눈엔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체로.


"건승당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발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문지르며 녹의미녀가 시무룩히 말했다.


 "...하지만..."


 백의 소녀는 힘없는 미소를 띄었다.


 "이제 건승당에 빈 자리는 많으니까..." 


 쓸쓸한 목소리다. 빈곳을 휩쓰는 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긴 울림이 소년의 마음에 기묘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시려온다. 소녀의 아픔을 자신또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저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녹의미녀는 백림을 쏘아보았다. 얼핏보기엔 싸늘한 시선이었지만, 그 눈길이 마냥 미워보이지만은 않는다고 백림은 생각했다.


 "자 이제 일어날까?"


 백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났다.

 녹의 미녀는 뾰루퉁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저가 알아서 가르쳐요. 나는 저 녀석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을테야."


 그러자 백의의 소녀는 백림에게 다가왔다. 훅,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얼굴과 얼굴이 마주 닿을 정도의 거리에. 

이것은 너무 가깝다.

 얼굴을 붉히는 소년의 귓가로 여자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소녀는 노래하듯 속삭인다.


 "백아가 수줍어 하는구나. 림아, 방금전의 백아의 말은 신경쓸것 없단다. 백아는 왼손잡이야. 그리고 모든것을 마음과 반대로 말한단다."

 "무, 무슨?! 나는 저 녀석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녹의미녀가 얼굴을 붉혔다. 화들짝 놀란듯 손까지 휘젓는다. 큭, 백림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백아야, 림아야. 자아 이제 같이 걸을까?" 


 백의 소녀가 쾌활히 말했다. 백림은 머리를 끄덕였다. 녹의 미녀도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두명의 여인과 한명의 소년. 그네들은 길을 걸었다. 아니 두명은 걷고, 한명이 가쁘게 달렸다. 여인들은 천천히 걷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성큼성큼 저만치 백림의 앞을 앞서 걷고 있었으니까.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걸까.' 백림은 생각했다. 목적지도, 출발지도 알 수 없는 길위에 자신이 있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섞인 기묘한 감정은 침잠해 있던 가슴의 밑바닥에서 떠올라 수면위의 부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 그 생경한 감정의 여운은 길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두 여인의 걸음은 너무 빨라서, 백림에게는 따라가는 일조차 버거웠던 것이다. 가파른 태산의 등성이를 숨가쁘게 내려가자, 어느샌가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그 길위에는 하얀 야생화들이 소복하게, 끝없이 끝없이 깔려있었다. 거기에 물씬 코를 적시는 야생화의 향기까지도.

 헐떡이며 백림은 자신앞에 펼쳐진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종의 망중한이었다. 한껏 녹음이 오른 초목들 아래에 구름처럼 흐드러진 야생화들은 오래토록 정신을 빼앗겨도 나무랄 사람이 없을만치 아름다워 보였다. 저 꽃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여자들에게 물어보아야 겠다고, 백림은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백림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두개의 소실점으로 변해버린 여인들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렸다.


 천하가 새로운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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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중단의 변.


 3시간여를 이어온 천하질풍검의 무사도 여기에서 막을 내린다.


 독자재현의 건승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