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臨後傳 五仙再臨

第 一章 낙화유풍 落花流風

 
술.

 
술은 대체로 좋은 것이다. 특히나 달 밝은 밤, 흐르는 물소리 들리는 풍광 좋은 누각에서 마신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욱이 그 술이 마시기도 전에 은은한 향취를 풍기며 귀한 옥배(玉杯)에 가득 따라질 때라면, 한발 더 나아가 그렇게 술을 따르는 손이 그 어떤 노련한 석공(石工)조차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섬섬옥수(纖纖玉手)라면, 가히 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흥취를 한 자리에 모아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술을 따르는 사람은 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흰 백의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화장도 옅고 별다른 장신구도 없었으나 오히려 그런 간소한 치장이 본디 타고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 같았다.
 
“원로(遠路)에 고단하셨지요? 한 잔 드세요.”
 
백의미녀는 목소리마저도 발음이 또렷하고 음색이 맑아 듣기에 좋았다. 더구나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웃음꽃까지 피우고 있으니 실로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미태(美態)가 듬뿍 넘쳐흘렀다. 이 좋은 밤, 이 좋은 곳에서 이 좋은 술을 이런 미녀와 함께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아마 천하에 둘도 없는 행운아(幸運兒)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백의미녀를 마주한 사람은 청삼을 입은 청년이었다. 미녀의 말대로 먼 길을 급히 온 듯, 머리도 약간 헝클어져 있었고 옷차림도 그다지 정갈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러한 모습이 청년에게는 오히려 잘 어울려 보였다. 청년의 유독 두툼한 손이 옥배를 향해 뻗어갔다.
 
“하하, 그간 우린 여러 번이나 엇갈리기만 했었는데, 인연이란 놈이 참으로 묘한 모양이오. 더구나 불초(不肖)에게 이리 과분한 자리까지 만들어주시다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말을 마친 청년은 옥배에 든 술을 한 번에 쭈욱 들이켰다.
 
“좋은 술이로군, 소저도 한 잔 받으시오.”
 
“저는 여전히 술을 마시지 못하는 관계로, 차로 대신할까 합니다.”
 
백의미녀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더니 미리 준비된 다기에 차를 손수 부었다.
 
청년은 다소 계면쩍은 표정이었으나 이내 다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하하, 장문인께서 난향원을 방문하셨을 때도 소저가 그리 대답했다 들었소이다. 듣고도 주의하지 않은 내 불찰을 허물치 말아주시오.”
 
백의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묵묵히 술잔과 찻잔을 기울이며 달빛과 흐르는 물소리를 벗하여 밤을 보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편안하고 정감이 있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조그맣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강호의 소문이 종종 와전(訛傳)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저 역시 와전된 말만 믿고 사람의 진실된 일면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백의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청년을 새삼스레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듣기로 종남의 일대제자들 중에서는 대협이 가장 성정이 급하고 거친 분이라 했습니다만, 얼굴도 모르는 제 서찰 한 통에 불원천리(不遠千里) 와주신 분이 아직도 제게 용건 한 마디 묻지 않으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 제가 왜 대협을 뵙고자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제가 어떠한 조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종남문하(終南門下)께서 말이지요.”
 
청년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더니, 빈 잔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용건이라, 그것이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군. 내 성정에 대해서야 우리 아버지부터해서 사문의 존장들이며 사형제들까지 꽤나 골머리를 앓아왔으니 변명할 마음이 없소이다만… 내가 종남의 문하고 소저가 쾌의당 소속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소. 다만 나도 남자로서, 천하제일기녀라 불리었던 정소저와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해둡시다.”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군요. 하지만…”


백의미녀는 힘겹게 웃음지으려 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뺨 끝으로 눈물이 고였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자아, 밤이 어지간히 깊었소이다. 밤이슬이 찰 텐데, 슬슬 이 손모(孫某)에게 용건이 있는 분들은 나와보도록 하시지요.”
 
백의미녀, 정난향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은 과연 명문거파의 문하제자다운 기풍이 있었다.
 
“손풍, 손대협. 당신은 진정한 남아로군요. 어리석고 무모하지만, 그것이 남자의 길이란 것이겠지요.”
 
정난향이 한 걸음 물러서자 이내 수십여 명의 인원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누각을 에워싸 버렸다. 가장 앞장 선 흑의인이 검을 뽑아든 채 손풍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흐흐, 우리가 이대로 물러날 성 싶었더냐? 종남의 제자놈들을 하나씩 처죽여서 형제들의 제사상에 제물로 올려줄 것이다.”
 
손풍의 안색은 여전히 담담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흉험한 격전지가 아닌, 명승지로 유람 나온 풍류재사를 보는 듯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덤벼보시오. 종남의 무공을 보여드리겠소.”


“흐흐흐,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만용(蠻勇)을 부리는구나. 넌 노부를 알아보겠느냐?”


흑의인의 뒤에서 금포노인이 한걸음 더 나서며 괴소를 흘렸다. 손풍의 담담한 얼굴에 문득 냉랭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십육사니 십이기니 하던 서장의 떨거지들만도 못해서 중원인의 긍지조차 저버리고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던 패왕권인지 졸렬권인지 하는 담노인 아니시오? 내가 하룻강아지라면 담노인은 뒷간의 구더기 정도 되겠구려.”


예전 위수에서 진산월 일행을 습격했던 무리 중 하나인 패왕권(覇王拳) 담소광은 거침없는 손풍의 입담에 얼굴이 붉어지며 세찬 콧김까지 내뿜고 있었다. 그가 마악 몸을 날리려는 찰나, 예의 흑의인이 먼저 그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종남이 천하제일문파라더니, 어째 문하제자의 입은 하오문 패거리 같군. 곧 죽더라도 입은 살아야겠다 이건가?”


“본문은 이제 당신들 따위가 모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도 되었을텐데, 안타깝구려. 하긴 나 하나 상대하려고 미인계(美人計)에 독계로도 모자라 이렇게 떼거지로 덤비는 당신들에게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소?”


“네놈은 이미 중독(中毒)된 몸임을 알고 있단 말이냐? 그게 어떤 독인지도?”


“당신들 같은 쥐새끼무리들이 대종남의 문하를 상대하려면 당연히 독계를 쓰리라 생각했소. 당신들은 비겁하고 무도한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무리들이니, 설마 장문인께 하독(下毒)하려다 망신만 당했던 그 장인몽을 또 쓴 건 아니겠지?”


담소광이 어느새 노기를 거두고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장인몽은 이제 완벽한 시험을 거쳤으니 그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너는 신검무적처럼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몸도 아니지 않느냐? 네놈이 자랑하는 건 네 아비가 먹이고 네 사문이 키워준 공력(功力)뿐이라는 것을 온천하가 아는데, 그 유일한 자랑인 공력을 일으키는 순간 한줌 핏물이 될 것이다!”


손풍도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공격하여 공력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 것이오?”


손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소광의 거대한 체구는 이미 희끗한 그림자만 남긴 채 손풍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내 철마권법으로 네놈의 주둥이부터 박살내주마!”


휘잉~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담소광의 두 주먹이 손풍을 향해 뻗어갔다. 과연 수십 년간 강북을 질타해온 노고수의 성명은 헛되지 않아, 쌍권의 위력이며 속도가 모두 무림일절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손풍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노리는 담소광의 좌권을 목만 살짝 돌리며 쉽게 피해버리더니, 곧이어 더욱 위맹한 기세의 우권을 자신의 좌수를 들어 막아갔다.


‘흐흐흐, 이 멍청한 녀석, 공력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놈이 노부의 일권을 손으로 막다니, 네놈의 손바닥에 큰 구멍이 날 것이다’


담소광은 자신의 우권에 새삼 공력을 돋우었다. 이 우권으로 손풍의 손을 뚫는 것은 물론이요, 팔을 부러뜨리고 안면이나 목에 큰 손상을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이 놈을 너무 쉽게 죽이면 재미가 없을텐데… 흑백쌍사는 어린애 하나 잡는데 너무 심계를 허비했구만’


콰앙! 주먹과 육장이 부딪혔는데도 어이없는 폭음이 나왔다. 이어 한 인영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백발이 흘러내리며 낭패한 표정이 역력한 담소광이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이, 이놈. 공력이 나보다 낫구나. 하지만 그게 네놈의 명을 재촉할 뿐이다!”


담소광은 이를 악물더니 좌권만으로 다시금 매서운 권풍을 일으켰다.


“패왕권, 패왕권 하더니 이렇게 약해서야 어디 쓰겠소? 이번엔 이 손가락 하나로 막아드리지.”


손풍이 한걸음 물러나며 일권을 피한 후, 도발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담소광은 필생의 공력을 끌어모아 철마권법의 최절초를 펼쳐갔다.


콰앙! 다시금 터지는 폭음. 그리고 양 손이 모두 뭉그러진 채 쓰러진 금포노인. 손풍은 여전히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으며, 부상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흑의인이 당황한 듯 정난향을 돌아보았다.


“어찌된거냐? 그에게 하독이 실패하기라도 한 것이냐?”


“아니에요. 저 주안상에는 분명 장인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마신 사람도 있고요.”


“그렇다면… 그렇군, 저 놈은 싸우다 죽고 싶어 하는 거로군. 중독된 놈에게는 고수도 필요 없지. 놈은 곧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흑의인은 냉정을 되찾고 크게 손짓을 했다. 큰 함성과 더불어 십여 명의 무사들이 손풍에게 덤벼들었다.


적이 자신의 코앞에 올 때까지 손풍은 양손을 여전히 늘어뜨린 상태로 미동도 없었다. 단지 눈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좇을 뿐이었다.


‘이렇게 끝났군. 나머지들은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흑의인이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찰나지만 밤을 밝힐만한 섬광이 일었고 이어서 굉음이 나더니 그 섬광과 굉음은 이내 여럿의 비명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크아아아아악”


“케에에에에”


“금사여한선 추천. 개념작.”


누각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손풍에게 덤벼든 무사들은 모두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었고, 그 아수라장 한 복판에 손풍만이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장인몽을 너무 믿지 말라니까. 아무래도 장인들의 원혼이 당신들을 비웃고 있는 거 같소이다.”


흑의인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이, 이것도 종남의 무공이냐?”


“종남의 장공(掌功)중 으뜸이라는 태인장이오. 슬슬 지겨워질 판이니, 빨리 끝내려고 공력을 좀 과하게 써보았소이다.”


“쐐액~”


흑의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호선을 그리며 빠르게 손풍을 향해 날아가는 물체가 있었다.


‘혹시나 하고 그들까지 배치해두길 잘 했군. 이놈이 피독주라도 갖고 있는 건지, 공력이 너무 높아 독이 통하지 않는 건진 몰라도 오늘밤 살아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흑의인이 생각하다 문득 정난향을 돌아보았다. 혈풍이 불어오는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처연했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설마 이 년이 본당을 배신했을 리는 없겠지. 우선 저 녀석과는 안면조차 없을 테니 말이야’


한편, 손풍 역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호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네 줄기의 호선… 그는 일전에 진산월에게 직접 그러한 비도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역시나 서장의 떨거지들과 쾌의당의 잔당이 손을 잡은게 확실하군. 그나저나 역시 너무 무모했던 것인가, 오늘의 행동은? 후훗, 뭐 후회는 없지만 말이야. 이게 나, 손풍의 방식이니까.’


손풍의 양 소맷자락이 넓게 펼쳐진다.


‘구반장법의 공부(工夫)는 많이 부족하지만, 이들에게 약세를 보일 수는 없지.’


빠르게 날아온 호선은 자그마한 비도(飛刀)였다. 매서운 기세의 네 자루 비도는 이내 손풍의 소맷자락에 휘감기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튕겨져 나오듯 더욱 빠른 기세로 반대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비록 튕겨져나간 비도가 누각을 에워싼 무리들을 살상하지는 못했지만, 무리들은 다시 한 번 손풍의 무위(武威)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껴야했다.


사실 손풍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현천건곤강기를 바탕으로 천단신공과 태진강기까지 대성한 그의 내공은 그간의 고심참담한 수련 끝에 더욱 진가를 발하고 있었으나 무공 입문이 늦은데다 종남의 절학들이 일이년에 통달할 만큼 쉬운 무공이 아닌지라 공력에 비해 초식의 운용은 아직 자신있게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풍은 오랜 서안 뒷골목에서의 파락호 생활로 인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에는 약한 모습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겉으로 태연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담소광의 패왕권은 명불허전이었다. 그를 격동시켜 단숨에 승부를 내려했던 생각은 맞아떨어졌지만, 그의 권법에 실린 강력한 역도는 손풍으로서도 어느 정도 감당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옥뢰신장과 옥잠지로 그의 양 주먹을 모두 박살내긴 했으나, 손풍 역시 내색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부상을 입고 있었다.


더구나 공력소모가 심한 태인장까지 시전했지만 아직 적은 수두룩하게 남아 있는 형편이 아닌가?


‘종남에 입문한지 이제 칠년… 정말 좋았던 시간이었지. 장문인, 사부님, 그리고 사형제들… 나 손풍, 오늘 비록 살아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대종남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겠소이다.’


손풍이 결의를 다지는 동안, 다시 여러 명의 인원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체구가 거대한 꼽추노인과, 몸에 착 달라붙는 홍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당년에 종남장문인마저 내 비도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거늘, 한낱 일대제자인 놈이 날 감당할 수 있겠느냐?”


홍의여인이 싸늘하게 말을 하며 두 손에 비도를 가득 움켜쥐고 언제든 발출할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체구의 꼽추 노인도 곧장 몸을 날릴 기세였다. 더구나 흑의인이 이끄는 무리들도 아직 절반 이상 남아있지 않은가?


“입으로만 나불거릴 것이 아니라 실력을 보여주시오. 그 대단한 분들이 나 하나를 어찌하지 못한단 말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손풍이 먼저 공세를 취했다. 서장 십육사의 일원이었던 홍갈자 희목염과 독나타 호반은 그가 먼저 공격할 줄은 예상치 못한 터라 다급히 그에 맞서갔다. 희목염은 몸을 뒤로 날리며 여덟 개의 비도를 쏘아갔고, 호반은 특유의 긴 팔을 휘두르며 손풍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아직 남은 적이 많으니 도박을 할 수 밖에…’


콰앙!


“크아아아악”


“끄르륵…”


폭음이 터지며 두 개의 비명이 들려왔다.


“우욱~”


두 사람이 쓰러졌고, 서 있는 한 사람도 피를 토하며 몸을 휘청거렸다. 독나타 호반은 몸이 온통 뭉그러진 피떡이 되어 절명했고, 홍갈자 희목염은 자신의 비도가 하필 천돌혈에 꽂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쓰러져있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으나 반쯤은 송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몰골이었다.


손풍은 천단신공의 폭섬결을 운용하여 우권으로 낙뢰신권의 최절초 일점천뢰를 시전하여 호반의 상체를 공격함과 동시에, 좌수로는 태인장의 공력으로 구반장법의 금슬상화를 펼쳐 희목염의 비도를 튕겨낸 것이었다.


구반장법의 초식과 태인장의 공력이 합쳐진 이 공세는 희목염조차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이었고, 그 결과 십육사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손풍 역시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기혈이 들끓어 피를 토하게 된 것이다.


흑의인이 질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놈의 배짱이며 무공이 생각 이상이로군. 하지만 넌 우리를 당해낼 수 없다!”


흑의인이 먼저 몸을 날려 손풍을 공격해왔고, 그 뒤를 따라 남은 인원들이 모두 분분히 몸을 날려 공세를 펼쳤다.


“종남의 제자는 쓰러지지도, 패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종남의 무공이다!”


손풍은 핏기를 닦아내지도 못한 채로 미친 듯이 권장을 펼쳤다. 그의 무위는 실로 놀라워 여러 명의 적을 쓰러뜨렸으나, 중과부적으로 이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흐으, 흐으…”


누각 한쪽 구석에 몰려 가쁜 숨을 내쉬는 손풍.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곳곳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으며, 청포는 이미 갈가리 찢겨 누더기와 다름없었다.


“죽어라!”


일갈과 함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손풍 역시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바로 잡으며 투지를 다시 한 번 불태우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 때, 갑자기 흰 그림자가 손풍 앞을 날아오르며 손으로 암기를 뿌려댔다. 암기는 손풍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흑의인의 무리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크아악!”


비명이 몇 차례 들리는 것도 잠시, 날아올랐던 흰 인영은 피투성이가 된 채 손풍 앞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쓰러진 인영은 손풍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인 정난향이었다.


“정소저, 이 무슨…”


손풍이 당황하여 그녀를 안아 일으킬 때, 흑의인이 검을 곧추세운 채 그와 정난향을 쏘아보았다. 흑의인의 검미(劍尾)에는 빨간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난향, 네년이 설마 본당을 배반하다니, 그래봤자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네년의 반반한 얼굴은 아깝지만, 이미 넌 별 쓸모가 없었는데 마침 잘 됐구나. 같이 죽여주마.”


흑의인이 피 묻은 검을 그들에게 겨눌 때, 다시 한 번 어둠을 찢고 빠르게 쏘아져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흑의인이 놀라 검을 들어 희끗한 그림자를 쳐냈지만 그 작은 그림자에 실린 역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흑의인의 검을 크게 진동시키며 흑의인을 두 걸음이나 물러서게 했다.


“천강은홍(天降銀虹)!”  


이어, 재빠르게 날아온 인영 하나가 뛰어오르며 일검을 그에게 내질렀다. 단 일 초식이었으나 그 일초의 빠르기며 변화의 위력은 흑의인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흑의인이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검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영활하게 움직임을 바꾸어 결국 흑의인의 어깨를 갈라버리고야 말았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며 흑의인이 한 걸음 물러나자, 손풍의 앞에는 일남일녀가 우뚝 서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준수한 귀공자풍의 청년과 소맷자락이 유독 넓은 궁장을 입은 절세미녀.


“너…너희들도 종남의 제자냐?”


귀공자는 말없이 손풍을 돌아보았다.


“사제, 괜찮으냐?”  
 
궁장미녀도 손풍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경솔했어, 손 사제.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정소저를 돌보도록 해.”


손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사형과 사저는 태행산(太行山)으로 가지 않았소? 이곳에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이오?”


“태행산에서 엄청난 일을 겪었지, 그건 하후걸이 오선재림 암중소화(暗中笑花)편에서 다룰테니 그걸 참고하면 될 거고, 마침 사제가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 이가 있어 화급히 온 거야. 정말 큰 일 날 뻔했군.” 


“성숙해가 아직도 우리를 신경 쓰고 있나보구려. 호의로 그러는 거겠지만 뒷맛이 찝찝하오.”


“자, 어서 정소저부터…”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귀공자는 말없이 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을 가볍게 쥔 채 팔을 내려뜨리고 있어 얼핏 방심한 자세로 보이기도 했지만, 실로 물 샐 틈 없을 만큼 완벽한 자세였다. 헌앙하고 준수한 용모에 절세검객의 풍도까지 풍기는 그에게 누구도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겨우 상처를 지혈한 흑의인이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크으… 종남에 아직 날아오르지 못한 잠룡(潛龍)이 하나 있어,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 무공은 능히 강호를 질타할만 하다 들었소. 당신이 바로 종남잠룡이라 불리는 방화요?”


귀공자의 준수한 얼굴에 문득 한 가닥 홍조가 일었다.


“그, 그렇소. 내가 방화긴 하지만 잠룡이란 말은 지나친…”


그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더듬자, 궁장미녀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바보사형, 무슨 정담(情談)이라도 나누는 건가요? 어서 저자들을 모두 베어버려요!”


“으, 으응. 알았어, 사매. 자, 당신들은 각오하시오.”


흑의인은 피투성이가 된 어깨를 감싸 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동원한 인원은 이미 절반 이상이 손풍과 정난향에게 격살당한 상태였고, 십육사의 두 명이 쓰러진 지금 이름난 고수라고 내세울만한 인물도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상대의 단 일초에 부상을 입었으며 종남의 제자 두 명이 더 나타났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승산은 전혀 없었다.


‘태행산 쪽의 일도 저 놈들이 무사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봤을 때 이미 실패로군. 남은 건 감숙(甘肅) 쪽 뿐인가…’


흑의인은 내심 침음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다음에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흑의인이 손을 내젓자, 주루를 에워쌌던 인원들 중 남은 자들이 분분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궁장미녀는 연신 손풍의 품에 쓰러진 정난향과 물러서는 흑의인 일당, 여전히 달빛을 받으며 검을 빼든 채로 선 방화를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방화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사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거야?”


“바보사형, 눈앞에 대적이 있는데 쫓아가 요절 낼 생각은 않고 멀뚱멀뚱 서서 뭘 하는 거예요?
     
“그, 그야 낯선 곳에서 함부로 적을 추격할 수도 없는 일이고, 우선 손사제의 안위가 급하… 아얏~!”


궁장미녀는 다시금 방화를 꼬집으며 성큼 한 발을 내딛었다.


“흥, 겁쟁이 같은 말 집어치우고 어서 날 따라오기나 하란 말이에요!”


“상매(裳妹)! 혼자 가면 위험해, 그리고 손 사제가 다쳤으니 멀리 가면 안 된다구…”


어느새 두 사람의 모습은 희미한 달빛으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 쓰러진 정난향을 안은 채로 있었던 손풍은 그들을 따라가야 할지 이대로 있어야할지 얼른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사저(師姐)는 정말 눈치가 빠르군요. 그리고 보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문득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유의 부드럽고 또렷한 목소리. 흑의인의 일검에 큰 검상을 입어 백의가 온통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고, 낯빛도 창백해진데다 눈빛마저 흐릿해져 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쾌의당 화중용왕이 가장 아끼는 제자이자 낙양 난향원에 있으면서 천하제일기녀로 불렸던 절세의 미녀, 정난향. 그녀는 왜 생면부지의 손풍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일까?


“정소저…”


손풍으로서도 그녀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금창약을 찾아 지혈부터 해야겠다싶어 품속을 뒤지는데, 뱅어 같은 손이 손풍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전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해요. 장인몽은… 술잔이 아닌 찻잔에 들어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입은 검상도 가벼운 것이 아니랍니다.”


정난향은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부탁이라 하면 좀 뻔뻔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시겠어요? 그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손대협에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군요.”


***

 
나는 고향이 어딘지, 부모가 누군지도 몰라요. 대여섯 되었을 무렵, 기근이 하북을 크게 뒤덮었을 때,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부모가 날 팔았다고 하더군요.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어린 나이에 모질게 고생하던 생각뿐이에요.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아련히 떠오르는 달콤한 기억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곤 하죠.


사부님을 만난 건 열 살을 갓 넘었을 때에요. 내 어떤 모습이 소수마후(素手魔后)라 불리는 절정고수 눈에 띈 건진 모르겠으나, 그날로 고된 종살이에서 벗어나 사부님의 문하에 들어 무공과 여러 기예를 익히게 되었지요.


즐거웠냐고요? 그런 감정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던 시간이었답니다. 사부님은 대부분의 시간은 강호의 여러 일로 출타하실 때가 많았고, 머물러 계실 때에도 엄격히 진경(進境)을 확인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줄 뿐이셨죠. 네 명의 사저는 겉으론 살갑게 대해줬지만, 어린 내 눈에도 뻔히 보이더군요. 사부님의 총애를 독차지해서 진정한 사부님의 절예를 혼자 이어받겠다는 생각으로 겉보기에 가식적 행동 뒤에서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던 모습이요.


무공을 왜 배워야 하는지, 무공을 배우고 출도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제 자질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지, 가장 늦게 입문했음에도 이내 사저들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지요. 차라리 뒤떨어진 채로 있었다면 동정(同情)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나 같이 부모도 모르는 천한 계집애에게 뒤질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명가의 딸들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있던 사저들에게는 제 존재가 불쾌해진 거 같더군요.


원래도 따뜻한 정(情)이 뭔지도 몰랐던 저지만, 몸이 성장하고 무공수위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외로워져 갔습니다. 그럴수록 맹목적으로 무공연마에만 매달렸고, 음률과 서화 같은 사부님의 다른 재주도 충실히 익힐 수 있었답니다.


열여섯 되던 해 , 사부님은 제게 기방(妓房)에 적(籍)을 올리라고 하셨어요. 절대로 사내놈들에게 정을 주지 말고, 만일 정이 넘치도록 차오른다면 차라리 쏟아버리라고 하더군요. 저는 처음 입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사부님의 명을 따를 뿐이었고 실제로 기녀가 되어 웃음을 파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방에서의 경험이 다소 쌓이자, 사부님은 저를 낙양으로 보내셨지요. 그곳에서 정보수집, 청부의뢰, 무림 각 사안에 대한 동향보고 등의 임무를 맡게 되었어요. 어릴 때 팔려나간 것도, 무공을 배운 것도, 기녀가 된 것도 모두 내 뜻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낙양에서도 그런 식으로 쾌의당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래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남자, 자칭 풍류공자라 칭하는 그 바보 같은 손검당을 말이지요. 


***


“손검당?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정난향은 도중에 피를 두어 번이나 토해가며 점차 안색이 핼쑥해지고 숨도 가빠지고 있었다. 손검당의 이름을 들은 손풍이 저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자, 정난향은 애써 숨을 고르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귀파의 장문인께 나를 용서해달라며 나를 대신해 죽어갔던 그 남자 말이에요. 그는 나를 보자마자 문턱이 닳도록 난향원을 드나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런 남자는 드물지 않았던 터라 처음에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그가 파문(破門)을 자처하며 뛰쳐나와 쾌의당의 칼날이 되었을 때도, 임무를 수행한 후에 언제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내가 따라주는 한 잔 술만 원했을 때도, 아니 그가 나를 대신해 죽어갔던 그 순간에도 난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좋아할 수는 더욱 없었죠.”


손풍은 문득 손검당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제나 강하고 당당하기만 했던 장문인 진산월이 그의 주검을 수습할 때 보였던 그 쓸쓸한 눈빛도. 정난향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저 궁금했어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원한 적도, 내 의지로 무엇을 택해본 적도 없는데, 그들은 왜 나 같은 일개 기녀를 그토록 원했으며 자신의 재산, 지위, 목숨까지도 자발적으로 나에게 바쳐왔는지 말이에요. 그저 헛된 웃음과 허무할 뿐인 정사(情事)를 위해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에요.”


“가치의 경중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라 장문인께서 말씀하셨소. 다른 사람의 꿈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종남이 군림천하를 꿈꾸었을 때 비웃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하고 말이오.”


손풍의 진지한 대답에 정난향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종남의 제자다운 말이에요. 어쩌면 나도 사부님이 아닌 태평검객 임장홍 선사의 눈에 띄었더라면 미약하나마 군림천하의 꿈을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점에서 종남파가 참 부럽군요.”


그녀는 다시금 각혈을 하더니 새삼 손풍을 올려다보았다.


“난향원에서 난 이미 대협을 뵈었었지요. 강호를 진동시킨 신검무적이 대동한 제자라기에 은근 호기심이 일었는데 제가 자리에 갔을 때는 대협은 벌써 취한 채 곯아떨어져 있더군요. 그 모습에서 처음으로 그간 잊고 있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자유(自由)라는 말을요.”


“자유라… 소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 당시 난 철없는 망나니일 뿐이었소. 말할 가치도 없었던 시절이오만.”


“방금 대협이 뭐라 말씀하셨나요? 가치의 경중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의 판단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누가 뭐래도, 그 순간에 저는 자유라는 말의 실체를 보았답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말이 한낱 취한을 통해 생생히 다가올지는 몰랐었지 만요.”


손풍은 쑥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정난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후 시간을 쪼개 대협에 대한 정보를 계속 알아보았지요. 참으로 재미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안에서 손꼽는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으되 파락호의 삶을 자처하고, 몰락 직전에 기사회생한 종남파에 입문하더니 좌충우돌하면서도 차츰 무림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군요. 원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무엇을 결정해 본 적도 없는 나에게 손대협의 삶은 처음엔 낯설었으나 이윽고 동경(憧憬)하는 것이 되었지요. 하여 꼭 한번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이런 자리라서 미안한 일이네요.”


손풍은 문득 장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인물이 못 되오. 정소저에 대한 소문만 듣고 한번 만나서 우쭐댈 생각으로 난향원에 간 것이고, 이후의 행보도 모두 사문의 어르신들과 사형제들의 도움에 힘입은 바지, 이 손모가 스스로 이룬 것은 없소이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여러 사람들의 힘입은 바도 크겠지만, 손대협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손대협을 이끌어 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손대협이 단신으로 만나고 싶다는 나의 부탁을 의심해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거나 단신으로 오긴 했으되 나를 질책하거나 힐난 했다면, 또는 포위된 상태에서 저를 공격하거나 목숨을 구걸했더라면… 저는 손대협에게 장인몽을 먹이고 거리낌 없이 목숨을 빼앗았을 거예요. 하지만 대협은 그러지 않으셨죠. 마지막까지 자유롭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요, 평생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내 자유로운 의사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일이었고 한 점 후회도 없어요. 아니, 내게 자유의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준 대협의 앞에서 할 수 있어 정말 기쁘답니다.”


정난향의 얼굴은 피와 땀,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흐릿해져가는 눈빛도 마지막 힘을 쥐어짠 까닭인지 다시금 평소의 생생함을 되찾고 있었다.


“예전, 종남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파락호 생활에만 젖어있던 내게 장문인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소. ‘네가 강호인의 꿈을 꾸는 그 순간부터 너는 강호인이다.’ 라고 말이오. 내 오늘 그 말을 소저께 드리고 싶구려. 소저가 자유를 꿈꾸었던 그 순간부터 소저는 이미 자유인이었소. 굳이 이렇게 나를 위해 몸을 던질 필요가 없었소이다.”


손풍의 목소리가 평소 그답지 않게 잠겨갔다. 그의 눈에도 뿌옇게 습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정난향은 그의 말에 더욱 크게 웃으려 했으나 이미 장인몽이 신경계에도 영향을 준 것인지, 그녀의 의도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얼굴을 씰룩거리더니 이내 미약하게 떨어가며,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고마워요. 그 말을 듣고 떠나게 되니, 내 삶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대협이 제게 자유의 의미 뿐 아니라 애정(愛情)의 의미도 가르쳐 주셨을 것 같군요. 어쩌면 우린 완전한 이해의 바탕 위에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손풍은 차가워져 가는 그녀의 몸을 힘차게 감싸 안았지만, 정작 고개는  가로저었다.


“소저는 이미 완전한 사랑을 받았소.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내던질 수 있는 게 완전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손검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저는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것이 어찌 완전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손풍은 다시금 탄식했다.


“소저, 소저는 잘못 생각하고 있소. 완전한 이해는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그 감정이 향하는 곳으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바에 있다 생각하오. 즉,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오. 손검당은 소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또 그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사람이오. 정말 멋진 사나이라고 할 수 있지.”


정난향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몽롱해져 가는 의식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으려 했다.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전 정말 어리석은 여자인가 봐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군요. 고마워요. 그리고… 그리고, 정말 기뻐요.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이미 정말 소중한 것을 갖고 있었군요. 그걸 일깨워줘서 고맙……”


정난향의 고개가 힘없이 푹 꺾였다. 피투성이로 눈을 감은 그녀지만, 표정은 더 없이 평온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 평온하게 숨을 거둔 얼굴 위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과 오열이 덮이고 있었다.


***

서안(西安) 뒷골목의 허름한 주루, 희미한 등불 밑으로 왁자지껄한 술판이 한창이었다.


“형님, 지금 강호에서는 형님과 형님의 사형제들 얘기로 떠들썩합니다. 이백 년 전에 종남오선(終南五仙)이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까지 있을 지경이라니까요. 이제 정말 명망 높은 고수가 되었는데도 형님은 수십 년 째 변한 게 없군요. 여전히 이런 허름한 곳에서 우리 같은 놈들과 술 마시기나 좋아하고 말입니다.”


쥐눈의 장한이 수다스럽게 지껄이며 상석(上席)에 앉은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에게 술을 권했다. 중년인은 그 술을 마다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날렸다.


“오선? 나는 신선이 아니며 신선이 될 마음도 없는데 어찌하나? 종남의 기세가 날로 뻗어가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아부라도 하려는 모양인 게지.”


“그게 아니라니까요 형님. 형님의 무공이며 의협심, 게다가 언제나 멋을 추구하는 풍류(風流)까지, 형님이야말로 종남오선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분이라고요.”


“어허, 나는 신선이 아니라니까(非仙). 신선입네하며 혼자 고고한 척하며 무게 잡느니, 난 이렇게 뒷골목 주점에서 술이나 마시려네. 그리고 자네 말일세.”


중년인은 문득 흐트러진 낯빛을 바로잡더니, 쥐눈의 장한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멋을 즐기고 고상한 척을 하는 게 풍류가 아니라네. 진정한 풍류는…”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 강한 어조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네. 오래 전, 어느 아름다운 여자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일세.”


君臨後傳 五仙再臨 落花流風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