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 이런건 모두 사소한 문제일런지도 모르지."
"무엇이 사소하단 말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산월은 찻잔속의 뜨거운 차가 싸늘히 식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창너머로 사위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몇시진의 시간은 족히 흐른듯 했다. 물론 그래야 할만치 심각한 이야기 였지만.
모용단죽은 말없이 진산월의 긴장된 낯을 쓸어보더니 하얀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태을진인의 무공의 근원이 태양신공에 근거했다는 것 말이야. 종남오선의 그 일. 그 비사에 비하자면 말일세. 이  이야기는 종남의 장문인인 자네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일게야."

종남오선의 비사. 종남파의 장문인인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사의 한조각을 추렴하는 자가 이곳에도 있다. 진실로 끝나지 않을 떡밥, 복날 담벼락에 그어진 개새끼 오줌자국처럼 질질질 늘어지는 이 전개에 진산월은 다시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차가 식었군."

모용단죽이 무심히 말했다. 이어 그는 고적한 손으로 진산월의 앞에 놓여진 찻잔을 거두고는, 새로운 찻잔을 가져와 뜨거운 찻물을 부어주었다. 그 조용한 몸짓에는 거부할 수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진산월은 잠자코 찻물을 한모금 삼켰다. 한모금을 마시자 짜르르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와 위장을 데워놓는듯 했다.
천천히, 모용단죽이 입을 열었다.

"태을진인과 혈선 정립병, 그리고 비선의 사이에는 기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진장문인이 아는지 모르겠네."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진산월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황급히히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혈선께서 비선을 연모하셨고, 비선께서는 태을진인을..."
"그래 그래 그런 이야기였지.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야."

진산월의 놀란 얼굴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된것인지, 모용단죽은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럼...?"
"검선 매종도께서 구양신공을 대성하신것은 대강 자네와 같은 나이, 아니 오히려 자네보다 이른 나이인 24세때의 일이었네. 그리고 검선께서 직접창안하신 태양신공을 삼성까지 익히신것은 스물 여섯때의 일이시지."
"...!"
"자네도 깨달았나보군."

모용단죽은 부드럽게 웃었다. 긴 웃음이었다. 한번 숨 을 내쉴때마다 노인의 고운 아미가 기분좋게 흔들렸다.  

"삼성의 태양신공을 익힌자는 반양인이 되어버리지. 그런 그가 무슨 수로 삼십이 다 된 나이에 비선 조심향과 연분을 맺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말한 모용단죽이 그 다음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 말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밖에 없었고, 진산월은 좀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추스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종남산의 뒤뜰에는 두명의 남녀가 서있었다. 한가지의 신기한 사실은 이 두 남녀가 세인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볼만한 미남미녀라는 사실이었고, 다시 한가지 더 놀랄만한 사실은 두 사람의 차림새가 놀랄만치 판이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소탈한 차리에 머리를 질끈 뒤로 동영샌 여인은 펑퍼짐한 옷에 허리에 커다란 청강장검을 차고 있어 예쁜 얼굴을 빼고 보면 오히려 사내 무인을 보는 듯한 차림이였고, 곱상한 얼굴에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은 사내는 긴 가죽장화를 신고 허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검을 차고 있어 옷차림만을 떼놓고 보면 오히려 여인이라 할만 하였다.

"매사형,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저를 멀리하는 것이죠?"

그 중의 여인, 조심향이 고운아미를 찡그리며 따져물었다.

"최근 들어서 사형께서는 저에게 한마디의 말도 걸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항상 저녁시간이 되면 저게 만들어 주시던 남전계퇴도 만들어 주시지 않구요. 그 대신 화난 눈으로 저를 노려볼 뿐이구요."
"남전계퇴야 네가 먹고 싶으면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될일이 아니냐. 그리고 내가 언제너를 화난 눈으로 노려보았느냐. 네가 마음을 못되게 먹으니 모든것이 그리 보이는 것이다!"

여느 여인보다도 곱상한 얼굴을 지닌 사내가 빠른 어투로 받아쳤다.  기괴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여인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높았다.

"여어! 조사매, 매사형! 거기서 무얼하고 있어?"

어디선가 시원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조심향과 매종도는 찔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혈선 정립병이 성큼성큼 그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정사형!"

조심향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정립병에게 달려가 안겼다. 반면에 매종도는 화끈화끈 얼굴을 붉힌체 어쩔줄을 몰라하는 체였다.

"조사매, 매사형 알고 있어?"
"네? 무엇을요."

  정립병의 품에 안긴, 조심향이 짐짓 애교스럽게 되물었다. 매종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런 조심향의 뒤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눈빛은 마치 투기를 부리는 여인의 눈빛과 닮아있어 매우 기괴했다.
정립병이 시원스레 말했다.

"D-4라는 사실을 말이야."
"응?"
"국가직 공무원 시험이 4일 남았다고 썅년아."


다음화 예고

"우일기 장문인. 우린 매종도 그 반음양의 괴수를 파문시켜야해요. 그 괴수가 정사형을..."
"흐음... 조사매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맨입으론 어렵겠구나."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우일기는 답없이 킬킬 웃었다. 조심향은 놀란 눈이 되었으나 곧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입술을 꼭 다물고는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흐흐흐."

우일기는 욕정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조심향의 뇌살적인 몸매를 새삼 훑어보더니... 조심향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황의 무복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렸다.
사르륵 사르륵.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여인의 우윳빚 육체는 진정 조물주의 걸작 바로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