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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보고 쓴다.  



개차법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임의로 계를 지키고 말고를 바꾼 것이 아니야.  

불교에서는 이렇게 계율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여래(부처)밖에 없다고 본다.  

석가모니 이후 아라한들은 있었을지언정 여래는 아직까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실제로 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석가모니 이래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는 온갖 크고 작은 계율이 있는데, 

일반 신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승려쯤 되면 

현실생활에서 두 가지 계율이 서로 충돌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한 승려가 산길을 걸어가는데 웬 사슴이 상처를 입고 다가와 살려달라는 듯이 기대었다.

그래서 승려는 자비심이 일어나 이 사슴을 돌보고 숨겨주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헐레벌떡 사냥꾼이 찾아오더니 자기 총에 맞은 사슴이 여기 오지 않았냐고

봤으면 알려달라고 한다고 해보자.  


승려에게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계율과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있다.  


그런데 사슴을 살리자니 거짓말을 해야 하고

정직하게 말하자니 살생을 돕게 된다.  


두 계율이 충돌하지.  


진지하게 불도를 닦는 승려라면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이 개차법이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작을 계율을 잠시 접어둔다는 거지.  



임진왜란 때 승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교학적 근거가 되는 것 또한 개차법이다.  

승려가 사람을 죽임은 큰 죄이며 중대한 계율위반(범계)이지만, 

그렇다고 내두면 왜병들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테니 

더 중요한 쪽을 택한다는 거다.  


개차법을 하는데에는 굳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의 허가'가 필요 없다.  

그 상황에 처한 승려 개개인에게 달렸다.  


만약 어떤 승려가 개차법이라면서 어떤 계율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른 승려가 "그것은 적절하지 않았다"라고 비난하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임진왜란 때 승병의 경우에는

승려 개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움직인 것이라

명망 있는 승려가 주도하여 설득할 필요가 있었지.  




그런데 남방불교(태국, 스리랑카 등에서 믿는 불교)에서는 개차법을 인정하지 않아.  

여기서는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도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본다.  

아니, 아라한이 되었다면 숨쉬듯 자연스럽게 계율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고 본다.  


위에서 이야기한 사슴과 사냥꾼 이야기.

대승불교에서는 개차법에 따라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했지.  



그런데 남방불교의 올바른 승려라면? 

살생을 도울 수 없으므로 사냥꾼에게 말을 해줄 수도 없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므로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승려는 거기서 최소한 입을 다물거나,  

사냥꾼이 사슴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보지.  




(참고로 내가 여기서 한 사슴의 비유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남방불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승려가 쓴 논문에서 인용한 거다.)




개차법은 좋게 평가하면 융통성, 혹은 계율의 본의미를 찾는 것이지만

나쁘게 평가하면 승려가 꼭 지켜야 할 계율을 X대로 해석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어.  


한국 불교에서도 승려들이 개차법이란 미명 아래 계율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목소리가 

상당히 나오지.  



반대로 남방불교는 계율 해석이 너무 기계적이라 

계율에 대한 구체적 해석을 보면 어쩔 땐 숨이 막힌다.  


서로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대칭된다고 보면 돼.  




승려가 자기 화났다고 살계를 연다 어쩐다는

사실 대승불교의 개차법을 인정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지. ㅋ  

자기 화났다는 것이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열 만한 근거가 될 수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