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천(刑天)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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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강의 본류는 요동쳤다. 큰 함선이 뒤집어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지류에서 나룻배만 타던 영으로써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흔들림이었다. 선실에 빼곡히 들어찬 촌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관계로 다들 이대로 물귀신이 되는 건 아닌가싶어 잔뜩 긴장했다. 신음소리가 무거운 공기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누군가 멀미에 구토를 쏟아냈고, 얼마 뒤엔 역겨운 쉰내가 선실을 가득 메웠다. 모를 욕설들과 함께 웅성거림이 커질 무렵, 계단을 타고 내려온 장교가 꽹과리를 치며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다. 군율(軍律)에 따라 물고기밥으로 내던져지기 싫으면 입들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사실 영이 견디기 힘들었던 건 구토보다는 겨드랑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한 암내들이었지만, 어쨌든, 혓바닥을 앞니에 붙였다.
선실에 가만히 처박혀있는 동안 무슨 말이라도 하게 됐으므로, 이미 전쟁경험이 있는 병졸들 중심으로 이런저런 말말들이 풀어졌다. 들리는 말엔 본류를 따라 영강의 하류에 닿을 때까지 항해가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건 열흘도 넘는 거리라고 했다. 하류에서 내린 뒤에도 순의 도성까지는 일주일을 더 행군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근 한 달을 꼬박 전장으로 이동하기만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불평이 나오기도 전에 고참병 하나가 이건 차라리 잘된 경우라고 했다.
—순나라엔 거병할 해군이 없다고. 그러니까 뱃길에선 습격당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야. 육로로만 행군하다가 협곡 같은 데서 매복이라도 만나는 날엔……. 이렇게들 노가리나 까면서 전장까지 가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너희들은 모를 거다.
영이 고개를 들어 고참병의 얼굴을 확인하니, 그는 승선하기 전에 잠깐 만났던 주걱턱이었다. 그 옆으로는 친우처럼 보이는 짙은 눈썹도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영도 근처로 가서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으니, 주걱턱은 이미 네 차례나 크고 작은 전쟁터에 나가본 경험자였다. 그게 웃통을 벗고 등에 난 큼직한 칼자국을 보여줬을 때는 촌뜨기들이 탄성을 내질렀을 정도였다. 그가 다시 옷을 걸친 뒤엔,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한 무용담 몇 마디가 이어졌다. 촌놈들은 숨죽이고 이야기를 따라갔고, 각자의 상상 속에서 가슴을 졸였다.
이때 영은 그렇게 생사를 넘나들었는데도 왜 제대로 된 갑옷은 고사하고, 넝마 같은 옷을 걸친 채 졸(卒)들이나 머무는 선실에 박혀있는 건지 묻고 싶어졌지만, 끝내 그 질문은 몸 안 깊숙이 밀어 넣어버렸다. 이미 답은 눈앞에 있었다. 남은 건 받아들이기 싫은 자신의 마음이었고, 이건 주걱턱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게 영만은 아니었기에, 앳돼 보이는 소년하가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직접적으로 물어서 진실을 듣기엔, 어딘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의 우회로였다.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으로 금박 씌워진 보검(寶劍)이랑 아리따운 귀족네 여식을…….
하지만 그 말이 끝맺음되기도 전에 주걱턱이 말을 잘랐다.
—헛소리. 도성이 함락돼도 알짜배기들은 모두 귀족들의 차지야. 우리 같은 병졸들이 몸값 나가는 귀부인부터 무희들까지, 손이나 하나 까딱할 수 있을 것 같아? 욱 하는 마음에 건드렸다가는, 아군이고 나발이고, 그 순간 모가지가…….
—그럼 우리는 뭘 가집니까?
소년의 옆에 앉아있던 말라깽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어왔고, 이에 주걱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민가(民家)로 달려가야지. 기와집들로는 기병놈들이 먼저 차지하려고 들 테니까 힘들 거고, 노예를 잡아본들 나중엔 대장군한테 죄다 붙들려 뺏길 테니까, 우리들은 우리 같은 놈들이 구들장에 숨겨놓는 혼인패물이나 말끔해 보이는 옷감을 취해야해. 최대한 바지춤에 쑤셔놓고 다시 돌아오는 거지. 알간?
이에 대한 대답은 침묵이었다. 영의 콧구멍으로는 새삼스럽게 옆칸의 간이마구간에서 연신 말굽을 찍어대는 군마(軍馬)의 말똥냄새, 그리고 타지방의 모를 강 비린내가 섞인 악취가 스몄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징발관은 본류에서부터는 아예 따라오지도 않았었다.
*
뱃길은 길었다. 통성명과 이런저런 고향얘기를 하고도, 시간은 한참 더 남았다. 처음 나루터에서 집결해서 전장으로 갈 때는 흥미진진한 모험길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들떴었지만, 흔들리는 선실에 짐짝처럼 박힌 채로 몇날며칠을 시달리다보니 아무런 의욕도 들지 않게 됐다. 심지어 군량으로 배급되는 기장 낱알들은 고향의 것과 달라서 한동안 식체(食滯)에 시달려야만 했다. 제대로 된 냉수한사발도 구할 수 없는 선실에서 매실주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엎어진 똥통으로 구더기가 들끓었다.
속이 울렁거릴수록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만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그때마다 지루하도록 피혁들을 옮기던 나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어보려고 해도, 어느 순간 익숙한 강나루의 풍경들이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간 안면을 튼 짙은 눈썹이 옆에서 이르길, 헛구역질을 계속하면 그렇게 헛것을 보게 되는 거라면서 억지로라도 기장을 먹어야만 한다고 다그쳤다. 영은 목구멍의 끓는 가래들 사이로 낱알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가만히 팔베개를 하고 누운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건 물살이 부딪히는 철썩거림과 이따금씩 풀어내는 주걱턱의 말말들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어떤 냄새’에 대한 증언이었다.
—뭐가 제일 끔찍한 줄 알아? 바로 냄새야. 적군의 화살 유효거리 내에서 죽은 시체들은 수습할 수가 없거든. 그런데 이건 수성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라서 기습 때문에 함부로 성문을 열 수 없어……. 그러면 그 사이에 있는 시체들은? 계속, 계속, 계속 그 자리에서 썩는 거야. 전장으로 갈 때마다 온몸에 썩어서 문드러진 물고기 비린내가 잔뜩 배여서 돌아오게 되는데, 얼마 뒤엔, 숙영지에서도 온통 그 냄새뿐인 게 되지. 시체들로 역병이 돌기 직전이 돼서야 꾸역꾸역 기름을 끼얹어 태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고기 굽는 냄새랑 비린내가 섞이면서 한층 더 괴기한 냄새가 나게 돼. 그런데, 진짜 비참한 게 뭔 줄 알아?
잠시간 숨죽이던 주걱턱은, 이윽고 이렇게 끝맺음했다.
—빌어먹을 직(稷)이나 보리알만 주구장창 씹어대다 보면, 그 고기냄새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는 거야.
(계속)
(추신)
네이버웹소설이랑 조아라에 올라온 무협작품 몇 개 훑었는데, 굉장히 호흡이 빠르더라고요(특히나 신화적이거나 마법적인 거 사용하는데 정말 거침없는 듯). 그래서 이 글이 고리타분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무협갤러리 연배가 좀 있는 듯하니, 두어 명은 재미나게 보지 않을까……. 다음 편은 내일이나 모레 올릴 게요. 금요일 술자리 재미나게 보내세요(저는 파전집으로).
재밌다 - dc App
호롤롤로/ 감사합니다.
재미있어.
중간에 썰이란 단어는 왜쓰신건지.. 그것만 빼면 괜찮네요
魔法使いの夜/ 읽어보니 조금 생소한 어휘네요. "말말"로 바꾸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