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천(刑天)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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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동대를 이끄는 중랑장이 부여받은 임무는 탈영병들을 척살하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북방에서 불러들인 유목부족들 중에 마음대로 회군을 결정한 자들의 수급을 가져오란 것이었다. 대장군은 모름지기 군율이란 지엄하기에 율(律)이라고 했다. 그들은 단순한 탈영병들이 아니기에 대장군이 따로 내어준 기병대의 규모는 컸다. 거의 200여명을 지휘하는 낭장(郎將)급이었다.
온화한 남방기후답게 머리 위로는 청명한 하늘이 펼쳐졌고, 이름 모를 들꽃들로 가득한 평원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평활한 광경과는 달리 말굽엔 힘이 모자랐다. 강하를 건너오느라 꽤나 시달렸던 모양인지 군마들은 제속도를 내지 못하며 느릿느릿했고, 고삐를 당길 때마다 뱃살로 진저리를 치는 게 느껴졌다. 결국 평원을 절반도 건너지 못한 채 멈춰서야만 했다. 헐떡거리던 누런 수말 하나가 거품 가득한 침을 내뱉었다. 중랑장은 능선 너머를 바라보며 지금도 달리고 있을 오랑캐들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꽉 다문 어금니로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중랑장은 조바심 때문에 말을 망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말을 쓰다듬으며 나머지 별동대들에게도 말들이 좀 더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명령했다. 잠시 뒤, 말들은 주변의 들풀들을 뜯으며 띄엄띄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휴식 동안 기병 하나가 중랑장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찌하여 도성으로 향하지 않고 오랑캐들을 정리하러 가느냐는 물음이었다. 칼집을 만지작거리던 중랑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쪽에서의 전쟁은 이미 끝났다. 처음부터 순(順) 같은 소국이 견뎌낼 군세가 아니었으니, 우리 같은 제2군이 간다고 해서 세울 전공 따위는 남아있지 않아.
—그럼 뭣하러 조정에선 제2군을 편성해서 보내게 한 것이옵니까? 징병한 촌뜨기들은 창하나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놈들이던데…….
반문에 잠시 멈칫한 중랑장은 말없이 평원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무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을 따름이었다.
—윗분들의 뜻을 어찌 알겠나? 우리는 그저 명령에 따르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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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하는 길은 힘들고도 권태로웠다. 강바람의 땅에서 살았던 촌뜨기들은 남방의 평원에 적응하기 어려워했고, 날씨가 쾌청할지언정 걸을 때마다 지쳐갔다. 엷은 가죽을 덧댄 게 전부인 신발은 금방 해져갔다. 애당초 이렇게나 오랫동안 걷기위해 엮인 끄나풀들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따금씩 행군이 멈출 때마다 넝마를 뜯어 발바닥에 동여매야만 했다. 영에게 한 가지 다행이었던 건, 그의 신은 질긴 피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발가락 사이에 잡히는 물집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함선에 있을 때 들었던 전쟁의 실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병졸들 사이에서 모험 운운하는 소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초봄의 꽃샘추위가 평원 전체를 흔들었기에, 또한 이곳은 산간지방과 달리 바람피할 곳 하나 없는 평원이었기에, 병졸들은 불어온 찬바람을 온몸을 맞아야만 했다. 신발이 벗겨진 졸(卒)들 사이에서는 발가락에 동상이라도 걸릴 것 같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엔 짙은 눈썹도 있었는데, 이에 주걱턱이 자신의 두건을 벗어 눈썹의 발을 동여매주며 말했다.
—지금은 최대한 버텨봐. 전장에 도착하면 시체가 널렸어. 거기서 쓸만한 신발이나 망토를 벗겨내면 돼.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영은 떠나오기 전에 있었던 나루터를 떠올렸다. 이따금씩 사냥한 고라니를 통째로 짊어 매고 내려오는 사냥꾼들 때문에, 그는 고라니 시체에 칼을 넣어서 가죽을 벗겨내야만 했다. 시체에서 옷가지를 벗겨내는 일은 그와 비슷할 것처럼 보였다.
영은 손등에 입김을 불어가며 말했다.
—이틀 전에 하류에 닿을 때, 백기도 넘는 군마들이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게 신경 쓰입니다. 왜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말을 달린 건지…….
이에 주걱턱이 흐트러진 상투끈을 다시 묶으며 대꾸했다.
—패잔병이라도 사냥하는 모양이지.
—순(順)의 병사들은 이미 자기네들 도성에 포위당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쪽 탈영병들의 수급을 가지러 간 걸 수도 있고.
곧장 이어진 주걱턱의 대답에 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윽고 미심쩍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반문했다.
—회전에서 순의 정예병도 격파했고, 그쪽네 도성도 함락직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승전이 코앞인데 누가 탈영을 합니까?
이때도 주걱턱은 곧바로 대답하려고 했지만, 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벌렸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리고는 상투를 만지던 손을 허리춤으로 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침묵 속에 깜박이는 그의 눈동자 속으론, 일전에 참전했다던 전쟁터의 기억들이 명멸했다. 영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킬 때쯤, 주걱턱이 바닥에 가래를 뱉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돼. 적어도 졸(卒)한테는 말이야, 탈주할 때 전쟁의 승패 같은 건 별의미가 없거든. 그 전쟁에 승리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운명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걸 알고서 눈앞의 시체더미를 보면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생각에 몇 번 반복되다보면, 어느 순간 야밤에 목책을 넘어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이제 좀 이해가 되려나?
(계속)
(추신)
이쯤 읽었으면 곧장 병장기가 부딪히는 긴박한 전투를 기대한 분들은, 다소간 실망할 듯합니다. 전투장면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오나, 제가 담아내고픈 부분이 전쟁이 아니라서 그런 듯하네요. 저는 무(武)보다는 협(俠)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하는 사람이라, 으흠, 여하간 몇 안 되는 독자분들이 너무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주셨으면 하는 무책임한 마음입니다. 다음편은 늦은 저녁이나 내일 올리겠습니다.
좋음. 추천.
재미만 있구만
필력 좋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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