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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천(刑天)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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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장군영으로는 마른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상장군은 그 건조함에서 가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보릿고개가 가팔라진다면 입하(立夏)까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 짐작됐다. 게다가 그 이후부터는 농번기였기 때문에 가급적 전쟁을 피해야만 하기도 했다. 스무 개로 나뉜 제2군이 쉴 틈 없이 교대해가며 순성을 두드리는 동안, 상장군의 시선은 논두렁에 가있었다. 승상 계(谿)의 말대로 이 전쟁에 월()군이 개입되어있고 또한 오나라가 그 길을 빌려줬다면, 필시 전쟁은 길어질 터였다.


싸움터에서는 12군까지 순성으로 달려갈 무렵, 장군영으로 서너 명의 군사들이 달려왔다. 상장군은 그들이 전날 순성 너머로 보냈던 정찰대들임을 대번에 알아봤다. 보내기로는 열기를 보냈었는데 돌아온 건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옆에서 같이 전장을 관망하던 대장군이 상장군과 군사들의 얼굴을 돌아가며 곁눈질했다. 이에 상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남방으로 보냈던 척후들이오. 떠난 지 두어 달이 넘어서 죽은 줄로만 알았거늘.


생환할 줄 알았다면 공격을 더 늦추었을 터온데…….


대장군이 순성을 내려다보며 푸념처럼 덧붙였다. 수성군 측에서 밑바닥으로 내던지는 불붙은 볏단과 펄펄 끓는 기름들 때문에 순성 주변으로는 검은 연기들이 잔뜩 둘러지고 있었다. 반쯤 무너진 성루에도 끊임없이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따라서 화공(火工)을 바라보던 상장군이 시선을 도로 귀환한 군사에게 돌리며 이렇게 대꾸했다.


뉘가 앞날을 알 수 있겠소?


돌아온 정찰대의 표정은 기진맥진했다. 햇볕에 잔뜩 그을린 얼굴하며 굶주림으로 패인 볼이 얼굴의 절반을 내려앉히고 있었다. 긴급을 요하는 사안이었기에 미처 용모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달려온 듯 보였다. 군사는 경례를 마치자마자 보고했다.


전날 일러주셨던 것처럼, 대곡(大谷)산맥으로 월군이 진군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재작년부터 나눠서 행군이 진행된 듯합니다.


역시나 이 전쟁이 갑작스러웠던 건 우리뿐이었군.


상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사가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이어서 말했다.


헌데 산맥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행군의 흔적이 지워져있었습니다. 산에 매복을 하고 있는가싶어 주변을 수색하가다가, 놈들이 만든 것 같은 산채(山砦)를 발견하는데 까지는 성공했다옵니다만…….


군사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를 덮은 갑주부분에 화살을 뽑아낸 듯한 자국이 보였다. 상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내걸린 지도를 바라봤다. 대곡산맥이 끝나는 지점으로부터 순성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대장군이 입술을 뗐다.


행군의 흔적이 없다면 이쪽으로 왔을 리도 없겠구려. 하지만 산채에만 머물러있다가는 순()은 끝이오. 필시 어딘가에는 있을 터.


허나 산맥을 벗어나 순성으로 왔다면,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걸리지 않았을 리 없소. 하지만 순성이 넣어둔 첩자들 중 단 한명도 월군에 대한 보고를 올리지 못했지……. 참으로 괴이하구려.


따라서 지도를 바라보던 대장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산채에서부터 순성까지 땅굴을 팠을 수도 있소.


수백여 리에 이르는 땅굴을? 납득하기 어렵소이다.


상장군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대장군도 더 이상 그 가설을 변호하려들지 않았다. 몇 십리의 땅굴을 파는데도 만만치 않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데, 대군이 전부 지나갈 만큼의 거대한 통로를 굴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국경을 넘어온 월군은 죄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상장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장군영으로 부관이 달려와, 방금 순성의 성문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상장군이 시선을 순성으로 돌렸다. 성벽을 골고루 두드리던 병력들이 일제히 성문으로 집중되는 형세였고, 몇몇 성곽엔 이미 제군의 깃발이 꽂혀있기까지 했다.


곧장 부관이 물어왔다.


2군을 전부 진격시킬까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순성을 바라보던 상장군이, 이윽고 물었다.


지금 공격조가 몇 번대지?


지금 공격 중인 건 16-20군입니다. 8-15군은 전투휴식 중이고, 공격대기 중인 건 1-7군입니다.


이에 상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좋아, 지금 공격중인 군들만 성 안으로 진입시킨다. 나머지 제2군은 대기하고, 추후 명령을 기다리도록.


*


영은 떠밀리듯 성문으로 보내졌다. 사방에서 불꽃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고, 자욱한 연기들 때문에 기침에 터져 나왔다. 콧물을 닦은 손등에서는 검댕이 잔뜩 묻어나왔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격노의 광기가 모든 걸 뒤덮으려고 하고 있었다. 흥분이 전부였고, 그래서 더 이상 장수들의 명령은 닿지 않게 돼버렸다. 게다가 그쯤해서 장수들이 내린 명령도 들어가서 모조리 죽여라!”뿐이기도 했다. 물론, 그건 구태여 내리지 않아도 될 명령이었지만…….


수천여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박살난 성문 앞에서 오히려 정체됐다. 충차의 쇠망치가 짓이겨 놓은 성문의 잔해들이 밖으로 끄집어내졌다. 성문으로는 지독한 냄새로 가득했는데, 불화살에 타지 않기 위해 발라놓은 똥오줌들 때문이었다. 여기에 온갖 그을림과 시체가 쏟아낸 오물들의 역한 냄새가 겹치면서 지옥의 향기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 코를 가져가도 맡아지는 건 죽음뿐이었다.


눈깔이 뒤집어진 촌뜨기들이 성문으로 연결된 충차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영도 그들 중 하나였다. 허나, 충차 앞에서 그의 어깨를 붙잡는 이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 주걱턱이었다. 그는 영을 끌어안으며 귓속말을 했다.


먼저 들어가지마. 들어가려는 척만 해. 옆에, 옆에 있으라고.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영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놀랍게도 멀찍이서 관망하고 있을 뿐인 대기군들이 있었다. 성문이 함락됐는데 나머지 군들은 어째서 도우러오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제1군에 있던 정예 궁기병들은 아예 출전하지도 않았었다. 분명 순성은 함락 직전인데 왜 가만히 내버려만 뒀을까…….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던 부분들이 지옥의 한가운데 서 있잖니 더욱 뚜렷해졌다.


주걱턱의 옆에서 양날도끼를 들고 서있던 짙은 눈썹이 말했다.


빌어먹을, 뭔가 이상해……. 그러니까 최대한 늦게 들어가자고. 어차피 먼저 들어간다고 해서 병졸한테 주는 공훈 같은 것도 없으니까.


(계속)



(추신)

30화로 재조정됐습니다(단편이 아니라 중편이 됐네요). 확실히 요즘 호흡은 아니지만, 으흠 뭐, 옛날 호흡법을 아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그 오래된 몇몇을 위해 적고자합니다.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