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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천(刑天)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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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하인들이 피어놓은 향불 냄새가 방안에 그윽해졌다. 멀리서 타종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방안으로 켜지는 호롱불을 힐끔거리며 하품을 했고, 집무실 안으로는 승상 계(谿)가 머리에 쓴 관()을 벗고 있었다. 길쭉하게 주름진 얼굴로 그어진 눈매도 가늘었다. 탁자에 놓인 열국의 지도 위로는 군()을 표시한 장기짝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계는 뒷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순() 주변을 유심히 뜯어봤다.


대국인 오()와 제() 사이에는 완충지대처럼 순()나라가 있었다. 헌데 지금 오나라는 남쪽에선 구()나라와 전쟁 중이었고, 그 옆에 위치한 월()나라가 순나라로 원군을 보낼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 형국이었다. 물론 이는 월나라가 자신네들의 원수인 구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는 오나라의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란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중소국에 불과한 구나라는 어째서 대국인 오()를 공격했던 말인가? 필시 구왕도 오왕을 고립시킬 계책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연횡책일까? 그렇지 않았다. 연횡책이라면 오왕을 필두로 구((() 3국이 연합하며 제()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난전의 형국이었다. 일찍이 유례가 없는 혼란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닌 월왕이 순나라로 지원군을 보낸 것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심은 계속해서 깊어갔고, 나중엔 밖으로 별빛을 머금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이르렀다. 하인에게 시간을 물으니 술시(戌時)라고 답해왔다. 답답했던 건 제왕도 마찬가지였을까? 그쯤해서 궁궐에서 나온 내시가 방문을 두드리며 제왕께서 이쪽으로 행차 중이라고 일러왔다. 계는 머리에 다시 관을 써야만 했다.


얼마 뒤 근위병들이 먼저 도착해서 방문 앞에 정렬했고, 그 사이로 제왕이 걸어 들어왔다. 의관을 푼 편안한 복장이었다. 편전에 누워 있다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해, 망건만 다시 두르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빛에선 불안보다는 들끓는 흥분의 일렁거림이 읽혔다. 젊은 제왕의 호기를 억누르는 건 승상 계의 주된 업무이자, 선왕이 몇 번이고 강조한 유언이기도 했다.


계는 예()를 차리며 인사했고, 제왕은 그의 옆으로 놓인 열국의 지도를 보고는, 곧바로 물어왔다.


지금쯤 순성에서 월놈들과 만났겠군. 어찌됐으리라 보는가?


상장군이 알아서 처신했을 것이옵니다. 그를 믿으소서.


상장군을 믿지 않는 건 아니나, 혼란한 시국에 답답하기 그지없구먼. 내가 직접 전장에 나가야만 했거늘.


이에 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왕께서 조정을 비우면 나라가 불안정하게 되옵니다. 중심이 남으로 치우치면 동서북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머무르는 건 옳은 선택이옵니다.


내가 그 대답을 모르는 건 아니오.


제왕이 한숨을 내쉬며 애써 지도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봤다. 뒷짐을 진 채로 한참 그렇게 서있던 제왕은,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천문관이 작년 여름에 흉성(凶星)이 북두칠성 사이를 지나갔다고 했었지. 다음해에 분명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 했던가?


이에 계가 긴 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지 하늘의 일이 아니옵니다. 부디 개의치마소서.


허나 일이 이렇게 되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게 됐구려.


제왕의 말에 계는 시선을 내렸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국에 뿌려놓은 첩자들로부터 온갖 정보들이 몰려드는 판국이었다. 계는 스승을 따라 사숙하던 시절부터 하늘의 일과 인세(人世)는 별개라는 걸 머리에 인이 박히도록 배워왔던 터라, 점성술이란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들었었다. 물론 주군인 제왕 역시도 그런 인물인지라 그 밑에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저 기상의 우연이 얄궂을 따름이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제왕이 먼저 입술을 뗐다.


듣자하니 황검(黃劍)들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미처 사병을 혁파하지 못한 남방의 미개한 일일뿐입니다. 깊이 고려할 일이 못되옵니다.


계는 곧바로 일축했지만, 제왕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도 시국이 답답하니, 별의별말들이 다 나도는구려…….


(계속)



(추신)

으흠, 오늘 좀 짧죠? 65535자가 넘어서 뒷내용을 올릴 수가 없네요(승상 계/중랑장 이렇게 2편이었는데, 이게 분량을 오버해버리네). 디시가 긴 글을 적을 수 없는 시스템인지라……. 다음편에서 중랑장 앞이나 뒤로 영의 전투씬 첨부해서 분량 확보해야겠군요. 다음편은 내일 곧바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