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천(刑天)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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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의 깃발들을 모조리 내려가면서 거뭇한 철갑병들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대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푸르스름한 월(泧)의 깃발이 꽂혀서 펄럭이기 시작했다. 장군영으로 부관이 달려와 전황을 보고했고, 상장군은 그 말을 천천히 들은 뒤엔, 그저 계속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부관이 돌아간 뒤에 상장군이 대장군을 보며 말했다.
—역시나 매복이었군. 저기로 우리 궁기병들이 들어갔다가 성문이 닫혔으면, 그리고 남방에서 제(霽)정예군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북방 국경까지 닿았다가는, 당장에 점령지에서 반란이 벌어졌을 거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찔한 반나절이었구려.
—도대체 월병놈들이 어떻게 순성 안에 잠입하고 있었던 거요?
대장군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이에 상장군이 줄 수 있는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현실 속에서 그 다음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불어온 삭풍에 입가가 말랐다.
이윽고 대장군이 다시 입술을 떼며 말했다.
—정말로 월나라놈들이 우리를 치려고 했다니, 이로써 대대손손 남벌(南伐) 명분은 명확히 섰구먼……. 헌데, 지금 저 안에서 고립된 제2군은 어찌할 요량이요?
—이미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소.
—어째서 지금 구하러가지 않소이까? 내부에 분란이 있으면 군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을 터, 지금이 공격의 적기요.
대장군이 곧바로 쏘아붙이고는 참으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상장군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순성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처럼 “공격의 적기라……”라며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
제(霽)편전의 높다란 천장으로 외풍이 불어와 붕붕 울려댔다. 북방엔 이렇다 할 염료가 전해지지 않아 궁궐 전체가 삭막해보였다. 바람에 색감이 없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은 고원의 바람과도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런 지붕의 밑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도, 겨우 색감이 들러붙어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줬다. 왕가와 정치에서는 서로의 속내를 감추는 게 기본이라고 가르쳐왔다는 걸 고려해본다면, 색감 아닌 색감으로서의 무색은 아주 정치적인 색깔이었다. 그렇다면 정치는 바람과도 같은가? 제왕과 독대한 승상 계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에는 무역선을 밀어주는 순풍이었지만, 어떤 때엔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거센 살풍(殺風)이었다.
계의 말을 끝까지 들은 제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래서 왕좌에서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까지 되물었다.
—순(順)과 화친을 한다라?
—그렇사옵니다.
—어째서?
왕의 물음은 급했고, 승상의 대답은 차분했다. 그리고 그 비례는 고전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계는 무색의 말투로 아뢰었다.
—어차피 우리는 북방점령지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부족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케 하여 순(順)정벌에서 공훈을 세우게 한다면, 우리로써도 그들에게 봉토를 줄 명분을 갖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내부에 자리를 갖게 된다는 건, 삭족(獡族)들에게 자신네들이 겉절이가 아니라 정말로 제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확약과도 같은 것……. 같은 전장에서 피를 뿌림으로써 혈맹(血盟)이 되는 원리이옵니다. 승전보가 이미 조정에 당도한 바, 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건 짐도 이미 알고 있는 바, 북방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동원한 북방오랑캐들로 우리네 정예병의 전력을 유지시킨다는 원래 비책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로부터 순(順)과의 화친이 약조가 도출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계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순(順)에서는 사로잡은 우리 제2군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을 석방해주는 조건으로 화친을 요청할 터, 제왕께서 이를 받아들이시면 그걸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옵니다.
—처음부터 화친할 구실을 주고자 제2군을 보냈나?
제왕의 목소리엔 자못 노여움이 섞여있었다. 계는 고개를 숙이며 침묵했고, 제왕은 조아린 승상의 정수리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필시 처음부터 화친 얘기를 했다면 야인(野人)들을 모아 제2군을 조직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터, 승상의 함구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리고 제왕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분노가 끓었다. 본인을 머리꼭대기에서 내다보면서까지 자신을 뜻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저 노신(老臣)의 저력이, 자신으로 하여금 모종의 두려움마저 갖게 했기 때문이었다. 떨림은 절대성의 조건일 수 없었다. 저런 자가 속으로 반란이라도 기도한다면 어찌되는가? 중대사는 승상과 논의한 뒤에 판단하라는 선왕의 유언은 지켜질 수 없고, 또한 지켜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시간이 필요해지리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젊은 제왕은 미간의 주름을 평평하게 피면서 순간적인 노한 기색을 감춰버렸다. 왕관의 발들 밑으로 내리깔린 그늘 속으로 표정을 집어넣었다.
제왕이 다시 입술을 뗐고,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순공이 화친에 응하리라 어떻게 장담하지?
—전쟁을 계속한다면 순나라는 필히 망하게 되기 때문이옵니다. 월나라에서 군대를 보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월나라는 타국이옵니다. 그래서 그 용맹과 절박함이 자국민으로 이뤄진 군대에 미치지 못하오며, 전황이 불리해지면 더 이상 싸움에 나가려고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설령 전쟁에서 승리한다손 쳐도, 그리되며 순병이 궤멸된 마당에 월(泧)에 의해 정국이 주도될 게 뻔히 예상되는 바, 이는 나라를 병탄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계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군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 신하를 다루는 술수(術數)의 요체였지만, 제왕에게 이를 가르친 게 곧 승상 계이기도 했다. 계는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로 말을 이었다.
—제나라가 있어야만 월나라로부터 필요해지고, 동시에 월나라가 있어야만 제나라로부터 필요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필요가 곧 권력을 구성하는 바, 순공이 고를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사실한 유일한 선택지는 중간에 있는 것이옵니다. 대국의 사이에 놓인 소국은 저울이 무너지면 자신들 또한 무너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곧 중용(中庸), 소국의 권력은 평형으로부터만 나오는 이치입니다. 순공은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순공이, 왜 처음부터 이런 전쟁을 일으켰단 말인가? 갑자기 사리분별을 못하게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허나, 순공에게 노망은 아직 이른 일일 터.
—아직 정확한 전모가 밝혀진 것은 아니옵니다만, 예상컨대 제나라의 북방국경이 불안정하기에 지금 연합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필히 영토를 넓힐 수 있으리라 누군가가 꾀했기 때문이라 짐작되옵니다.
—그렇다면 그 자가 순의 볼모를 죽였다고 보나?
—그렇사옵니다.
한 치의 막힘없이 오간 대화가 끝났을 때, 편전으로는 침묵이 감돌았다. 여전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계는 전쟁의 촉매가 됐던 볼모왕자의 살해사건을 떠올렸다. 어차피 전쟁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만들어냈을 터이지만, 전쟁명분으로 쓰기엔 너무도 조잡스러웠다. 볼모로 보내졌던 것만큼 왕위계승에 가까운 왕자도 아니었고, 게다가 살해의 혐의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서 섣불리 제나라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제나라가 뭣하러 순나라의 볼모를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순공은 이를 빌미로 남방국경을 급습해버렸다. 이 전쟁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잠시 뒤, 제왕이 주먹으로 왕좌를 가볍게 툭툭 치며 침묵을 깼다. 계는 천천히 조아린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제왕은 무표정한 눈짓으로 이렇게 말했다.
분량이 많아서 짤렸네요. 뒷내용은 댓글로 첨부하겠습니다.
“내, 승상의 깊은 생각은 잘 알겠으나, 그렇게 대들고도 어물쩍 넘어간다면, 다른 나라들 앞에서 제국의 위신이 서겠는가? 고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리고는 승상이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로 못 박았다. “감히 전란을 일으킨 순(順)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제국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계기로 삼겠다.” (계속)
(추신) 원래 목-금 중에 올리기로 했는데, 환절기 감기로 금요일 누워있는 바람에 토요일 올리게 됐습니다(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화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반전(?)이고 싶은 화였습니다. 무협지에 정략적인 부분이 얼마나 가미되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에 애착이 있어서리. 다음 화는 일요일이나 월요일 즈음 올리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잘 읽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은은한 분위기 좋네
ㅇㅇ(115.137)/ 감사합니다. 님도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걔가 참 독합니다
ㅇㅇ(61.253)/ 감사해요. 그런데 처음 듣는 칭찬이긴 합니다. 은은함이라
건강 잘 챙기고 페이스 유지하며 잘 마무리하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