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밤이 너무 깊어서 그런지 잠이 쏟아지는군. 나는 이만 자러가야겠소."


그의 몸은 어둠 속을 향해 사라졌다.


그때였다. 막 사라지려던 고준의 앞을 한 인영이 가로막았다.


"누구요?"


고준은 동방욱과 일전을 치루면서 누군가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기에 갑자기 나타난 인영에 긴장하며 한편으론 남은 독기를 끌어모았다.


인영은 잠시 고준을 지켜보다가 대답했다.


"저승사자."


어둠 속에 가려져 있어 생김새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인영의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은 가히 심상치 않은 것이라 고준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고준은 압박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절대고수다! 이 정도 기세라니 당주를 보는 것 같구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고준은 상대의 대답에 친근히 너털웃음을 지으며 동시에 기색을 살폈다. 정체를 알아야 대응을 할텐데 내심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허허, 저승사자라니 그거 무섭구려. 제가 식견이 어두워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오. 혹시 귀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고준은 끝까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인영의 정체는 바로 진산월이었다. 그 둘은 면식도 없었을 뿐더러, 어두운 곳에서는 설령 면식이 있더라도 더욱 진산월을 알아볼리가 만무했다. 하물며 서장 출신인 고준은 행색 만으로도 중원의 고수를 알아보기 어려웠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진산월은 고준의 질문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허리춤에 걸린 검집에 손을 얹었다.


"이 길은 통행금지다. 다른 길로 가라."


"아, 알겠소. 뒤로 돌아가리다. 그러면 되겠소이까?"


"안돼."


그 순간 진산월의 검이 번뜩였다. 장내의 그 누구도 진산월이 검을 뽑는 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엄청난 속도의 쾌검은 바로 낙하구구검의 최절초 자하천래(紫霞天來)였다.


고준은 진산월의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혀 대답할 말을 생각하다가 반응도 못한채 순식간에 양 옆으로 갈라지며 허물어졌다. 진산월의 자하천래가 정확히 고준의 정수리를 기준으로 신체를 절반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서장제일독으로 위명을 떨치던 만독곡주의 최후 치고는 허망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피바다에 누워있는 고준의 시체를 흘깃보고 다시 중인들을 보며 내뱉었다.


"쾌의당의 졸개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저승뿐이다."


중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그 중에서도 갈의청년은 놀라움은 한층 더한 것이었다.


'이 내가 눈으로 제대로 쫓지 못할 정도의 쾌검이라니…… 게다가 내가 익힌 탈혼검 같은 전문적인 쾌검 초식도 아닌 것 같은데 어찌 이런 속도가……'


진산월은 쾌의당의 수하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사실 사사건건 종남파의 앞을 가로막고 방해한 그들을 살려둘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진산월은 바로 신목령과 쾌의당이 서로 싸워 서로 소모하는 것만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모두가 굳어있는 그때 먼저 움직인 것은 동방광일이었다.


"미친놈! 건방을 떠는구나!"


상대가 절대로 동방욱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동방광일은 시작부터 자신의 최고 절기를 선보였다. 그의 오른손이 회전하며 무서운 위력을 담고 있는 사방건원장(四方乾元掌)의 장력이 진산월을 향해 쏟아져나갔다.

동방광일도 생각이 있었다. 이 방법이 자신의 앞에 서있는 고수를 처치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상대가 공간을 장악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방건원장을 막아내는 사이에 봉구령이 혈섬일창의 절초로 상대의 후방을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거라는 계산이었다.


사방건원장의 장력이 진산월을 둘러싸고 압축해버릴 기세로 엄청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때였다.


진산월의 검이 움직이며 무수한 검영이 장내를 채우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영은 마치 구름이 피어나듯 뭉게뭉게 주변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반경 이십장의 범위로 온통 검의 소용돌이가 구름처럼 사방을 채워버리고 말았다.


속공으로 진산월을 꼼짝 못하게 봉쇄하려던 동방광일은 자신이 발출한 사방건원장의 장력이 검의 구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고 경악하고 말았다.


'이럴 순 없다!'


그 구름의 정체는 다름아닌 유운검법의 절초 중 하나인 운무중첩(雲霧重疊)이었다. 동방광일은 연이어 장력을 발출하며 검의 구름에 맞섰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장력은 무수한 검의 소용돌이에 그대로 흩어져버렸고, 동방광일은 삽시간에 구름에 휩싸이고 말았다.


"크아아악!"


구름은 피오른 기세만큼 다시 빠르게 걷혔다. 동방광일은 전신이 난자당한 채 피 웅덩이 한 가운데 쓰러져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방금 자신이 비웃은 동방욱의 시체 바로 옆에 싸늘하게 식어 누워있었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조카가 죽어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일각도 안되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황천길의 동무가 되고 만 것이었다. 동방가의 가주 답지 않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봉구령은 자신의 혈창을 꽉 쥐고 진산월을 바라 보고 있었다. 본래는 진산월을 기습할 생각이었지만, 검의 구름이 장내를 뒤덮으며 동방광일의 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고 뛰어들 틈을 놓치고 말았다. 그 구름에 뛰어들었다면 자신과 동방광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동방광일이 잠시라도 버텨줬으면 주저하지 않고 진산월의 등에 동방욱을 죽인 혈섬육창의 최절초 무섬(無閃)을 사용했겠으나, 지금은 정면으로 맞상대하는 것 말고는 수가 없었다.


봉구령은 긴장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동방욱에게 당한 가슴의 상처가 쑤셔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봉구령의 전신으로 열여섯개의 검광이 쏟아지며 전신을 난자했다. 봉구령은 진산월에 전신의 모든 집중력을 쏟고 있는 터라 미처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온 검광에 대응하지 못했다. 설령 미리 알았더라도 대응하기 어려운 속도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대체 누가 언제 검광을 발출한 것일까?


사실 진산월은 동방광일에게 운무중첩을 펼치면서 동시에 봉구령에게 시간차로 도달하도록 유운검봉(流雲劍峯)을 날린 것이었다. 이것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수법으로 운무중첩의 구름과 같은 검기에 유운검봉을 숨긴 채 발출하는 수법으로 기존의 종남파에는 없던 수법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검광이 호를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었겠으나, 장내의 당사자들은 미처 깨닫기 어려운 각도였다.


결과적으로 열여섯개의 검광이 아주 커다란 궤도로 곡선을 그리며 예상치 못한 낙차로 일점을 향해 도달했다. 이는 당금 중원을 통틀어 알아챌만한 고수가 하나나 둘도 없을만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히 신묘막측한 수법이었다.


진산월은 뻣뻣이 굳어있는 봉구령을 쳐다보며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한낱 유중악에게 패배한 개에게 유운 삼십이봉은 너무 아깝지."


봉구령은 전신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

.

.



갈의청년은 거친 숨을 내쉬며 경공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는 정체모를 검객의 흉험한 칼부림에 기가 질려 도저히 맞상대할 생각이 들지 않은 나머지 그대로 숲 속으로 뛰어든 참이었다.


갈의청년은 바로 방금 자신이 신목십이호가 몰래 도망칠 틈을 준 것을 기억하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같은 신세군.'


그때였다. 어두운 숲 속의 샛길을 거침없이 뛰어가던 갈의청년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앞에 길을 막고 있는 하나의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


그 형체의 정체는 전흠이었다. 그는 갈의청년이 도망칠 길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전흠은 이미 검을 뽑아든 채 웃고 있었다.


"역시 장문사형의 말이 옳았군. 쾌의당의 쥐새끼가 이 길로 도망칠 것이라고 하더니."


갈의청년은 이를 악물고 자신을 가로막은 전흠에게 탈혼검의 초식을 펼쳤다. 마도제일의 살인수법인 탈혼검! 그 중에서도 인후혈을 전문으로 노리는 측탈혼(側奪魂)이 펼쳐졌다.


전흠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장기인 성라검법으로 탈혼검에 맞서들어갔다. 빠르기로는 어떤 검법에도 못지 않은 성라검법의 절초 괴성척두(魁星剔頭)였다.


두 젊은 검객은 그대로 검을 들고 신속한 빠르기로 서로 교차했다.




잠시 후.


갈의청년과 전흠이 교차했던 숲 속의 길목에 하나의 인영이 도착했다. 바로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보더니 허리를 숙여 시체의 눈을 감겨주었다. 시체는 경악에 찬 나머지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었다.


인후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전흠의 눈을 감겨준 진산월은 천천히 독백했다.


"계획대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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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으로 진행되면 오늘 이렇게 진행 되어야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