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산은 《소오강호》의 주요 소재로, 위진시대 명사 혜강이 처형 직전 연주한 곡으로 유명한 거문고 음악이다. 혜강은 자신의 죽음보다도 이 곡을 이어 연주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슬퍼했는데, 김용은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소오강호》를 집필했다.


 《소오강호》의 주제는 혜강의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혜강의 사상은 “탕왕과 무왕은 틀렸고, 주공과 공자를 경멸한다. 명교를 떠나 자연을 따르자”(非汤武而薄周孔, 越名教而任自然)로 요약된다. 이중톈 선생은 이를, 유가적 규범으로 사대부를 통제하려 한 사마씨 정권에 대한 저항이라 평했다.


 유학에서는, 공자가 모범으로 삼은 주공이 ‘예(禮)’와 ‘악(樂)’을 통치 수단으로 삼았으며, 이 중 음악을 이용한 정치를 '악교(樂敎)'라 한다. 이에 대해 혜강은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에서 유가의 악교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본래 무관하며, 유가에서 말하듯 음악이 감정의 표현이거나 성정을 도야하고 풍속을 교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주장했다. 음악마저 통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혜강의 또 다른 글인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絕交書)」의 내용 또한 같은 맥락이다.


 “늦잠을 즐겨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호위병과 비서가 따라다니면 놀기 불편하다. 회의와 사무는 몸가짐이 단정해야 하기에 나와 맞지 않고, 공문서를 쓰고 읽는 것도 싫다. 혼례식과 장례식 같은 일에도 참여하고 싶지 않다. 속물들과 어울리기 싫고, 머리를 많이 쓰고 싶지도 않다.”


 이에 대해 이중톈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사실 혜강은 스스로를 단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 의지는 목숨보다 소중했다. 한 사람이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말도 못 하고, 집권자 앞에서 무조건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삶이 아니겠는가?”


《 소오강호》에는 이러한 혜강의 정신을 투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정풍, 곡양, 황종공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혜강처럼 음악을 사랑했고, 정사(正邪)의 구분이나 폭력에 의한 굴종을 거부하며 죽음을 택했다. 이는 혜강이 사마씨와 유교적 속박을 거부하며 죽음을 맞은 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혜강의 정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오강호》 속 권력자들, 정사와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강호인을 탄압하고 군림하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규화보전과 벽사검법에 부나비처럼 달려들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불완전한 괴물이 되어 스스로 몰락하고 만다.


 광릉산은 혜강과 함께 사라진 듯 보였지만, 곡양의 기지와 예술혼으로 다시 땅 위에 나타나 ‘소오강호지곡’으로 재탄생했다. 이는 혜강의 정신이 다시 깨어났음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관평호(管平湖) 선생이 광릉산을 복원한 데 대해 금일 선생이 남긴 찬사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서쪽 하늘에 아직 해가 지지 않았고, 광릉산은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았다.(虞渊未薄乎日暮, 广陵不绝于人间。)"



 덧. 1. 이중톈 선생 말은 이중톈 중국사 11 : 위진풍도》에서 인용했습니다. 

      2. 글 분위기를 깰까봐 본문에선 언급 안 했는데, 광릉산은 사실 혜강이 죽을 때 실전되지 않았습니다. 당나라 때까지 잘 보존되다가 이후 실전됐다고 해요. 이후 민간에서 떠도는 악보를 다시 수집하여 신기비보(神奇秘譜)란 악보집에 기록된 걸 관평호 선생이 복원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