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낙화무락(落花無樂)


죽림을 나서는 매종도의 발걸음은 소리조차 없었으나,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서려 있던 묵직한 안개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이는 단순한 기공의 발로가 아니었다. 본래 익혔던 육합귀진신공의 조화로움 위에 천양신공의 폭발적인 양기를 덧씌운 결과, 그의 몸 자체가 음과 양의 경계를 허문 무극(無極)의 신체로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근본은 육합에 있고, 마침내 무극에 닿았으니 육합무극신공(六合無極神功)이라 함이 마땅하구나."

마침내 태음신맥과 음양의 굴레를 넘어선 매종도의 신체는 이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찬란한 본모습을 감추고, 심심풀이로 창안한 천변만화공(千變萬化功)을 사용하여 근골을 깎고 피부를 덮어 세파에 찌든 평범한 노인의 얼굴로 종남산 기슭의 한 객잔에 들었다.

객잔 안은 시끄러운 무인들의 잡담으로 가득했다. 매종도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식은 차를 들이키며 귀를 기울였다. 마침 옆자리에서는 종남산 쪽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무인들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어쩌다 종남파가 저 꼴이 됐을꼬. 예전 같았으면 산문 근처에 발도 못 붙였을 텐데, 지금은 문지기들 기세조차 빠져 있더군.”

“말도 말게. 종남오선 시절엔 천하제일문의 위엄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 곽문휘(郭文輝) 장문인은 그 시절에 비하면 재능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 그저 현상 유지나 하면 다행인 수준이지.”

“장문인을 이었던 취선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0년이라지? 종남오선이 넷이나 한꺼번에 사라졌을 때부터 종남의 천운은 다한 게야.”

매종도의 찻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막내 하정의의 부고와 더불어, 천하를 호령하던 사문이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독설보다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매종도는 그길로 강호를 돌며 옛 인연들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오직 부고(訃告)와 절망적인 소문뿐이었다.

“용씨세가의 가주 용태린 어른요? 돌아가신 지가 벌써 십 년도 넘었습니다요.”

“혹시 곤륜파 장문인 종리표, 종대협의 소식도 아시오?”

“어르신 어디 산에라도 계셨습니까? 그 분도 얼마 전에 세상을 뜨시고 지금은 그분의 제자가 장문인이 되셨습지요.”

유일한 친우였던 태린과 표마저 곁에 없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정립병을 수소문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로 의심되는 혈삼객(血衫客)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별호와 그마저도 종적이 끊겼다는 소문뿐이었다.

‘당신마저 죽은 것인가......’

유일한 호적수도, 신뢰하던 장문사형도, 한때나마 연모했던 사매도, 늘 유쾌했던 막내도 없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었으나, 그 무공을 겨룰 상대도 보여줄 사람도 사라진 강호는 매종도에게 한낱 무덤과 같았다. 특히 정립병의 종적이 묘연해진 점으로 미루어 그가 이미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라 짐작한 매종도는 고개를 떨구었다.



화산의 죽림 모옥으로 돌아온 매종도는 보검을 벽에 걸었다. 천형을 벗어나 온전한 사내가 되었으나 안아줄 여인이 없고, 하늘에 닿은 무공을 가졌으나 싸울 상대가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고독한 영생뿐이었다.

“다 허망하구나. 이 검 끝에 무엇을 담으려 그토록 발버둥 쳤던가.”

무공에 대한 마지막 열정마저 식어버린 그는 더 이상 무학을 연구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언젠가 천운이 닿아 이 모옥을 찾아올 종남파의 후예를 위해 마지막 안배를 남겼다. 그는 모옥 안 탁자 위에 놓인 세 개의 작은 취와미인상(醉臥美人像)과 한 권의 비급을 챙겼다.

하나로 집대성했던 절대의 일초식은 너무도 방대하여 후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터였다. 매종도는 손가락 끝에 진기를 모아, 세 개의 조각상에 예전의 삼락검을 각각 관통한 형태인 초식들을 인체의 도해에 빗대어 심득의 형태로 하나씩 나누어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곁에 천양신공(天陽神功)의 구결이 담긴 비급을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비급의 말미에는 사문을 향한 마지막 배려이자 엄중한 경고가 담긴 문구 하나를 덧붙였다.

「이 무학은 종남의 법도와 무관한 나 개인의 도(道)일 뿐이다. 미오현도망수습(未悟玄道妄修習), 종득천하실자신(縱得天下失自身)이니 절대 가벼이 익히지 말지어다.」

이는 혹여 자신과 같이 태음신맥의 천형으로 고통받을 후인이 있을까 염려하여 남긴 자비의 흔적이었다. 동시에 사문의 제자가 아닌 자가 미인상과 비급을 손에 넣었을 경우, 이 결함을 가진 무공이 종남파와 무관함을 천명함으로써 사문에 닥칠 화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검선의 고뇌 어린 안배였다.

모옥을 나서는 매종도의 뇌리에 자신이 빚어낸 무명의 일검이 가만히 스쳐 지나갔다. 삼락(三落)의 락(落)은 본래 떨어짐을 뜻했으나, 어린 시절의 그에게 무공은 삶의 유일한 즐거운 락(樂)이기도 했다. 장로회의 인정을 받아 처음으로 삼락검에 입문한 그 날의 설레임, 대나무 숲을 가르며 들리던 청아한 검명, 그리고 일초식을 완성할 때마다 가슴을 채우던 순수한 희열이 그의 무도(武道)를 지탱하는 전부였다. 삼락검을 수련하며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꼈고, 검 끝에 실리는 무게감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였다.

'낙화무락(落花無樂)...'

그러나 이제 일초식에 삼락(三落)을 모두 합쳤으나, 정작 천형을 벗어난 자신에게는 그 어떤 낙(樂)도 남아있지 않다는 서글픈 탄식이었다. 매종도는 모옥을 뒤로한 채 눈을 감았다. 화산의 대나무 숲에는 오직 처량한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화산의 죽림에 모든 유산을 남겨둔 채 다시금 모옥을 나선 매종도의 발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일흔의 노구에서 피어난 무극의 기운은 이제 신체의 구속을 완전히 벗어나, 그의 걸음마다 대지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었다. 신선조차 넘어서 무극의 경지에 닿은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천상의 비급이 있는 비경도, 고귀한 도관도 아니었다.

화산 자락 어느 계곡가. 한 노인이 갓 잡은 멧돼지 뒷다리를 모닥불에 굽고 있었다. 평생 소식(小食)과 벽곡단으로 연명하며 탈속함을 유지하던 검선 매종도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흐음, 역시 산돼지는 이 비계 맛이지.”

매종도는 기름기가 흐르는 고기를 크게 한 점 베어 물었다. 뜨거운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천양신공의 기운은 고기의 잡내를 날리고 육질을 연하게 만드는 데 기가 막힌 효율을 보였다.

“평생을 기(氣)를 먹고 살았거늘, 정작 이 고기 한 점의 즐거움을 몰랐다니. 참으로 헛된 세월이었구나.”

그는 이후 객잔을 전전하며 산해진미를 탐했다. 소흥주의 향기에 취하고, 기름진 동파육의 식감을 즐기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선의 경지에서 세속의 밑바닥으로 내려왔다. 티끌 속에 빛을 감춘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경지가 이런 것일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입은 세속의 맛을 즐겨도, 무인으로서의 눈과 귀는 여전히 강호를 훑고 있었다. 매종도는 천변만화공으로 얼굴을 수시로 바꿔가며 이름 없는 소문들을 쫓았다.

어느 날, 감숙의 한 폐허가 된 사당 앞. 이름 모를 유랑 무사 둘이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매종도는 근처 나무 위에 비스듬히 누워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받아라! 청풍검법(淸風劍法)!”

“흥, 어설픈 초식이로군!”

챙그랑! 챙!
둔탁한 철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매종도의 눈에는 그들의 초식이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초(下招)의 허점이 태산 같고, 내력의 운용은 거친 숨소리만큼이나 조잡했다.

‘왼쪽 어깨가 비었군. 거기서 상체를 비틀면 그대로 끝이거늘.’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공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으나, 몸속에 각인된 무학의 본능은 타인의 투로를 보며 끊임없이 최적의 검로를 그려내고 있었다.

결국, 승부는 허무하게 끝났다. 승자가 피 묻은 칼을 닦으며 떠나자, 매종도는 씁쓸하게 웃으며 나무에서 내려왔다.

“내려놓았다고 자부했거늘, 아직도 남의 싸움박질에 가슴이 뛰는구나. 나는 천생 무인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야.”

저녁 무렵, 어느 번화한 객잔에 들른 매종도는 다시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옆 탁자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나? 종남파의 장문인이 결국 숨을 거두고, 풍운신룡(風雲神龍) 담명이 15대 장문인으로 취임했다더군.”

“담명이라! 그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쇠락해가던 종남파에 드디어 서광이 비치려나?”

매종도는 차분히 그 소식을 귀에 담았다. 이제는 속세의 미련을 내려놓았으나, 들려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 '풍운신룡'이라는 당당한 별호를 지닌 유망한 인재가 침체된 사문의 장문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늙은 검선의 입가에 작게나마 흡족한 미소를 띄우게 했다.

‘담명이라... 종남에 아직 그런 기재가 남아 있었나 보군.’

기분 좋게 차를 들이키던 그때, 소란스러운 무뢰배들이 매종도의 탁자를 걷어차며 시비를 걸어왔다.

“이봐, 영감탱이! 장문인 취임 소식에 감동이라도 했나? 왜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어? 술이라도 한 잔 사야 할 것 아냐!”

매종도는 고개를 들어 사내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풍운신룡이니 장문인이니 하는 소란보다는, 다시금 떠오른 호적수 정립병의 검로에 닿아 있었다.

“술은 자네들이 사게나. 나는 지금 아주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거든.”

“뭐? 이 노친네가!”

사내의 주먹이 날아왔으나 매종도는 찻잔을 든 채 가볍게 고개만 비틀었다.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매종도는 여전히 정립병의 잔상을 쫓으며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당신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무어라 했을까. 우리 같은 괴물들이 떠난 자리를 메우려 애쓰는 젊은이가 대견하다 했을까.”

“이 미친 늙은이가 뭐라고 중얼.....!”

불량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객잔 안에는 원인 모를 서늘한 살기가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안휘성 합비(合肥)의 정갈한 연무장. 강호의 명숙이라 불리는 두 고수가 무학의 정수를 겨룬다는 소식에 인근의 무인들이 예를 갖추어 모여들었다. 매종도는 낡은 벙거지를 눌러쓴 채 구석진 나무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청량검문(淸凉劍門)의 문주 일검부진(一劍不振) 하진양(河眞陽)과 대도문(大刀門)의 장로 철벽암도(鐵壁巖刀) 조충(趙忠)이었다. 두 사람은 정파의 어른들답게 정중히 포권을 나눈 뒤 비무를 시작했다.

챙그랑! 챙!
정교하게 연마된 검과 도가 부딪치며 맑은 금속성을 냈다. 하진양의 검로에는 절제된 기품이 서려 있었고, 조충의 도법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지켜보던 무인들은 그들의 한 수 한 수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매종도는 하품을 참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검은 법도(法道)에 갇혀 있고, 도는 위엄(威嚴)에 사로잡혔구나. 저들이 현 강호에서 손꼽히는 명숙들이라니...’

매종도의 눈에 하진양의 검은 다음 변화를 예단하기 너무 쉬웠고, 조충의 도는 방어에 치중하느라 공격의 예기를 잃은 상태였다. 하진양이 비기인 ‘청량구변(淸凉九變)’을 펼치며 검기를 뿜어냈으나, 매종도는 혀를 찼다.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지 못해 밖으로 흩어지는 내력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매종도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가볍게 나무에서 내려와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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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까지는 다큐였다면 3화부터는 농이다.

신선을 넘었더니 욕구불만 노인네가 되었구나...

천양신공 비급에 당최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게 써놨던거다. 고자양산은 다 매좆 잘못임.


무갤소축에서 고자단의 건승을 빌며
- 무갤신마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