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사람은 3화까지 보고 오길 바란다.

이것은 매종도가 고자를 극복하고 영생을 살아가는 세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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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수주탄기(隨珠彈雀)


유유자적 강호를 노닐던 매종도의 귀에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날아든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다. 신검(神劍)이라 불리는 화산파의 당대 화산제일검 조일화(趙日華)가 군림천하기(君臨天下旗)를 손에 들고 구파일방에 굴종을 강요하는 비무행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으로 매종도의 고향인 종남파가 속수무책으로 패했다는 말에 매종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매종도는 조일화의 뒤를 쫓아 점창(點蒼)으로 향했다. 점창파의 정문 앞, 조일화는 점창의 최고수를 상대로 시종일관 압도적인 무위(武威)를 과시하고 있었다. 매종도는 인파 속에 숨어 그가 펼치는 검로(劍路)를 주시했다.

‘저것은...!’

순간 매종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일화가 마지막으로 펼친 기이한 검초는 분명 자신이 취와미인상에 남겨두었던 삼락검초의 흔적이었다.

‘낙하구구검(落下九九劍)...!’

낙하하는 폭포의 세찬 물줄기와 같은 무궁(無窮)한 변화가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응축되어 있어야 할 초식이었다. 그러나 조일화가 펼치는 그것은 변화의 절반조차 담아내지 못한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어리석은 놈. 변화가 끊기지 않아야 할 대목에서 검기가 흩어지는구나. 일초식에 담겨야 할 구구(九九)의 변화 중 절반도 흉내 내지 못하다니.”

매종도는 크게 실망했다. 자신의 안배를 가져간 자가 겨우 이런 수준의 범재(凡才)였다니.

하지만 매종도의 냉정한 평가와는 달리, 점창의 고수를 꺾은 조일화에게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현 무림(武林)의 새로운 신화라며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과분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조일화의 조잡한 검리에 환호하는 무인들을 보며 매종도는 솟구치는 의구심과 한탄을 금치 못했다.

‘종남오선이 강호를 호령하던 시절에는 저런 미숙한 초식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작금의 무림은 이토록 퇴보(退步)했단 말이냐.’

그것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선 기괴한 괴리감이었다. 정수를 잃은 검에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후기지수들의 모습은 매종도에게 있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광경이었다.

가짜 명성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일화의 기세등등한 행보는 결국 소림, 무당, 아미의 최고수 삼인이 합공(合攻)을 펼치자마자 허무하게 끝났다. 세 명의 고수가 각자의 비기를 쏟아내자, 본질을 꿰뚫지 못한 조일화의 검은 힘없이 부러졌고 그는 만신창이가 된 채 쓰러졌다.


의문이 남았다. 조일화의 검에는 분명 자신의 흔적이 있었으나, 신체를 완성할 천양신공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종도는 수십년만에 다시 화산의 모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죽림을 헤치고 도착한 모옥은 고요했다. 매종도가 문을 열었을 때, 역시나 탁자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세 점의 취와미인상과 천양신공 비급은 온데간데없었다.

“종남의 문인이 얻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그들의 천운이겠지.”

매종도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도둑이 들어 가져갔든, 화산의 제자가 우연히 발견했든 이미 내어준 안배였다. 다만, 언젠가 종남의 제자가 자신을 찾아올지라도, 더는 자신의 무학에 미련을 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옥 뒤편, 햇살이 잘 드는 곳에 흙을 쌓아 자그마한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비석으로 세웠다.

‘태을검선은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강호를 유랑하는 이름 없는 노인뿐.’

그는 자신의 무공보다, 종남의 문인이 정립병의 무학을 이어받아 훗날 자신을 위협할 만한 진정한 호적수로 나타나길 꿈꾸었다.

“당신이 남긴 씨앗이 있다면 그것이 나를 죽여주길 기다리마.”

매종도는 다시 벙거지를 눌러쓰고 안개 낀 죽림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매종도는 여전히 세속의 먼지 속에 자신을 감춘 채 강호를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객잔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의 귀에 종남파의 근황이 들려왔다.

“들었나? 종남파의 장문인이 또 바뀌었다더군. 전대 장문인이었던 장하민(張夏敏)이 갑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강호를 떠났다지?”

“무슨 사정이라나?”

“실전된 종남의 절예를 되찾겠다며, 전설 속 검선(劍仙) 매종도의 흔적을 찾아 천하를 헤매고 있다더군. 사문이 쇠락해가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야.”

매종도의 찻잔이 멈췄다. 자신을 찾기 위해 장문인직까지 내던지고 고행길에 오른 후예의 소식은 꺼져가던 그의 가슴에 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어리석은 놈…….’

매종도는 속으로 씁쓸하게 혀를 찼다.

‘선대의 절예를 답습하는 것에만 매달려서야 어찌 새로운 경지를 열겠느냐. 스스로 무공을 발전시킬 생각은 않고 죽은 이의 흔적만 쫓다니 실망스럽구나. 하지만…… 오죽했으면 장문인의 무거운 짐까지 벗어던지고 이 늙은이를 찾아 헤매겠느냐.’

가슴 깊은 곳에서 후인을 향한 실망감과 한줄기 연민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매종도는 종남파의 유실된 무학을 몇 가지라도 몰래 전해줄 생각으로 다시는 찾지 않으려했던 종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던 중, 가파른 산세 아래 무명의 동굴 앞에서 그는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무극의 신체로 예민해진 그의 감각이 동굴 깊숙한 곳에서 사매 조심향이 창안했던 칠음진기의 시린 기운을 포착한 것이다.

동굴 안쪽, 이끼 낀 땅 아래에서 매종도는 낡은 옥함 하나를 찾아냈다. 칠음진기의 기운은 그 옥함에서 미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조심향의 절학들과 빛바랜 서책 [칠음진기비록(七陰眞氣秘錄)]이 들어 있었다.

매종도는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겼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없던 검선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에 적힌 것은 무학이 아니라, 그날의 진실을 뿌리째 뒤엎는 추악한 음모의 기록이었다.

그는 잠시 파헤쳐진 흙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실전된 무학 몇 자락을 종남의 후예들에게 전해주려 했던 당초의 계획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무공도, 기개도 잃어버린 자들에게 이제와 검보 몇 권을 쥐여준들 무엇하겠느냐.’

매종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옥함을 다시 땅속 깊이 밀어 넣었다. 이미 백년을 넘게 살아오며 무극(無極)의 반열에 오른 그에게, 현세의 인연이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자신은 이미 인세(人世)의 인물이 아니며, 이 땅에 남은 것은 오직 일그러진 과거의 잔해뿐이었다.

“종남의 업보는 내가 거둔다. 그것이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

매종도는 거칠게 흙을 덮어 조심향의 비록을 또다시 어둠 속에 매장했다. 그는 허리에 찬 낡은 보검을 고쳐 매며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남산을 내려가는 노구의 등 뒤로, 육합무극신공의 정제된 기운이 비로소 살기(殺氣)가 되어 산맥을 휘감았다. 인세의 규율을 벗어난 초월자가 배신자들의 목을 겨누기 위해 다시 강호로 발을 내디뎠다.


산을 내려오는 매종도의 안색은 과거 종남산을 내려올때보다 더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천변만화공을 운용하여 노인의 모습을 건장한 사십 대 사내의 골격으로 뒤바꿨다. 이름은 좌무기(左無忌). 인세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제 검선이 아닌, 피의 길을 걷는 수라가 되어 첫 번째 복수의 장소로 향했다.


좌무기가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은 낙양의 조씨세가였다. 과거 조심향의 부친 조덕양이 군림하던 시절, 그곳은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며 종남파의 명성을 시기하던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매종도가 마주한 것은 화려한 고대광실이 아니었다.

“조씨세가라… 아하, 내가 어릴 적에 어른들께 얼핏 듣기는 했소. 백 년도 훨씬 더 전에 천하를 호령했네 어쨌네 하던 집안 말이오? 거참, 까마흐니 잊고 살았구만. 거기가 이름만 남은 조가장으로 빌빌거리다가 완전히 망해서 흙먼지가 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거길 묻는단 말이오.”

폐허가 된 터에는 잡초만이 무성했다. 조덕양은 사문을 몰락시키려 딸까지 팔아 음모를 꾸몄으나, 정작 그가 지키려 했던 가문은 세월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스러진 것이다. 좌무기는 무성한 풀숲을 바라보며 허탈한 냉소를 흘렸다. 사문을 짓눌러온 원한의 한 축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좌무기는 발길을 돌려 무당산으로 향했다. 과거 우일기를 습격했던 청허도장의 후예들이 지키는 곳이었다.

무당산의 초입이자, 모든 무인이 검을 풀고 예를 갖추어야 하는 해검지(解劍池). 그곳에 좌무기가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든 채 나타났다. 해검지를 지키던 무당의 제자들이 그를 발견하고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무당의 산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주. 하나 이곳 해검지부터는 검을 풀고 오르시는 것이 무당의 오랜 법도이옵니다. 검을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무당의 제자들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깍듯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좌무기의 눈에는 그 가식적인 정중함이 오히려 역겨울 뿐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법도는 치워라. 당장 너희 장문인을 불러오너라!"

좌무기가 차갑게 으름장을 놓자, 제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장문인께서는 함부로 뵈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토록 무례하게 구신다면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부르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피를 흘리며 올라가마."

좌무기가 발을 내딛자 삼대제자들이 검을 뽑아 들고 가로막았다. 그것이 혈사의 시작이었다. 좌무기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무당의 검식들이 펼쳐졌으나, 좌무기의 압도적인 무위 앞에서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제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해검지에서 벌어진 소란과 비명을 듣고 무당의 장로 현진진인(玄眞眞人)이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현진진인 역시 도사 특유의 침착함으로 도호를 읊조리며 정중하게 물었다.

"무량수불. 빈도는 무당의 장로 현진이라 하오. 시주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신성한 도문인 무당에서 이토록 잔인하게 살계를 여는 것이오?"

그 질문에 좌무기가 싸늘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사연이라 물었느냐? 너희 무당이란 놈들은 언제나 그렇지. 겉으로는 정파의 탈을 쓰고 도학을 논하면서, 뒤로는 제 이익을 위해 더러운 행동을 일삼지 않느냐! 오늘 내가 그 가식을 모두 찢어발겨 주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으나, 오해가 있다면 대화로 풀어야 하거늘……!"

"대화는 피로 대신한다!"

좌무기가 신형을 날렸다. 현진진인이 태극혜검(太極慧劍)을 펼치며 유(柔)로써 강(剛)을 제압하려 했으나, 좌무기의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좌무기의 일검이 태극의 원을 수직으로 갈랐다.

챙-!
단 한 번의 격돌로 장로의 검이 비산했고, 이어지는 섬전 같은 신법에 현진진인의 가슴이 붉게 물들며 뒤로 나자빠졌다.

마침내 무당파의 장문인 명진진인(明眞眞人)과 남은 장로들이 모두 달려나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명진진인은 피가 철철 흐르는 연무장을 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으나, 여전히 장문인으로서의 기품과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시주, 멈추시오. 이토록 많은 피를 흘리셨거늘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으신 게요? 우리 무당이 대체 시주께 무슨 대역죄를 지었단 말이오?"

좌무기는 시퍼렇게 번뜩이는 검을 고쳐 잡으며, 명진진인과 오대 장로를 차례로 매섭게 꼬아보았다.

"네놈들의 선조가 저지른 더러운 빚이다. 자업자득이니 억울해하지 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무기가 낙뢰와 같은 기세로 쇄도했다. 장문인과 오대 장로가 다급히 무당의 정수인 대진을 펼치며 합공으로 맞섰다. 그러나 과거의 원한으로 눈이 뒤집힌 마인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좌무기의 섬전같은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당 최고의 보검들이 하나씩 바닥에 나뒹굴었다. 결국 좌무기는 그들의 인후와 심장을 차례로 꿰뚫었다.

청량했던 무당산의 공기는 순식간에 역겨운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백수십 년 만에 맛보는 생사의 손맛에, 좌무기의 혈관 속 무인의 본능이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무당산을 내려와 저 멀리 서장의 제일고수 갈천보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좌무기는 또 다른 허무와 마주했다. 종남사선의 실종 후 갈천보 역시 얼마 못 가 사망했으며, 그의 문파 또한 이미 멸문했다는 소식이었다.


복수의 대상들이 이미 명부에 적힌 것을 확인한 좌무기의 행보는 기이해졌다. 무당파의 혈사가 강호에 퍼지며 그는 혈마(血魔) 좌무기라 불리게 되었고, 의협심에 불타는 강호 10대 고수들이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중 강남제일검(江南第一劍)이라 칭송받는 남궁태(南宮泰)가 길을 막아섰다.

“마두 좌무기! 창궁대연검(蒼穹大衍劍)의 위엄 앞에 네 죄를 뉘우쳐라!”

좌무기는 남궁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든 명부에는 남궁태라는 이름이 없었다. 좌무기는 귀찮다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라. 내 명부에 네 이름은 없다. 헛되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으냐."

"닥쳐라, 마두! 네놈을 베어 천하에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남궁태는 좌무기의 경고를 무시한 채, 정의감에 눈이 멀어 검을 뽑아 들었다. 좌무기는 헛웃음을 삼키며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결투는 반나절이나 이어졌다. 좌무기는 남궁태의 검로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노리개 삼아 상대해 주고 있을 뿐이었으나, 남궁태의 생각은 달랐다. 남궁태는 자신이 혈마를 몰아붙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거의 다 왔다! 내 검망에 갇혀 뒤로 물러서기 바쁘구나.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천하의 혈마를 내가 잡을 수 있다!'

자신이 이기고 있다는 황홀한 착각에 빠진 남궁태의 검이 더욱 화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 어리석은 기세를 바라보며 좌무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제안했다.

"더 볼 게 없군.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하하! 궁지에 몰리니 이제야 목숨을 구걸하는구나! 마두,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남궁태는 끝내 좌무기가 준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차 버렸다. 좌무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기어이 죽음을 자초하는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무기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남궁태가 전개하던 화려한 검망은 단 한 조각의 검기에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남궁태는 가슴을 깊게 가른 검기를 느끼며 피를 토했다. 자신이 왜 패했는지조차 모른 채,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절명했다.


흥에 취한 좌무기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강호 십대 고수를 변덕스럽게 베거나 살려 보내며 유희을 즐겼다. 이제 그만 유희를 끝내려고 마음 먹을 무렵, 천하를 유린하던 좌무기 앞에, 약관의 청년 모용단죽(慕容丹竹)이 나타났다.

“채 피지도 못한 목숨이거늘, 죽음을 구걸하러 왔느냐?”

“마를 징벌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어린 나이에도 물러섬 없는 패기에 흥미를 느낀 좌무기는 황산(黃山) 천도봉(天桃峰)에서 그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운명적인 칠주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투 첫날, 좌무기는 모용단죽이 펼치는 검로에서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남긴 검초와 천양신공(天陽神功)의 흔적이 아닌가?’

좌무기는 그의 내력이 과거의 원수들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려 집요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격돌 끝에 내린 결론은 달랐다. 모용단죽은 그저 우연히 자신의 유산 중 일부를 습득했을 뿐이었고, 그의 검에는 모용세가 특유의 정결한 무학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원수들과는 상관없는 눈부시고 순수한 재기였다.

‘쯧쯧...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에 천양신공을 익히다니...’

어느덧 사방이 껌껌해질 무렵, 좌무기는 검을 거두며 피식 웃었다.

"어린놈치고는 제법이구나. 네 의기가 가상하니 내일도 상대해 주마."

모용단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세를 꺾지 않고 검을 고쳐 잡았다.

"피하지 않을 것이오. 내일 다시 봅시다."

둘째 날,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대결은 기이한 형국으로 흘러갔다.

"초식이 너무 크다. 오른쪽 겨드랑이가 비는구나. 세 치만 더 좁혀라!"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는 좌무기의 검 끝이 모용단죽의 옷자락을 스쳤다. 죽자사자 덤벼들던 모용단죽은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좌무기가 지적한 곳은 자신이 평소에 늘 불안해하던 검법의 고질적인 맹점이었다.

'설마…… 나를 가르치고 있는 건가? 천하의 혈마가 어째서 나에게 무학의 허실을 짚어주는 거지?'

충격도 잠시, 그의 말대로 초식을 수정하자 거짓말처럼 검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셋째 날에도 지독한 지도대련은 계속되었다.

"네놈의 내공은 양강하나 그저 기운만 내뻗을 뿐이다. 초식과 초식의 연결 사이에 내력의 수발이 빈틈 투성이거늘, 그러고도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라느냐!"

좌무기의 서슬 퍼런 호통이 떨어질 때마다 모용단죽은 온몸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공력을 쥐어짜 냈다. 자신의 스승보다도 가혹하고 냉혹했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껍질을 깨부숴주는 가르침이었다. 모용단죽은 이제 의심을 거두고 좌무기의 칼끝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무학을 무섭게 교정해 나갔다.

그렇게 칠주야의 시간 동안, 천도봉에서는 결투를 빙자한 기이한 지도대련이 이어졌다. 재기발랄한 후인은 그 가르침을 습자지처럼 흡수하며 매 순간 괴물처럼 성장했다. 좌무기에게 그것은 복수의 끝에서 마주한 짧고도 즐거운 유희였다.

"이제 네놈과 노는 것도 질렸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네 놈의 목숨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이 아닐테니 각오해라!"

"후...... 이번에는 다를 것이오."

깊은 심호흡과 함께 모용단죽은 칠주야 동안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전력을 다해 대라장천(大羅長天)을 내질렀다. 그 순간, 똑같이 일검을 내뻗은 좌무기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킥!"

고통에 찬 비명이라기엔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비명을 들은 모용단죽의 등골에 서늘한 오한이 스쳤다.

'실력이 한참이나 위인 자가 대체 왜 저런 소리를……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지 않은가!'

무림의 절대마가 보여준 기이한 자비와 뒤틀린 광기가 그의 안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크악!!!"

좌무기는 그 비명을 끝으로 허공으로 신형을 날리며 거대한 폭발음을 일으켰다. 절벽이 무너지고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모용단죽이 안개를 헤치고 나아갔을 때, 혈마 좌무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펼친 최선의 초식을 가볍게 받아넘기면서도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고 사라진 혈마의 광기에 모용단죽은 아연실색했다. 이어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강렬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천하를 피로 물들인 끝에 기어이 광증(狂症)에 걸린 자였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나를 누군가와 착각해서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인가.'

하지만 아연실색한 기분도 잠시, 안개가 걷혀가는 절벽 끝에서 모용단죽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좌무기의 마지막 비명은 패배자의 신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짐을 벗어던진 자의 해방감과도 같았고,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죽여주길 간절히 바랐던 자의 기만적인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는 죽지 않았다. 내 검은 그의 옷자락조차 제대로 베지 못했거늘.'

모용단죽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칠주야의 가르침으로 얻은 경지는 실로 막대했다. 좌무기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모용단죽이라는 완벽한 후기지수를 완성해냈다.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사연이 그를 이토록 허망한 퇴장으로 이끌었는지 모용단죽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좌무기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죽었다고 믿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스승보다 더한 가르침을 준 자에 대한 예우이자, 그가 바라는 마지막 안식에 대한 응답이어야 했다.

'정녕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그 거짓에 동참해주겠소.'

모용단죽은 떨리는 손으로 칼을 거두며 결심했다. 좌무기가 베풀어준 그 가혹하고도 숭고한 보은(報恩)의 대가는, 그를 처단한 영웅의 이름을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었다.

"혈마 좌무기는... 오늘 이 모용단죽의 손에 격살되었다!"

공허한 메아리가 천도봉에 울려 퍼졌다. 훗날 무림사(武林史)는 정파의 기재 모용단죽이 희대의 마두 좌무기를 꺾고 천하를 구원한 이 사건을 가리켜, 마(魔)와 성(聖)이 충돌하여 운명을 바꾼 전설적인 사건인 '마성지쟁(魔聖之爭)'이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 진실, 천하제일마의 기괴한 자비와 그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했던 한 청년의 서글픈 거짓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죽음을 위장하고 혈마의 허울을 벗어던진 매종도는 다시 이름 없는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세의 인연을 끊었다 자부하면서도, 자신의 검초를 지녔던 젊은이 모용단죽에 대한 호기심까지는 버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기운을 지운 채 모용단죽의 행보를 몰래 지켜보았다.

세월이 흘러, 감숙성 서쪽 끝자락의 황막한 벌판에서 매종도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중원을 평정하고 천하제일인이 된 검성(劍聖) 모용단죽과 서장의 최고수라 불리는 아난대활불(阿難大活佛)과 대치하고 있었다.

“중원의 고수여, 그대의 검에 깃든 업보가 너무나도 무겁구나.”

“업보인지 천운인지, 오늘 이 검으로 확인해 보시오.”

두 사람의 싸움은 처절했다. 모용단죽의 검이 섬전처럼 허공을 가르면, 아난대활불의 지팡이가 태산 같은 중압감으로 이를 받아냈다. 한나절 동안 이어진 격돌은 마침내 두 사람이 승부를 내기 위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순간 정점에 달했다.

매종도는 나무 뒤에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것은...!”

모용단죽이 내지른 검초는 역시나 자신이 남긴 세 점의 미인상 중 하나인 낙뢰구검의 정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에 맞서 아난대활불이 지팡이 끝으로 구현해 낸 기괴한 궤적은 삼락검 중 또 다른 하나인 낙화구구검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자신이 화산 모옥에 남겼던 세 개의 미인상 중 각기 다른 두 조각이, 중원의 재기와 서장의 활불이라는 기묘한 인연으로 나뉘어 이곳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로군. 조각난 나의 편린들이 이 먼지 날리는 벌판에서 서로를 죽이려 들다니.’

격렬한 폭사음과 함께 두 고수는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승부의 결말보다 매종도의 흥미를 끈 것은 인연의 기묘한 장난이었다. 화산파 제자의 손에 들어갔던 유산들이 각자의 길을 돌아 이곳에서 마주했다는 사실에 매종도는 묘한 희열마저 느꼈다.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아난대활불이 도둑맞은 미인상을 우연히 얻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잃어버린 조각이 서장까지 흘러 들어간 것인지 매종도는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무학이란 결국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임자가 누구든, 검초가 제 주인을 찾아가 피를 부르는구나.”

매종도는 흥미로운 구경이라도 마친 사람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숙적 정립병의 자취가 아닐지라도, 자신이 남긴 흔적들이 강호라는 거대한 판 위에서 저마다의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은 노구의 검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유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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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탄기(隨珠彈雀)는 수나라의 보구로 참새를 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혈마 좌무기를 열사라 부르던 익명의 무갤럼에게 심심한 조이를 표한다. 좌무기도 매종도였다. 무당파는 살아남은 게 죄.

천하공부출종남, 천하사건출종도

다음화가 마지막이다.


무갤소축에서 고자단의 건승을 빌며
- 무갤신마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