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고자천하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종남오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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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천하대전(天下大戰)


종남오선(終南五仙)이 강호를 종횡한 지 어느덧 수 성상(星霜), 천하의 질서는 종남파를 필두로 재편되어 있었다. 하나 정(正)이 극에 달하면 마(魔) 또한 고개를 드는 법. 서역의 끝, 만년설이 잠든 곤륜산맥의 음택(陰宅)에서 태동한 명옥교(冥玉敎)가 마침내 중원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명옥교의 수장, 공손무벽(公孫無璧)은 만년한철처럼 차가운 이성과 압도적인 무력으로 질서를 유린하는 마도(魔道)의 구도자였다. 그는 강호의 곳곳에서 암약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거마(巨魔)들을 차례로 굴복시켰고, 그들을 수하로 거두어 명옥교의 세력을 전무후무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명옥교는 곤륜에서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일원인 곤륜파(崑崙派)를 단숨에 무너뜨린 것을 시작으로, 중원의 명문들을 차례로 격파해 나갔다. 특히 이들이 정파의 체면을 역이용해 도전자를 자처하며 비무(比武)의 형식을 취한 탓에, 정파는 합공(合攻)할 명분을 잃은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강호를 주유하던 막내 하정의는 공동파의 문전에서 벌어진 명옥교의 일방적인 비무를 목격하고 급히 종남산으로 귀환했다.

종남파의 취운헌(翠雲軒), 장문인 우일기의 앞에 종남오선이 모두 모였다. 우일기의 표정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정의야, 네가 본 것을 소상히 말해 보거라."

하정의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공동파 역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교주 공손무벽은 등판하지도 않았고, 그 수하인 명옥오존(冥玉五尊)이라 불리는 괴물들이 공동의 절예를 비웃듯 짓밟았습니다. 특히 신법과 음한한 기공에 능한 자들이 섞여 있어 정파의 무공으로는 대응이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우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첩보를 덧붙였다.

"나 역시 소식을 들었다. 저들은 이미 사천당문을 거쳐 무당파로 향하고 있다더구나. 행로를 보아하니 중원의 명문들을 차례로 꺾어 기세를 올린 뒤, 마지막으로 우리 종남파에 도전하려는 속셈이다. 저들이 다른 문파를 더 무너뜨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길목을 막아서야 한다."

하정의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장문사형, 하지만 다른 문파들도 우리와 같은 명문정파가 아닙니까? 그들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비무를 우리가 먼저 나서서 가로막는 것이 자칫 참견으로 보일까 우려됩니다."

우일기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네 말이 옳다. 정파간의 예우라면 지켜보는 것이 맞지. 하나 공손무벽은 차치하더라도, 명옥오존의 면면을 보아라. 과거 악명을 떨친 파산이마(巴山二魔)를 비롯해 다들 실전된 마공을 익힌 거마들이다. 저런 자들이 승리에 취해 언제 돌변하여 양민이나 패자에게 해를 끼칠지 알 수 없다. 무림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악역을 자처해서라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립병이 차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장문사형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마(魔)는 그 근본을 숨길 수 없는 법.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화근을 미리 자르는 것입니다."

매종도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조심향 또한 짧게 동의를 표했다.

"장문사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정의도 결국 고개를 숙여 납득했다.

종남파는 즉시 명옥교에 도전장을 보냈다. 결전의 장소는 천하제일산이라 불리는 무림의 성지, 태산(泰山)의 옥황정(玉皇頂)으로 정해졌다. 구름 위로 솟은 태산의 정상에 종남의 검과 명옥의 마가 마주 서자,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고수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무림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우일기는 상대의 전력을 분석해 인원을 배치했다.

"정의 너는 신법이 뛰어난 영존(影尊)을 맡아라. 사매는 한기를 쓰는 빙존(氷尊)을, 그리고 나는 박투술에 능한 괴존(魁尊)을 상대하겠다."

이어 정립병을 바라보며 우일기가 부탁했다.

"립병, 너는 쌍존(雙尊)을 맡아다오. 그들은 예전부터 악명 높았던 합공의 고수들이다. 난전과 다대 일 전투 경험만큼은 네가 우리 중 가장 독보적이지 않느냐. 그들을 상대 할 사람은 너뿐이다."

정립병은 묵묵히 용영검의 검자루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들의 수장, 공손무벽은..."

마지막으로 우일기의 시선이 매종도에게 향했다.

매종도는 말없이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침내 수많은 무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남파와 명옥교의 천하의 운명을 건 결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막내 하정의가 나섰다. 상대는 명옥오존의 막내이자, 신법의 달인으로 정평이 난 영존이었다.

영존은 그 이름처럼 한 줄기 그림자가 되어 다가왔다. 그의 신법은 땅을 밟지 않고 허공을 미끄러지듯 유영하여 종잡을 수 없었고, 그 손끝에서는 음습한 마기를 동반한 조법(爪法)이 갈퀴처럼 쏟아졌다.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검은 마기가 하정의의 생사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정의는 종남의 정통 검법인 성라검법(星羅劍法)을 펼치며 대응했다. 밤하늘에 별이 박히듯 촘촘하게 쳐진 검망이 영존의 접근을 막아섰으나, 실체 없이 일렁이는 영존의 종적을 완전히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전황은 하정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영존의 조법은 검날의 틈을 뱀처럼 타고 들어와 하정의의 어깨와 옆구리에 생채기를 남겼다. 하나둘 늘어나는 상처 사이로 마기가 침투하려 들자 하정의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백 초(百招)가 넘도록 술래잡기 같은 소모전이 이어지며 체력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마침내 하정의가 마음을 독하게 먹은 듯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워냈다.

그는 검을 거두고 대신 그 자리에 스스로 창안한 독문무공(獨門武功)의 기묘한 기운을 차올렸다.

“내 검법은 이미 밑천이 드러났으니, 이제 이 손맛이나 한번 보시게!”

하정의의 빈 손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취공대산수(翠空大山手)였다. 마치 만취한 객이 사방으로 손을 휘젓는 듯한 흐느적거리고 불규칙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손끝에서는 이전의 날카로운 검기와는 전혀 다른, 공간을 통째로 짓누르는 음유(陰柔)하고도 묵직한 압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물처럼 조여드는 기세에 영존의 신법이 찰나의 순간 둔해졌다. 하정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형을 뒤틀며 발을 뻗었다. 용의 뿔처럼 날카롭고 묵직하게 솟구쳐 오른 용수각(龍角脚)의 일격이 영존의 가슴을 정확히 강타했다. 영존의 신형이 낙엽처럼 멀리 튕겨 나가며, 길었던 추격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조심향이 나섰다. 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주위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대는 북해의 극한 지기를 타고났다는 빙존이었다. 그는 조심향을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오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본좌를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이 고작 이런 계집이라니. 내 음공(陰功)은 이미 북해의 만년설보다 깊고 서늘하거늘, 네가 감히 그 깊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빙존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도 조심향의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녀는 마치 벌레를 보듯 차가운 시선으로 빙존을 응시하며 짧게 대꾸했다.

“북해의 미꾸라지가 중원까지 와서 나대는구나.”

“흐흐흐! 입만 산 계집이로군. 그래, 어디 그 야들야들한 손으로 내 한옥빙벽(寒獄氷壁)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겠느냐? 네년의 손가락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꽁꽁 얼어붙어 부서질 것이다!”

빙존의 조롱 섞인 외침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냉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네놈은 오늘 네가 자랑하는 그 한기에 얼어 죽을 것이다.”

조심향의 선언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한 떨기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졌다. 빙존의 코끝으로 난데없는 매혹적인 꽃향기가 밀려들었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신법, 무염보(無艶步)였다.

“이, 이년이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대결이 시작되고 채 십수도 교환하지 않았건만, 빙존은 벌써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본래 그의 권풍에 실린 한옥빙기(寒獄氷氣)는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혈행을 굳히고 신법을 둔화시켜야 마땅했다. 하지만 빙존의 서늘한 한기는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무력하게 흩어졌다.

눈앞의 여인은 분명 존재하되 결코 잡히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악독한 권풍은 번번이 잔상만을 허무하게 부술 뿐이었고,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전신을 쉼 없이 두드리는 난화지(蘭花指)의 지기(指氣)였다.

조심향이 무염보를 전개하여 난화지를 펼치니 주위 사방이 온통 난화의 물결로 뒤덮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빙존은 교주에게 배운 명옥지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지기에 맞섰으나 하나 둘 놓치기 시작했고, 그가 자랑하는 호신강기인 한옥빙벽은 난화지에 속수무책으로 뚫려 그의 온몸에 피구멍이 늘어났다.

불과 삼십여초에 불과한 일방적인 공세에 빙존의 중심이 완전히 흐트러진 찰나, 조심향의 오른손이 백옥처럼 투명한 빛을 발하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칠음진기의 정수를 일점에 응축한 염화옥수(捻花玉手)였다.

“빙존이라 하였느냐? 상대를 잘못 만난 스스로의 불운을 탓하거라.”

퍼억!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빙존의 가슴팍에 선명한 다섯 개의 꽃잎 문양이 새겨졌다. 빙공의 대가라는 명성이 무색하게도, 극독보다 치명적인 염화옥수의 음한지기가 그의 심맥을 뿌리째 얼려버렸다.

천하제일신법대가(天下第一神法大家)이자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의 탄생을 알리는, 참으로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종지부였다.



대결의 세 번째 순서는 우일기였다. 그가 담담한 걸음으로 중앙에 나서자, 마주 서 있던 괴존이 기괴하게 신형을 비틀었다. 그 움직임 하나에 공기의 흐름마저 일그러지며 음산한 마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우일기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포권을 취하며 장문인의 격식을 갖추어 입을 열었다.

“종남의 우일기요. 귀하의 박투술이 천하일절이라 들었소. 나 또한 권장(拳掌)을 주로 사용하니, 내 오늘 귀하의 무공을 직접 상대해 보고자 하오.”

진중하고도 묵직한 선언이었으나, 괴존은 대답 대신 그저 입을 비틀어 기괴하게 웃을 뿐이었다.

“키히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단 한 번 허공을 찢음과 동시에 괴존의 신형이 탄환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대화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듯한, 포악하고도 전격적인 기세였다.

괴존의 박투술은 말 그대로 괴이막측(怪異莫測) 그 자체였다. 그는 대다수 무림인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할까 두려워 기피하는 지근거리, 즉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관절이 꺾이는 듯한 기괴한 소리와 함께 예측 불허의 각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공(魔功)은 마치 굶주린 악귀의 손톱처럼 우일기의 급소를 집요하게 노려왔다.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야말로 몰아치는 폭풍 같은 공세였다.

하지만 그 파괴적인 폭풍의 중심에 선 우일기의 눈빛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몰아치는 마공의 파도 앞에서도 그는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우일기는 먼저 묵룡기(墨龍氣)를 전신에 끌어올렸다. 검게 타오르는 기운을 실은 낙뢰신권(落雷神拳)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그 강맹한 권풍은 괴존의 흉폭한 돌진을 정면에서 짓눌렀다. 괴존이 뱀처럼 몸을 휘감으며 억지스럽게 파고들 때면, 우일기는 즉시 천둔장법(天遁掌法)을 펼쳐 안개처럼 상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공격이 빗나간 틈을 타 들어오는 변칙적인 반격은 유운비수(流雲飛手)의 수법으로 응수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이치에 따라 괴존의 파괴적인 힘을 허공으로 흘려보냈고, 발밑에서는 어운보(御雲步)의 유려한 보법이 쉼 없이 이어지며 털 끝 하나 스치지 않는 절묘한 거리를 유지했다. 강(剛)으로 누르고 유(柔)로 넘기며, 우일기는 철저히 간합을 지배해 나가는 영리하고도 치밀한 싸움을 이어갔다.

공방이 팔십 초(八十招)에 접어든 순간, 계속되던 수세(守勢)의 흐름이 단숨에 뒤집혔다. 우일기는 다시금 거리를 좁히려는 괴존을 향해 벼락같은 삼장(三掌)을 연거푸 내질렀다. 압산진해(壓山鎭海)로 괴존의 어깨를 짓눌러 압박하고, 역발천망(力拔天網)으로 퇴로를 그물처럼 봉쇄한 뒤, 곧바로 신전천벽(神轉天劈)을 가해 그의 중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이다. 구반장법(九盤掌法)의 정수이자 절대금제(絶對禁制)라 불리는 삼벽(三壁)의 연환초식이었다.

“갇혔구나.”

괴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방이 무형의 기벽(氣壁)에 가로막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망적인 공간. 그 폐쇄된 허공 위로 종남파 최강의 장공, 태인장(太印掌)이 거대한 낙인처럼 떨어져 내렸다. 괴존은 무너지는 중심을 억지로 버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섰으나, 태산처럼 밀려드는 장압(掌壓) 앞에 그것은 죽어가는 자의 미약한 발악에 불과했다.

콰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괴존의 신형이 처참하게 꺾여 나갔다. 소용돌이치던 태인장의 장세가 잦아들자, 먼지 구름 사이로 종남파 장문인의 위엄을 두른 우일기의 당당한 풍채가 드러났다.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이후, 무림은 그를 일컬어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 천하제일장(天下第一掌), 그리고 천하제일수(天下第一手)라 칭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종남의 위명이 다시 한번 천하를 진동시킨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정립병의 결투가 이어졌다. 상대는 명옥교가 자랑하는 오존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명옥쌍존(冥玉雙尊), 혈뢰(血雷)와 혈전(血戰)이었다.

본래 이들은 사천(四川)과 섬서(陝西)의 접경에 위치한 험준한 파산을 근거지로 삼아 전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산이마였다. 전대(前代)부터 악명을 떨쳐온 이 거마들은 쌍둥이로 태어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합격술을 구사했다. 그들이 펼치는 공세는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그물과 같았으며, 과거 무림에서 한 손에 꼽히는 고수들조차 이들과의 조우를 꺼릴 만큼 악랄한 노괴물들이었다.

“끌끌끌, 네놈이 요새 강호에서 혈선(血仙)이라 불린다는 그 아해냐?”

형인 혈뢰가 톱날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앞서 나왔다. 옆에 선 혈전 역시 기괴하게 뒤틀린 도를 만지작거리며 정립병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렇소만.”

정립병의 짧은 대답에 혈뢰가 가소롭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가 소싯적엔 네놈 같은 애송이들의 목을 따서 파산(巴山)의 계곡을 메우곤 했지. 아직 젊은 나이에 얻은 명성이 아깝다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되겠구나. 이 강호에 우리 형제의 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교주 외엔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노괴물들의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장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정립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용영검의 검자루를 쥐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곧 죽을 늙은이가 말이 너무 많아.”

“무어라?”

“당신들이 아직 살아있는 건, 내가 활동할 때 숨어있었기 때문이지. 오늘부로 그 운도 끝이다.”

정립병의 서늘한 대답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대기를 가르며 짓쳐 나갔다.

“이놈이!”

분노한 혈뢰의 외침과 함께 쌍존의 합격술이 전개되며, 치열한 사투의 막이 올랐다.

혈뢰가 광기 어린 함성과 함께 명옥혈쇄장(冥玉血鎖掌)의 음독한 기운을 사방으로 비산시켰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혈뢰의 묵직한 장력이 정립병의 기운을 억누르는 사이, 혈전은 어느새 그림자처럼 정립병의 배후로 스며들어 서늘한 도강(刀罡)을 뻗어왔다. 앞뒤를 완벽히 차단당한,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사지의 공방이었다.

구경하던 중인들의 눈에 홀로 이들과 대적하는 정립병의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찢어진 옷자락마다 검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배어 나왔다. 그 처참한 형색은 마치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라 여겨질 만큼, 곧 쓰러질 혈인(血人)의 형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정립병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침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요혈만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몸을 내어주는 방식은 혈선(血仙) 정립병만의 독특한 전투법이었다. 과거 그가 사마외도의 무리를 징치할 때면, 언제나 자신보다 수십 배는 많은 적을 홀로 상대해야만 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병장기를 모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그는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처절한 경험을 통해 이 수법을 완성했다.

겉보기엔 일방적으로 밀리며 만신창이가 되는 듯 보였으나, 이는 상대의 거센 협공 속에서 치명상을 피하기 위한 철저한 계산의 결과였다. 그는 심장이나 단전 같은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피부를 스치는 작은 생채기들로 조금씩 흘러나온 선혈이 옷자락을 적셔 공포감을 조성했을 뿐, 내실은 여전히 단단했다.

자신을 쓰러뜨렸다고 확신하며 방심을 유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사지(死地)를 넘나들며 정립병이 체득한 생존의 투로였다.

정립병의 뇌리에는 수만 번 반복했던 낙하구구검(落下九九劍)의 검로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아홉 개의 초식을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초식이었던 것처럼 물 흐르듯 연결했다. 방어의 끝이 곧 공격의 시작이었고, 흘려보냄의 미학이 곧 반격의 기틀이 되었다.

전신이 피칠갑이 된 채로도 정립병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구구의 변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검초는 점점 더 빨라졌고,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더해갔다. 죽어간다고 믿었던 적의 검이 시간이 갈수록 생기를 띠며 자신들의 목을 조여오자, 쌍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기괴한 공포를 느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결국 참다못한 쌍존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합격술의 정수인 절기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서로 신형을 교차하며, 피할 길 없는 절망적인 십자(十字)의 궤적을 그려냈다. 공기를 찢고 다가오는 치명적인 십자 공격이 정립병의 심장을 노리던 찰나,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본래 수십 개의 검영을 폭포수처럼 퍼붓는 다변(多變)의 절초인 천강은홍(天降銀虹)을 펼쳤다. 다만 평소와 달랐다. 수십 개로 나뉘어야 할 검기를 한 점으로 응축해 상대의 공세를 정면에서 찢어 발긴 것이다.

그 파공의 틈을 놓치지 않고 낙하구구검의 정수인 자하천래(紫霞天來)가 이어졌다. 보랏빛 노을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환상적인 검기가 일순간 장내를 뒤덮으며 혈뢰에게 쇄도했다.

"이, 이럴 수가...!"

혈뢰는 교차하는 자신들의 공력이 검기에 힘없이 갈라져 흩어지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급히 방어 초식인 명옥부동벽을 펼치려 했으나, 자하천래의 검기는 이미 그의 가슴팍을 깊숙이 관통해 선혈의 꽃을 피운 뒤였다.

“형님!”

혈전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최절초를 쏟아부었으나, 정립병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혈뢰의 가슴에서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신형을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이어룡(鯉於龍)의 신법으로 순식간에 사각을 점한 그는, 결투의 대미를 장식할 경홍섬전(驚虹閃電)을 내뿜었다.

경악스러운 무지개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을 멀게 할 만큼 찬란한 검광이 혈전의 시야를 가득 메웠고, 그 뒤에 남은 것은 서늘한 정적뿐이었다.

"크윽!"

명옥교 최강의 합격을 자랑하던 전대의 거마들이, 단 한 명의 검객에게 무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정립병은 한차례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이인자라 칭하지 않았고 승리의 외침조차 내뱉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무림인은 직감했다. 이제 종남에는 오직 매종도라는 태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양에 필적하는 가장 짙은 그림자, 혈선 정립병이 우뚝 섰음을 말이다.

피칠갑을 한 채 한 마디 말도없이 당당하게 서있는 그의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오싹함을 느끼며 염라검객(閻羅劍客)이라 수군거렸다.



마지막으로 천하제일마 공손무벽과 매종도가 대치했다. 공손무벽이 명옥마공(冥玉魔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주변의 대기는 생기를 잃고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검선, 당신의 검에는 티끌 하나 없구려. 하지만 그 고결함이 나의 마(魔)를 버틸 수 있겠소?"

매종도는 고고하게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그의 전신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육합귀진신공의 진기가 순식간에 폭발하듯 팽창하며 주변의 운해를 증발시켰다.

"마(魔)란 결국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오. 그림자가 빛을 이길 수는 없소."

공손무벽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명옥혈룡장(冥玉血龍掌)이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띠며 매종도를 덮쳤다. 매종도는 낙뢰구검의 뇌정벽력(雷霆霹靂)으로 응수했다. 벼락이 내리꽂히듯 매서운 검기가 흑룡의 아가리를 찢어발겼다.

시종일관 매종도의 검세가 우위에 있었으나, 공손무벽 역시 천하제일마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매종도의 뇌전 같은 검로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보내며, 명옥혈룡장의 강맹한 장세 사이사이에 명옥지(冥玉指)의 날카로운 지풍을 찔러 넣었다. 매종도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만큼 공손무벽의 반격은 매서웠다. 두 고수가 격돌할 때마다 연화봉의 암석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흑백의 기운이 뒤섞여 천지를 진동시켰다

백 합이 넘는 치열한 공방 끝에, 매종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낙뢰구검의 최절초인 천뢰멸겁(天雷滅劫)의 파괴력과 낙전칠검의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속도의 최절초를 단 하나의 초식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매종도의 검 끝에서 백색의 광휘가 치솟았다. 뇌전보다 빠르고 겁화보다 뜨거운 일격, 뇌전종횡(雷電縱橫)이 공손무벽의 모든 방어막을 뚫고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것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검(神劍)의 일갈이었다.

공손무벽은 가슴에 박힌 검기를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선혈을 삼키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 초식도... 종남의 검이오?"

매종도는 담담하게 검을 거두며 대답했다.

"내가 조금 바꿔보았으나, 그 본의는 여전히 종남의 것이오."

"과연... 종남의 검은 끝이 없구려. 천하제일이라는 이름... 당신에게 아깝지 않소."

공손무벽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마도의 거성이 지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승리로 명옥교는 모래성처럼 무너졌고, 매종도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으로 추대되었다. 정립병 또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하이인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종남파의 위세는 건파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훗날, 무림의 역사가들은 태산에서 벌어진 이 장엄한 사투를 일컬어 천하대전(天下大戰)이라 기록했다. 그것은 정과 마의 운명이 뒤바뀐 분수령이었으며, 종남파의 무공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화의 영역에 닿았음을 증명한 위대한 서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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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향편을 구상하다 보니 종남파와 종남오선이 어쩌다 명실공히 천하제일이 되었는지 그 내용이 궁금하여 만들어봤다.


무갤소축에서 고자단의 건승을 빌며
- 무갤신마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