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동백발기(冬柏發起)
"소응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른 자를 조심해야한다......!"
종남파(終南派)의 제 22대 장문인(掌門人) 자리에 오른 유소응은 자신의 손을 꼬옥 움켜쥔 채, '동백기름'이라는 네 글자만을 입가에 남기고 눈을 감은 사부 진산월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동백기름이라니…… 그것은 돌아가신 전사숙의 신외지물(身外之物)이 아닌가.'
과거 종남파의 부흥을 이끌었던 21대 제자이자 그의 사숙인 전흠. 그는 과거 형산파와의 승부에서 도망쳤다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가슴에 품고 절치부심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악산대전의 치욕을 딛고 일어서, 중추절에 서장제일인 야율척의 대제자인 강남절품도(江南絶品刀) 담중호와 치열한 사투를 벌여 승리했었다.
하지만 그때 입은 내상(內傷)이 깊어 종남산 구석탱이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생전의 그는 중대한 대사를 앞둘 때면 언제나 머리에 동백기름을 정갈하게 바르고 나서곤 했었다.
유소응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곁에 있던 사매 서문연상이 그를 불렀다.
"장문 사형, 무엇을 그리 깊이 고민하고 있어요?"
"……별일 아니다. 사부님의 마지막 유언이 생각나서 그렇다."
"으이그, 누가 애늙은이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걱정만 많은 그 성격은 어째 돌아가신 장문인을 쏙 빼닮으셨네요."
"……."
"동백기름이라뇨.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촌스럽게 머리에 그런 걸 바르고 다닌담? 필시 돌아가신 장문인께서 말년에 노망이라도 드셨던 게 틀림없어요."
"사매! 아무리 너라 해도 돌아가신 은사님께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엄한 꾸짖음에 서문연상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앞에 놓인 접시에서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고는 덥석 베어 물었다.
"쳇, 어릴 때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저 밥맛없는 고지식함까지 사부님을 똑 닮았네. 이제는 귀엽지 않은 꼬마 사형이 그나마 마음에 드는 점이라곤, 사부님께 배운 이 남전계퇴(藍田鷄腿) 뿐이라니깐."
서문연상은 입가에 기름기를 번지르르하게 묻힌 채 남전계퇴를 맛있게 뜯으며 웅얼거렸다.
그 광경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얼굴이 불콰해지도록 술을 마시고 있던 손풍이 트림을 꺼억 하며 끼어들었다.
"거 이제는 우리 꼬마 사형이 엄연한 본 파의 장문인이 되셨는데, 사저도 예의를 좀 지키시오. 그렇게 게걸스럽게 뜯어 대니 술맛 떨어지게 시리."
"뭐라고? 이 버릇없는 사제 녀석이 어디서 훈계질이냐! 오랜만에 내 손에 호되게 혼쭐이 나고 싶은 게로구나!"
'저 계집의 고약한 성미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구나. 필시 광증(狂症)이 도진 게 틀림없어. 어르신인 내가 참아야지.'
손풍이 술병을 나발 부듯 들이켜고는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
"내가 아직도 사저한테 매나 맞던 어리바리한 풋내기로 보이시오? 이래 뵈도 강호가 다 아는 '풍류무적권(風流無敵拳)' 손풍이란 말이오!"
"이 녀석이 정말!"
두 사람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곁에 있던 방화가 황급히 끼어들어 만류했다.
"사매, 사제! 장문사형 면전에서 장난이 너무 심하구나. 그만들 두지 못할까."
시끌벅적하게 싸우는 이들을 보며 유소응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낙사숙이라도 계셨다면 저 버릇없는 사매를 제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의 사숙이자 천하제일권장(天下第一權掌)의 대가인 옥면신장(玉面神將) 낙일방. 그는 천하제일의 미남자로도 이름이 드높았다. 안하무인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서문연상조차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잘생긴 낙사숙 앞에서는 요조숙녀처럼 얌전을 떨곤 했었다.
'낙사숙께서 엄사고와 한량처럼 강호 유람을 다니시는 게 이토록 뼈아플 줄이야.'
유소응은 이마를 짚었다. 진산월 사후, 낙일방 외에도 서문연상의 사부인 무영낭랑(無影娘娘) 방취아와 방화의 사부인 대해검(大海劍) 소지산은 그제야 혼인식을 올리더니 자신들의 시대는 끝났다며 사문을 벗어나 아예 딴살림을 차려버렸다.
종남파의 기나긴 암흑기를 뚫고, 전대 장문인 신검무적 진산월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종남을 다시 천하의 중심에 세운 22대 사형제들. 본래 그들은 종남칠걸이라 불리우며 위에는 사부도 없고 배분만 같은 항렬인 깎두기 동중산과 다섯째인 단리상, 그리고 막내인 고성한이 있었다.
그러나 20대 사숙조들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동중산은 끝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령으로 세상을 등졌고, 늘 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단리상은 종남산을 등지고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막내인 고성한은 나름의 실력을 쌓았으나 뒤늦게 입산한 탓에 그들의 끈끈함 유대감에 어울리지 못해 사부께 하산을 청하여, 진산월은 금륜장을 종남파의 속문으로 삼고 그를 하산시켰다. 대문파 답게 다른 22대 제자들도 많지만 강호에 가장 이름을 떨치는 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이들 네 사형제였다.
유소응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 엉망진창인 문파를 홀로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신임 장문인의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유소응의 고뇌가 깊어가던 그 때, 소림사의 방장인 대신승(大新僧) 정화 선사로부터 한 통의 서찰이 종남산에 당도했다.
<천하 무림인(武林人)에 고(告)함.
금번 해남 동백령(冬柏令)의 발호로 다음 달 보름에 숭산(嵩山)의 오유봉(五乳峯)에서 무림인들의 뜻과 힘을 뭉치기로 하였으니, 많은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소림사(少林寺) 삼십칠대 방장(方丈) 정화(丁華).>
"동백령……! 설마 선사께서 유언으로 말씀하신 동백기름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유소응이 서찰을 쥔 채 굳어진 표정으로 읊조리자, 곁에 있던 서문연상이 아니나 다를까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으이구, 장문 사형은 대체 그동안 종남산에 처박혀서 뭐 하셨어요? 어떻게 그걸 이제야 아실 수가 있어요?"
서문연상은 여전히 손에 쥔 남전계퇴의 뼈를 툭 던지며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손풍 역시 술병을 내려놓고는 혀를 쯧쯧 차며 거들었다.
"거 장문 사형, 문파를 돌보는 것도 좋지만 강호 소식에 귀를 닫아서야 쓰겠소? 이 몸조차 오다가다 들은 풍월이 있거늘, 한 파의 대장문인께서 그리 눈이 어두워서야 원……."
그들의 타박에 유소응의 안색이 붉어지려 할 때, 평소 신중한 성정인 방화가 무거운 안색으로 끼어들어 설명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게. 장문 사형께서는 홀로 문파의 내실을 다지느라 여념이 없으셨던 게 아닌가. 사형, 동백령은 최근 해남(海南) 일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흥 문파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우두머리들의 실력이 실로 무시무시하여 해남을 넘어 이미 강남(江南) 일대를 모조리 석권했다고 들었습니다."
유소응은 방화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이들은 성정이 극도로 폭급하고, 손속에 자비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자들입니다. 항복하지 않는 문파는 그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잔학함을 보여 이미 강남 무림이 피로 물들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태가 이토록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소림의 정화 선사께서 마침내 참다못해 무림맹을 소집하신 듯합니다."
방화의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에 가라앉았다. 문파를 유지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붓느라 정작 천하 무림의 거대한 격변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소응은 정화 선사의 서찰과 진산월의 유언을 번갈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동백기름과 동백령…… 필시 이 둘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
숭산 소림사 인근의 대풍(大風)객잔은 소림 방장이 소집한 무림대집회에 참석하러 온 무림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시끌벅적한 인파 속에서 네 사형제가 자리를 잡고 앉자, 객잔 안의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과거 중추절, 서장 무림과의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장렬한 승리를 거두며 종남파는 천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첫손가락에 꼽는 천하대문파로 우뚝 섰다. 비록 천하제일인이었던 신검무적 진산월은 세상을 떠났으나, 중원무림의 영웅인 그의 사제들이 여전히 건재했기에 그 누구도 종남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오! 저분들이 바로 대종남파의 영웅들이 아니십니까!"
객잔의 무림인들이 알아보고 저마다 감탄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종남파의 장문인이자 의지가 굳세고 흔들림 없다는 뜻의 '견정신검(堅定神劍)' 유소응은 이제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고 서른에 가까운 늠름한 청년의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평소 진중한 성품의 '불퇴검(不退劍)' 방화와 함께 자신들을 아는 체하며 정중히 포권을 취해오는 강호동도들에게 점잖고 기품 있는 태도로 일일이 응대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지방 문파의 장문인이 반가운 낯빛으로 다가와 포권을 취하며 말을 건넸을 때였다.
"하하하! 종남파의 영웅들을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은 화동파(華東派)의 장문인 고진양(高震陽)이라 하옵는데……."
"아, 시끄러워요. 귀청 떨어지겠네. 인사치레는 됐으니 저리 좀 비켜서시죠? 안 그래도 숭산까지 오느라 먼지를 뒤집어써서 기분이 매우 불쾌하니까요."
코를 찡긋하며 쏘아붙인 이는 자칭 '월광신녀(月光神女)'라 떠들고 다니는 서문연상이었다. 그녀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화동파 장문인 고진양의 안색이 단번에 흙빛으로 변하며 부들부들 떨렸다.
서문연상은 스스로를 달빛처럼 고결하고 아름답다 하여 월광(月光)이라 칭했으나, 강호 무림인들은 그녀의 안하무인하고 사나운 성미에 혀를 내두르며 그녀가 모르는 속 뜻을 담아 월광신녀라 불렀다.
'달빛은 무슨…… 미쳐도 단단히 미친 월광신녀(越狂哂女)지.'
"아무리 천하의 종남파라지만, 일파의 장문인인 나 고진양에게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이오!"
사태가 험악해지자, 옆에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술을 들이켜고 있던 손풍이 트림을 꺼억 하며 끼어들었다. 제지한답시고 나선 것이었다.
"어허, 거 장문인 양반! 우리 사저가 원래 성미가 저리 고약한 걸 어쩌겠소? 그래도 명색이 천하제일 문파인 종남파의 여걸이신데, 그쪽 같은 변방의 작은 문파 장문인이 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안 그렇소? 껄껄껄!"
위로는커녕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성격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손풍의 어투에, 화동파 장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지켜보던 다른 무림인들의 눈초리마저 험악하게 굳어졌다.
"뭐라? 변방의 작은 문파?! 이 무슨 오만방자한 망언이란 말이냐!"
"종남파가 천하를 잡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객잔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화동파 무사들이 병장기를 만지작거리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마침내 유소응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유소응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고 장문인, 그리고 자리에 계신 강호동도 여러분. 본파의 사매와 사제가 오랜 여정에 심신이 지쳐 잠시 말실수를 범했습니다. 장문인인 제가 이들의 불찰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부디 종남과 화동의 우의를 생각하시어 넓은 아량으로 혜량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단단하고 깊은 내력이 실린 청년 장문인 유소응의 음성이 객잔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견정신검이라는 대단한 별호를 가진 천하대문파의 장문인이 직접 머리를 숙이며 진중하고 예의 바르게 사죄를 구하자, 험악하게 들끓던 객잔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화동파 장문인 고진양 역시 더 이상 화를 내면 오히려 속이 좁아 보일 판이라, 헛기침을 하며 마지못해 물러섰다.
"……유 장문인께서 이리 정중히 사과하시니 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겠소."
상황이 수습되자 유소응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서문연상은 여전히 입술을 비쭉이고 있었고, 손풍은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는 표정으로 다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어도, 개성 강한 사형제들을 이끌어야 하는 유소응의 앞길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
☆☆☆
소림방장 정화의 선실(禪室).
천하 무림의 태두라 불리는 소림사 방장의 거소답게, 그곳은 실로 작고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낟가리만 한 목탁 하나와 빛바랜 경전 몇 권, 그리고 차를 우려내는 화로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정화 선사는 본 집회가 열리기 전, 종남파의 장문인 유소응에게 따로 전할 은밀한 말이 있다며 그를 단독으로 청했다.
"유 장문인, 이렇게 사사로이 뵙자고 청하여 송구하오. 하지만 본 집회에서 꺼내기엔 사안이 너무도 무겁고 조심스러워 이리 모셨소."
"선사께서 이리 직접 부르셨는데 어찌 송구하다 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정화 선사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소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승이 동백령의 발호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들의 마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에게 실로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동백령의 흉수 중 한명은 머리에 동백기름을 정갈하게 바른 중년인인데, 스스로를 '성뢰신검(星雷神劍)'이라 칭하며…… 놀랍게도 그대의 선사께서 쓰시던 절학인 낙뢰구검을 쓴다 하더이다."
정화 선사의 눈빛에 스치는 조심스러운 빛을, 유소응은 놓치지 않았다.
"유 장문인…… 혹 이와 관련하여 짚이는 것이 없으시오?"
유소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며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결코 사문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 될 비밀이었으나, 눈앞의 상대는 소림의 방장이었다. 마침내 유소응은 무겁게 입을 뗐다.
"……실은, 예전에 선사께서 회수하셨던 종남파의 절학 삼락검(三落劍) 중 일부가 다시 장경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의 진상을 파악하려 백방으로 애썼으나 저로서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소생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더 자세히 파악해보겠습니다."
유소응은 우선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정화 선사의 낯빛이 더욱 무거워졌다. 선사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었다.
"종남파의 비급이 유출된 것이라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구려. 하물며 그자 외에도 실력이 무시무시한 청년 고수가 한 명 더 있다고 하오. 전언에 따르면 그자도 마찬가지로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섬전같은 검법을 사용한다 하더이다."
정화 선사의 어조는 시종일관 조심스러웠으나, 유소응에게는 마치 '종남파 내부에 배신자가 있거나 너희가 범인 아니냐'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었다. 정화 선사는 곧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동백령은 종남파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자들로 보이오. 그러니 이번 동백령과의 싸움에는 종남파가 천하 무림의 선봉(先鋒)에 서주셔야겠소."
"사문의 비급이 악용되고 있다면 마땅히 종남의 손으로 처단해야할 일입니다.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유소응은 흔쾌히 수락한 뒤 정중히 포권을 취하고 방장실을 나섰다.
방장실을 나서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유소응의 머릿속은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 복잡했다.
'성뢰신검(星雷神劍)이라니…….'
문득 돌아가신 전사숙의 생전 별호가 떠올랐다. 그의 별호는 분명 '폭뢰검(爆雷劍)'이었다. 마치 사숙이 생전에 익히셨던 성라검법(星羅劍法)의 '성(星)'자와 그의 별호인 폭뢰검의 '뢰(雷)'자를 결합한 것 같은 기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동백기름이라니. 사부님의 그 유언은 대체…… 전 사숙은 분명 본산에서 돌아가셨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유소응의 고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화 선사가 언급한, 종남의 검법을 쓴다는 정체불명의 또 다른 청년 고수. 유소응의 뇌리에 문득 불우했던 한 사제의 얼굴이 스쳤다.
'혹시…… 단사제인가?'
과거 자신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끼고 어느 날 말없이 종남산을 뛰쳐나간 사제, 단리상. 종남파에서 유실되었던 삼락검의 비급은 바로 낙뢰구검(落雷九劍)과 낙전칠검(落電七劍)이었다.
'단 사제가 쓰는 것이 낙전칠검이 아닐까? 그가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두 무공 비급을 훔쳐간 것이라면…….'
사문의 유실된 비급, 사숙의 자취를 흉내 내는 중년인, 그리고 사라진 사제. 모든 의문이 동백령이라는 거대한 거악(巨惡)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문인 유소응의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
강남(江南)과 강북(江北)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닿는 접경지, 회수(淮水) 줄기가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황량한 갈대밭.
천하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떠오른 동백령(冬柏令)을 저지하기 위해 소림 방장 정화 선사로부터 선봉(先鋒)의 책무를 부여받은 종남파의 네 사형제는 맹렬한 기세로 남하하던 중, 마침내 동백령이 내세운 선봉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종남파의 진용은 굳건했다.
의지가 단단한 청년 장문인 견정신검(堅定神劍) 유소응을 필두로, 불퇴검(不退劍) 방화, 자칭 월광신녀(月光神女) 서문연상, 그리고 풍류무적권(風流無敵拳) 손풍까지 종남의 중추가 모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갈대숲을 헤치고 그들 앞에 가로막아 선 동백령의 면면을 확인한 유소응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들의 진용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과거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신목령(神木令)의 무시무시한 생존자인 백자목과 한시몽. 그 둘이 살기를 뿜어내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유소응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들을 이끌고 나타난 자들이었다.
종남파와 대대로 깊은 우의를 나누던 석가장(石家莊). 그 석가장의 막후 지배자인 철혈홍안(鐵血紅顔) 조여홍의 제자이자 이집사인 공상춘. 그리고 그 뒤에는 과거 사부 진산월의 신검에 당해 발목이 잘려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공상춘의 형, 공영춘이 절뚝거리며 서 있었다.
유소응은 검자루를 쥔 채 안색을 굳히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자목과 한시몽…… 신목사자들이 동백령의 마수에 가담한 것은 그렇다 치겠소. 허나 석가장 철혈홍안의 제자이자 종남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공씨 형제들이 어찌하여 무림의 공적인 동백령에 몸을 담고 계신 것이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유소응의 일갈에 공상춘이 특유의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흐흐흐, 유 장문. 그게 그리도 궁금하신가? 그렇다면 굳이 입을 열 필요가 뭐 있겠소. 우리를 꺾고 직접 그 답을 찾아보시구려!"
공상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들의 신형이 폭사하듯 날아들었다.
"이놈들이 감히!"
손풍이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고, 서문연상 역시 표독스럽게 검을 뽑아 들었다.
싸움은 실로 처절하고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대들은 과거 무림을 주름잡던 선대(先代)의 괴물 같은 고수들이었다.
백자목과 한시몽이 펼쳐내는 신목령의 음산한 기예는 방화와 서문연상의 숨통을 옥죄어 왔고, 진산월에게 당했던 한을 품은 절름발이 공영춘은 목숨을 도외시한 발악적인 검초로 손풍을 몰아붙였다. 공상춘 역시 철혈홍안의 비전을 가감 없이 쏟아내며 유소응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과연 선대의 절정 고수들……! 한 치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구나.'
유소응은 온몸이 땀과 피로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종남파의 네 사형제는 과거 사부님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쌓아온 실전의 경험과, 극한의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종남의 절예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격전이 한 시진이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유소응의 견정검이 공상춘의 가슴을 꿰뚫었고, 방화의 검이 백자목의 목을 벴다. 연이어 손풍의 권과 서문연상의 검이 공영춘과 한시몽을 쓰러뜨렸다.
실로 간신히 거둔 승리였다. 네 사형제 모두 크고 작은 내외상을 입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유소응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공상춘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말하시오! 석가장이 어찌 동백령과 손을 잡은 것이오!"
치명상을 입고 입가로 검붉은 선혈을 왈칵 쏟아내던 공상춘이, 유소응을 향해 기괴하고도 비틀린 조소를 지어 보였다.
"쿨럭…… 으흐흐흐. 어리석은 놈들.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했더냐? 이 모든 것은…… 결국 너희 종남파의 뜻이거늘……."
"그게 무슨 소리냐! 어서 말해라!"
유소응이 공상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으나, 공상춘은 그 알 수 없는 유언만을 허공에 지껄인 채 고개를 떨구었다. 공영춘과 신목령의 두 생존자 역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갈대숲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만이, '모든 것이 종남파의 뜻'이라는 불길한 메아리를 실어 나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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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를 제공해 준 무갤동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동백천하 연재를 시작한다.
역시나 제미나이의 도움으로 동백 '발기'와 '사정' 두 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한자가 다르니 오해하지 말자.
무갤소축에서 동백기름단의 건승을 빌며
- 무갤신마 배상
좃흠... 또 너야?
전흠 이번엔 누구한테 당하냐 ㅋㅋ
형 네이버 스토리 데뷔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