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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흠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진 서인걸을 보며 일갈했다.


서가보의 전광십사검은 제법 매서운 연환초식이긴 했다. 하지만 서인걸 개인의 기량은 그저 온실 속 중원의 화초였다.


그에 비하면 전흠은 그야말로 모진 비바람을 맞고 자란 해남의 거목 같은 인물 아닌가? 



"실전 경험 자체가 너무 차이나는군."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진산월은 뭔가 아쉽다는 듯 독백했다.


전흠은 그런 장문사형을 보고 빙그레 웃고는 쓰러진 서인걸을 향해 위로를 건넸다.



"서 사제, 너무 낙심하지 말게. 전광십사검이 약한 게 아니니까. 다만 성라검법이 강했을 뿐."


서인걸의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괴성척두의 강맹한 위력에 그만 기절하고 만 모양이었다.



'이런, 내공을 싣지 않았는데도 저 모양이라니, 자칫 한가닥 진기라도 운용했다간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군.'


전흠은 서인걸의 나약함에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격렬한 비무의 금속음 때문이었을까? 천봉팔선자들이 갑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담?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머!"


정소소는 엄쌍쌍과 누산산을 대동하고는 바닥에 쓰러진 서인걸을 보고 놀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니니 소저들은 너무 심려치 마시오. 본파의 젊은 두 검객이 가볍게 비무를 한 것 뿐이니."


진산월은 천봉팔선자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고, 그제서야 정소소와 엄쌍쌍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중에서 누산산만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전흠과 서인걸을 번갈아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런데 천봉팔선자 및 다른 선원들이 바닥에 쓰러진 서인걸을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으니 종남파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기도 했다.



"장문 사형, 아무래도 서사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으니 선내 의원이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전흠의 말에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선내로 내려가려는 찰나, 누군가 전흠의 등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오?"


전흠은 자신의 뒤에 선 누산산을 보고 물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도도한 표정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누산산은 말을 꺼내기 힘든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본 소녀가 그 동안 전 소... 아니 전 대협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랬소?"


전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동안 제가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고 싶어요. 제가 뭘 해드려야 전 대협의 마음이 풀릴까요?"


"글쎄..."


민망한듯 살짝 얼굴을 붉히는 누산산의 표정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데가 있었다. 



그녀를 보며 전흠은 무심코 속으로 본심을 되뇌었다.


'그러면 오늘 밤 내 처소로 오시오.'


그 순간 누산산의 표정이 흠칫 변하며 정색했다.


그리고 전흠은 혀를 깨물고 자진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런 제기랄!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걸 전음을 보내버렸구나. 망했다. 진짜 망했어.'


그 누가 천봉팔선자에게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을까?


자칫 팔선자를 희롱한 죄로 천봉궁과 종남파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봐온 누산산의 성격대로라면 당장 암호랑이처럼 전흠의 눈을 파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릴 게 뻔했다.


전흠의 심장이 마치 비성흔을 마주한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산산의 볼이 흡사 작약처럼 새빨갛게 물들더니 전흠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게 아닌가?



'...알았어요. 자시에 뵈어요.'


그녀가 보내온 전음에 전흠은 그만 환호하고 말았다.




* * *




자시 무렵, 전흠은 객실에서 잔뜩 흥분한 채로 누산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동백기름을 머리에 한껏 펴바르고는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런데 누산산이 자시가 되어도 오지 않는 게 아닌가?



'설마 마음이 바뀌어서 장문 사형에게 이 일을 고자질하려는 건 아니겠지?'


전흠은 불안해진 나머지 비관적인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누산산이 진산월에게 전흠이 한 말을 알렸다간 당장 진산월이 자신을 추포(追捕)한 뒤 실컷 매질하고는 종남파 뇌옥에 가둬버릴지도 몰랐다.


극도로 불안한 느낌이 든 그 순간, 객실 문을 살포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참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홍조 가득한 얼굴의 누산산이 객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전 대협. 정언니와 엄언니에게 둘러대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전흠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사과하는 누산산을 보자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럴거 같았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어서 들어오시오."


누산산은 전흠의 여유로운 태도에 더욱 매력을 느낀 듯 안심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자 향긋한 꽃내음 같은 누산산의 체향이 전흠의 방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누산산이 아리따운 얼굴로 밀착해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황홀한 것이기도 했다.



'정말 예쁘구나... 이 여자를 오늘 내가 안는다는 말이지.'


전흠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누산산을 침상으로 이끌었고, 그녀는 저항 없이 전흠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누산산의 연녹색 궁장 상의의 매듭을 풀고는 상의를 조심스럽게 벗기니, 어느새 새하얀 비단으로 된 속곳만이 남았다.



'진짜 미치겠군...'


누산산은 몸선이 기막히게 예뻤다. 그녀의 허리가 자신의 허벅지보다 얇은 가냘픈 체형이지만, 볼품 없이 마른 게 아닌,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이었다.


그때 그녀가 몹시 주저하는 기색으로 전흠을 부르는 게 아닌가?


"전 대협..."


'이런, 내가 너무 서둘렀나?'



전흠은 그새 누산산의 마음이 바뀌었을까봐 걱정이 들었다.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꼴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누산산의 말에 전흠은 더욱 흥분하고 말았다.



"본 소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전 대협께 폐가 되지 않을지..."


누산산은 남자 경험이 전혀 없던 것이다. 이제 갓 약관이 될까말까한, 소녀 티를 다 못 벗은 팔선자의 막내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흠은 가슴이 꽉 막힌듯 불타는 느낌이 들었다. 천봉팔선자의 처녀를 정복하는 날이라니!



"괜찮소. 나는 이런 일에 능숙하니 나만 믿으시오."


전흠은 여자경험이 없는 동정이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신감 있는 전흠의 태도에 누산산은 안심한듯 그의 가슴에 몸을 맡겼다.


어느새 누산산의 새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몸을 가리고는 그만 등을 돌린채 침상에 걸터 앉았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등허리의 완벽한 곡선을 보자 전흠은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무림 남성들이 모두 욕망하는 천봉팔선자를 안게 되었구나!'


전흠은 무사복 바지가 몹시 불편해지는 걸 느끼며 몸을 들썩였다.


오늘 밤, 옥봉 누산산은 전흠의 아래에 깔려 앳된 교성으로 자신을 애닳게 부를 것이다.


전흠은 몹쓸 상상을 하고는 누산산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누산산은 몹시 부끄러운 듯 흠칫하며 전흠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무척 귀여워 보이는 것이었다.



"너무 부끄러워 하는군. 이제 그만 고개를 돌리시오."


전흠의 말에 누산산은 잠시 주저하다가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전흠은 경악하고 말았다.


전풍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가?



"우아악!"


고개를 돌린 누산산의 얼굴이 어느 순간 전풍개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송충이 같은 눈썹, 꼬장꼬장한 눈매, 수북한 코털, 주름진 얼굴. 누가 봐도 그의 할아버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전흠을 못마땅한듯 바라보고는 주름이 가득한 아미를 치켜올리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흠아! 오늘 성라검법 수련은 다 한게냐?!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전흠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 * *




처음 들린 것은 정소소의 목소리였다.


"진 장문인... 전 소협이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의원을 모셔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괜찮소. 머리는 나빠도 몸 하나만은 튼튼한 게 전흠의 장점이니."


"장문 사형,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전광십사검을 제어하지 못한 나머지..."


"아닐세. 그보다는 전흠이 너무 과하게 돌진한 감이 있어. 나 원, 그런 괴성척두는 처음 보는군."



전흠은 여전히 기절한 척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맞아... 괴성척두로 녀석의 전광십사검을 맞찌르다가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서인걸과의 승부의 순간, 배가 흔들려 서로의 간격이 급격하게 좁혀졌고, 서인걸의 팔꿈치가 전흠의 턱주가리를 강타하는 바람에 전흠은 그만 기절하고 만 것이었다.


전흠은 모든 걸 깨닫고는 그만 참담한 심경이었다.



'젠장... 그게 다 꿈이었다니, 누산산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전흠은 실눈을 뜬 채 주변을 살폈다.


누산산은 전흠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정소소를 바라보며 조잘거리고 있었다.


진산월과 서인걸도 전흠을 살피기는 커녕 서로 대화하느라 바쁜 듯했다.



다만 엄쌍쌍만이 다 이해한다는 듯, 가엾다는 눈길로 전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전흠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젠장... 이대로 해남으로 떠나고 싶구나.'


전흠은 청옥색 파도가 몰아치는 해남의 바다를 떠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향이 그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