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결심을 담았음에도 그 발걸음은 표홀했다.
진산월이 종남산에 귀환한 지 한 달, 오랜 고민 끝에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고백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북적이는군.'
종남산을 오르는 길목인 중문은 무수한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종남파가 몰락할 당시엔 몇몇 등산객이나 오르던 한적한 장소가, 지금은 신검무적을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는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검마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한 번에 십이장을 뛰어오르는 그 모습에 좌중들의 입이 딱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이윽고 종남파의 산문(山門)이 보이기 시작했다.
헌데 산문의 입구에도 이미 무수한 인파가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검마는 암담해진 나머지 종남파의 제자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겠군.'
과연 현판 아래를 보니 한 청년이 책상 위에 방만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줄 서요! 거기! 새치기하는 거 다 보이니까 제대로 서쇼!"
그 청년은 주변 인파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종남파 산문 앞에서 인파들을 통제하고 있는 이는 분명히 종남파 제자가 아니겠는가?
"장문인 계신가?"
검마는 그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청년, 즉 종남파 이십이대 제자인 손풍은 검마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처음 오셨으면 방명록 작성하고 맨 뒤로 가서 줄 서슈. 어이 거기 아저씨! 똑바로 한 줄 서기합시다!"
손풍의 방자한 태도에 검마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긴밀한 일이네. 장문인을 뵈어야 한다니까."
손풍은 눈 앞의 장년인이 노기 섞인 음성으로 재촉하자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여기 안 긴밀한 사람 없소. 맨 뒤로 가서 줄이나 서슈."
그 말을 뱉고는 손풍은 검마를 흘깃 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손가락으로 턱하니 가리켰다.
"말로는 안될 친구로군."
검마는 즉시 무형지기(無形之氣)를 끌어올려 손풍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그러자 선선한 미풍이 불던 종남산 산문에서 갑자기 소용돌이 같은 기파가 손풍을 에워싸는게 아닌가?
검마의 무형지기는 과연 돌풍처럼 무서워서 손풍은 숨이 턱 막히고 오금이 저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흐아악! 이 미친 작자가 사람 잡네! 낙사숙! 도와주세요!"
그러자 내당에서 한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와 산문에 착지했다.
"옥면신권(玉面神拳)이다!"
군중들의 환호성에 그 인영은 도착하자마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바로 절세의 미남이자 당대에 한 손에 꼽히는 권법가인 낙일방이었다.
'제법이군.'
검마는 낙일방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몇 걸음 만에 수십여장을 넘어온 그 신법은 검마 자신에게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으으으... 네 놈은 이제 죽었어!"
낙일방이 등장하자마자 검마는 무형지기를 거뒀는데, 손풍은 그 즉시 의기양양해져서 검마에게 일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낙일방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검마를 바라보더니 포권을 하며 예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금 대협이시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네 무공이 더 고강해졌군. 금포염왕과 같이 본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얼마전 검마 금옥기는 일생일대의 적수인 소마 신지림과의 결전을 치룬 참이었다.
용호상박을 방불케하는 그 치열한 격전에서 검마는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고,
바로 그 결전 장소에 종남파의 핵심 인물인 금포염왕 노해광과 낙일방 등의 종남파 문인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딱!
"아이고!"
낙일방은 손풍의 뒤통수를 소리나게 때리고는 검마에게 재차 허리를 숙였다.
"제 사질이 교육이 미흡하여 송구합니다. 그런데 금 대협께서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매 사형을 뵈러 온 것입니까?"
"괜찮네. 그럴수도 있지. 물론 상아(霜兒)도 봐야겠지만, 급한 용무는 따로 있네."
"따로 있으시다 함은?"
"진 장문인을 급히 뵈어야 하네. 중요한 일이야."
그런데 검마의 말에 낙일방은 한숨부터 쉬는 게 아닌가?
"장문인은... 지금 몹시 바쁘시기에 뵙기 어렵습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손풍은 그렇다치고, 말이 통할 거 같았던 낙일방마저 이런 말을 하자 검마는 끓어오르는 노기를 참기 어려웠다.
신목령주와 소마가 세상을 떠난 지금 검마는 사실상 마도제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누가 감히 검마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겠는가?
검마는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이 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재촉했다.
"종남파가 재기에 성공하여 아무리 욱일승천한다지만 이런 태도는 좀 당황스럽군. 나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닐세. 종남파에도 중요한 일이야."
그러자 낙일방의 눈빛이 변하는 게 아닌가?
"혹시 금대협은... 종남파의 실전된 무공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단도직입적인 낙일방의 말에 검마 또한 놀라 되물었다.
"자네, 짐작가는 게 있는 모양이군?
그러자 낙일방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산문 앞에 늘어진 줄을 가리켰다.
"천하공부출종남(天下功夫出終南)이라, 본 파의 무공 및 파생된 무공이 한 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금옥기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질문했다.
"그럼... 저 줄이 모두 종남파에 무공을 반납하러 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다시 보니 산문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은 총 세 개의 줄이었고, 각각의 줄은 족히 백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각각의 줄 옆에는 작은 표지판으로 갑(甲), 을(乙), 병(丙)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게 아닌가?
검마의 질문에 낙일방은 '갑'이라 쓰여진 표지판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무공 반납은 갑 줄에 해당합니다. 귀문은 을 줄이고, 상거래 및 계약은 병 줄이지요. 대협께서 반납하고자 하시는 본 파의 원류 무공이 무엇입니까?"
"...낙뢰구검일세. 변형된 형태로 내가 습득하고 있었지."
검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원래는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직접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산문을 통과하지도 못할 거 같았다.
그러자 낙일방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작 말씀하셨으면 일이 더 빨리 되었을겁니다. 제가 방명록을 대신 작성해드리지요. 낙뢰구검은 어떤 형태로 이어졌습니까? 비급? 도해? 구결?"
"구결일세."
그러자 낙일방은 거침없이 방명록에 해당 사항을 적어가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방문자 : 우내사마 검마 금옥기]
[방문 목적 : 갑종 중 제이항 - 무공 반납, 낙뢰구검 변형 형태]
[세부 내용 : 구결 형태로 반납 / 시연 필요함]
[중요도 : 상중중(上中中)]
낙일방은 바로 방명록 사본을 하나 만들더니 손풍에게 쥐어주며 일렀다.
"즉시 태평각(太平閣) 비서실의 왕옥지 사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고 답신을 얻어오도록."
부리나케 달려가는 손풍을 흘깃 바라보던 낙일방은 검마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낙뢰구검은 본 파에서도 중요한 무공이니, 이쪽 귀빈 줄로 오십시오. 한 시진 안에 장문인을 뵈실 수 있을 겁니다."
낙일방은 검마를 귀빈 줄로 안내했다. 과연 산문 옆에 마련된 그늘에 부티가 나는 소수의 인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문 끄트머리에 한 거지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노인으로 보이는 그 거지는 대기하다가 무더운 햇볕에 탈진한듯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있었다.
검마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낙일방에게 질문했다.
"제 아무리 천하공부출종남이라지만, 개방에도 종남파의 무공이 전해진건가?"
"저 사람은 거지가 아닙니다."
"허면?"
"갑종 줄에서 한 달 동안 대기하다보니 거지꼴이 되었을 뿐이지요.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으련만..."
검마는 낙일방이 말끄트머리를 흐리며 혼잣말을 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갑종이면 무공 반납이겠군. 한 달씩이나 대기할 일이 있나?"
낙일방은 아차하는 표정이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은 장문인께서... 저 노인은 맨 마지막 순번으로 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한달이나 줄을 선 그 노인은 넝마 같은 옷차림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듯 비루한 행색이 개방 뺨칠 정도였다.
대체 신검무적 진산월이 한달이나 만나주지 않는 그 노인은 누구이며 어떤 무공을 반납하러 온 걸까?
검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그러나?"
낙일방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실직고했다.
"저 노인은 성라검법의 실전된 세 초식을 반납하러 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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