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의 계절은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흘렀다.

장문인 진산월이 조익현을 꺾고, 서장의 전설 야율척마저 대결 끝에 굴복시킨 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이제 천하에서 종남파의 이름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공부출종남(天下武功出終南)'. 천하의 모든 위대한 무학의 뿌리가 종남에 있다는 명제 아래, 오만했던 무림 문파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이 숨겨왔던 종남의 근원 무공들을 바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 거대한 대세 속에서 천봉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강호를 오만하게 굽어보던 천봉선자(天峰仙子)들은 이제 종남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강호 변방의 허름한 주루 구석에서 숨죽여 지내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해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쥐새끼 같은 무명 제자들의 눈치나 보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옥봉(玉峰) 누산산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이를 갈았다. 그녀의 옆에 앉은 영봉(靈峰) 금교교 역시 안색이 귀신처럼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오직 수장 격인 백봉(白峰) 정소소만이 가라앉은 눈으로 주루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주루 안으로 네 명의 젊은 남녀가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허리에는 하나같이 종남파의 상징인 고풍스러운 장검이 걸려 있었다. 종남의 22대 제자들이자, 강호에 새로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후기지수들이었다.

정소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산월도, 낙일방도, 소지산도 아니었다. 이제 막 강호 출행을 시작한 듯한 새파란 애송이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자신들의 공력이라면, 저까짓 아이들 몇 명쯤 무참히 짓밟아 종남파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종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더니, 이제는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들까지 강호를 소요하는구나."

백봉 정소소가 차가운 비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한마디에 주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종남의 22대 제자 중 가장 전면에 서 있던 불퇴검 방화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로 옥라검(玉羅劍) 서문연상, 패왕권 손풍, 그리고 유성쾌검(流星快劍) 유소응이 묵묵히 정소소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분노도, 당황함도 없었다. 오직 천하제일문파의 제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담백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과거의 이름에 취해 대세를 보지 못하는 노배(老輩)들이 아직 남아 있었군."

유성쾌검 유소응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노배'라는 단어에 옥봉 누산산의 이성이 먼저 끊어졌다.

"이 가소로운 놈이!"

스 각각!

누산산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쌍환(雙環)을 휘둘렀다. 수십 년간 다져온 천봉궁의 비전 내공이 실린, 가히 일류 고수다운 매서운 일격이었다. 주루의 탁자들이 기세에 눌려 쩍쩍 갈라졌다.

그러나 유소응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쌍환이 자신의 미간에 닿기 직전, 신형을 한 보 뒤로 물렸을 뿐이다.

"무학의 이치가 이토록 비틀려 있다니, 가련하구나."

유소응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검 손잡이를 툭 치는가 싶더니, 주루 내부에 오직 한 줄기 유성(流星) 같은 광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종남의 정종 쾌검법이었다.

카강──!

날카로운 쇠소리와 함께 누산산이 자랑하던 쌍환이 허무하게 두 동강 나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아아악!"

누산산은 검기가 전신을 때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은 먼지와 핏물로 엉망이 되었고, 뒤틀린 기혈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바닥을 기어 다녔다. 단 한 초식. 자신들이 '애송이'라 비웃던 22대 제자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평생을 쌓아 올린 무공의 격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이다.

"산산아!"

영봉 금교교가 경악하며 은홍검을 뽑아 들고 손풍을 향해 쇄도했다.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수십 개의 검화가 사방을 뒤덮었다.

하지만 패왕권 손풍은 그 화려한 변화를 비웃듯, 그저 오른손을 묵직하게 내밀었다. 종남파 정종의 혼원진기가 그의 손바닥에 가득 찼다. 대교약졸(大巧若拙). 화려함은 없으나 대지를 부술 듯한 무게감이 금교교의 검화를 정면에서 압도했다.

콰아아앙!

"끄아학!"

금교교의 검신이 손풍의 손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마치 거대한 바위에 부딪친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금교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주루의 벽면을 들이받고 추잡하게 굴러떨어졌다. 입술 가득 검붉은 선혈을 뿜어내는 그녀의 눈에는 오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만이 서려 있었다.

마지막 남은 백봉 정소소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진산월이 아니라, 이제 막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종남의 까마득한 하급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무위는 이미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에 서 있었다.

"네, 네놈들이 감히 천봉선자의 위엄을……!"

정소소는 악에 받쳐 전력의 내공을 쥐어짜 냈다. 그녀의 전신에서 천봉궁 최고의 비전 절기들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앞을 막아선 불퇴검 방화와 옥라검 서문연상의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서늘했다.

"천봉의 무학은 이미 종남에 그 뿌리를 반납했거늘, 아직도 껍데기만 남은 무공으로 오만을 떠는가."

방화의 건조한 음성과 함께, 그와 서문연상의 장검이 동시에 허공을 그었다. 두 자루의 검이 만들어낸 검막(劍幕)은 정소소의 발악적인 초식을 마치 거대한 맷돌처럼 서서히, 그리고 철저하게 짓밟으며 해체해 들어갔다.

스스스슥…… 콰학!

정소소의 은홍검이 먼지가 되어 바러졌다. 그리고 방화의 검 끝이 그녀의 목덜미 바로 앞에, 서문연상의 검 끝이 그녀의 가슴 한 푼 앞에 정확히 멈추어 섰다.

터덕.

정소소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내공이 완벽하게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종남 22대 제자들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수치심과 공포, 그리고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 쌓아 올린 수십 년의 세월이 이 어린아이들의 일격에 한낱 재롱잔치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신을 완벽하게 파탄 냈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수백 배는 더 잔인한 능욕이었다.

"돌아가라."

불퇴검 방화가 냉랭하게 검을 거두며 말했다.

"너희가 아는 강호는 이미 끝났다. 이제 천하의 모든 무학은 종남의 이름 아래 움직인다. 고작 그 정도의 비루한 재주로 다시는 종남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네 명의 제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를 나섰다.

허름한 주루의 진흙 바닥에는 백봉 정소소, 영봉 금교교, 옥봉 누산산이 피와 눈물, 그리고 먼지로 범벅이 된 채 처참하게 엎드려 있었다. 천하제일문파 종남의 가장 어린 제자들의 발치에서, 천봉선자들의 오만했던 자존심은 흔적도 없이 짓밟혀 흩어지고 있었다. 사위에는 오직 패자들의 비참한 신음만이 쓸쓸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