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의 신비지처로 이름이 높은 천봉궁.
천봉궁의 창시자인 백모란은 본인 앞에 멀쩡하게 나타난 임영옥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네...네가 어찌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냐?"
임영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어요. 육합귀진신공은 태음신맥마저 능히 다스릴 수 있더군요. 덕분에 당신은 운이 나쁘게 됐지만."
"그,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릴!"
"복수에 눈 먼 당신의 악행도 이제는 끝이예요. 아, 게다가 복수마저 이루지 못하게 됐으니 당신에게 어울리는 하찮은 최후가 되겠군요."
"어림 없는 소리, 겁도 없이 제발로 내 앞에 나타난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임영옥이 나타난 순간부터 이미 한껏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던 백모란은 새하얀 강기로 물든 양손을 기습적으로 휘저었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백모란의 손에서 다섯 개의 꽃잎 문양 장인이 발출되었다.
격중되면 그 어떤 호신강기도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금강동인이라도 박살나고 만다는 전설의 수공, 염화옥수가 비선 이후 약 200년 만에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새하얀 염화옥수의 강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영옥은 태연하게 수중의 검을 쭉 내 뻗었다.
그러자 검끝에서 폭발하는 듯한 검화가 수십 개나 피어오르며, 단숨에 염화옥수의 꽃잎들을 잠식해갔다. 월녀검법 중의 절초인 옥녀산화였다.
'파아아-!'
이화제화(以花制花)라 해야할 지. 마치 살아있는 듯 내달리던 검화들은 모든 꽃잎을 집어 삼키고는 이내 백모란의 전신 요혈에 가 닿았다.
"마...말도 안되는..!"
"감히 본파의 무공으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가소롭군요."
"고작 월녀검법 따위에..이럴 순 없어..."
'쿵-!'
백모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고, 생기를 잃은 그녀의 가녀린 교구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100년이 넘게 증오를 양분 삼아 한 맺힌 삶을 살아온 마녀 치고는 지나치게 허무한 죽음이었다.
백모란의 시신은 태음신맥의 폭주로 인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영옥의 옆으로 하나의 인영이 내려섰다.
"왠지 으스스하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있어 사매?"
"그냥..그녀의 삶은 어땠을 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석동은 어떻게 됐죠?"
"그는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됐어."
"역시 그렇군요. 이제 조익현만 남았네요. 사형은 자신이 있나요? 그 자는 대라삼검을 모두 익혔다면서요."
"일전에 누군가 그러더군, 그 자가 검법 몇 개를 익혔든 상관 없다고.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제 쾌의당과의 긴 악연을 마무리 지으러 가자고."
진산월은 야율척과 중추절의 약속을 맺을 당시 각자 석동과 조익현을 제거하기로한 바 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 날 이후 야율척은 완전히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잠시간의 상념을 마치고, 두 사형제가 궁을 빠져나가려 몸을 돌리려던 순간, 대전의 커다란 기둥 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군. 멀리 갈 것 없네, 난 여기 있으니."
".....!"
진산월과 임영옥이 놀라는 사이, 조익현은 태연하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늙어 당장 관속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임에도,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두 사형제를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백모란의 제의를 거절 했다기에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새로운 짝을 찾은 거였군 그래?"
조익현은 말을 이었다.
"나 역시 그 방법만이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네. 잘 생각한 게야"
"...많아"
"많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곧 죽을 늙은이가 말이 너무 많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산월이 조익현에게로 쇄도했다.
비록 음양쌍반진이 경천동지의 위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본인의 무공에 절대적인 신심이 있는 진산월로서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는 수단이었다.
진산월은 처음부터 유운검법의 후반부 절초들을 펼치며 조익현을 압박하였으나, 조익현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수월하게 맞서왔다.
석동과의 대결을 통해 조익현을 가늠해보곤 내심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진산월은 석동보다 최소 한 수 이상 뛰어난 조익현의 무공 수위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침착하게 공세를 이어갔다.
각자 서로의 수준에 맞는 상대를 갈구해왔던 둘은 격렬하게 격돌했고, 순식간에 300여 초가 지나갔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돌 끝에 비산하는 먼지가 가라앉고, 약 5장의 거리를 두고 약속이나 한 듯 멈춰 선 둘은 승부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조익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사실 석동과는 승부가 난 지 오래라네. 자네라는 변수가 생겨 더 이상 손을 쓰지는 않고 있었지만 말일세."
"....."
조익현은 별다른 대꾸가 없는 진산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대라삼검이 종남파의 무공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명백한 억지라네. 검선은 미인상의 무공을 개인의 창작물로 공언했고, 나는 그의 후손이니 말일세."
"긴 세월을 돌아왔네만, 나는 결국 원래 내 것이었던 세 초식을 모두 익혔고, 얼마 전에는 세 초식을 하나로 일통할 수 있게 되었네."
"....."
"내심 나는 당년의 검선이 살아 돌아와도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네. 대라무극(大羅無極)의 첫 희생자가 자네라니 더없이 흡족하군 그래."
예상은 했지만, 막상 조익현의 입에서 대라삼검을 합일 했음을 확인한 진산월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으나, 이내 늘어뜨린 용영검을 들어 중단세를 취하며 나직히 읊조렸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
용영검에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고, 진산월은 작심한듯 안광을 폭사하며 용영검을 앞으로 힘차게 내 뻗었다.
이 일검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모든 방위를 점하고 날아드는 검의 폭격 같기도 했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구름의 해일 같기도 했으며, 빛도 가를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쾌검 같기도 했다.
종남 무공의 정수가 담긴 일초가 폭사되었고, 조익현도 이내 출수했다.
'.....'
귀라도 멀어버린 것일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꽤나 멀찍이서 지켜보던 임영옥은 예상보다 거센 충돌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둘보다 먼저 혼절하고 말았다.
"이..이것이..검정중원인가.."
"나도 잘 모르겠소...그저 검이 응당 나아가야 할 길(劍路)을 향해 뻗었을 뿐."
"그렇군...검로라...나는 무슨 길을 찾아 헤맸던 것인가..."
'털썩'
온 몸의 경맥이 파열된 채 처참한 시신이 된 조익현을 보며, 진산월은 그대로 실신했다.
이윽고, 하나의 시체와 하나의 초주검 사이로 한 인영이 걸어왔다. 오랜 기간 종적을 감췄던 야율척이었다.
"후...진 장문인, 진심으로 놀랍소. 내 드디어 당신의 최절초를 보았으나, 다음에 같은 검법을 다시 상대한다 해도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구료. 진심으로 유감이오. 잘 가시오."
야율척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 뒤 수도를 들어 떨구어진 진산월의 머리를 겨누었다.
"멈추시게"
난데없이 들려온 사람의 소리에 놀란 야율척은 황급히 공력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두 중년 남녀가 있었고, 한참 동안이나 기억을 되짚은 끝에 간신히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들은, 곽산쌍려가 아니오?"
그러했다. 그들은 안휘성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여불회, 기아향 부부였고, 세간에서는 그들을 곽산쌍려라 불렀다.
"어머나, 서장의 지배자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 알아봐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하하하 그러게 말이오. 아무래도 우리가 출세한 모양이오"
야율척은 난데없는 그들의 등장에 일순 당황하였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곤 물었다.
"당신들이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일 리는 없고...설마 유중악이나 곽자령 같은 치들을 믿고 이곳에 나타난 거요?"
여불회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물론 아닐세, 그들은 자네를 감당할 수 없지."
"그렇다면 대체 무슨 배짱이란 말이오?"
"하하하, 천하의 야율척이 눈은 뜨고 있으되 장님과 다름이 없구나"
여불회는 호탕하게 웃으며 턱밑을 어루만지다 대뜸 피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야율척은 여불회의 달라진 태도에 긴장한 채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으나, 이내 여불회가 진짜 얼굴을 드러냈음에도 전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중원 무림에 과문하여 당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겠소. 당신은 대체 누구요?"
여불회는 대답 대신 아내 기아향을 돌아 보며 말했다.
"아향, 아니 란향 준비됐소?"
"당연하지요. 우리 부부가 얼마나 끈끈한지 저 서장의 무뢰배에게 보여주도록 해요."
곽산쌍려. 아니 임장홍과 두란향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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