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조 유민[편집]
후금의 공세가 요동을 공격하자, 많은 요동의 명나라 백성들이 일단 안전한 조선으로 피신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수군 요새를 건설하고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은 \'상국(上國)\'의 백성과 군대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심하게 횡포를 부려서 조정에서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고 지역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이 요동 난민에 대한 감정은 물론 명에 대한 감정도 상당히 나빠져서, 모문룡이 죽고 가도를 토벌하게 되자 조선 군대는 가도의 명나라인들을 개박살 내고 철저하게 살육한다. 게다가 명나라가 망할 당시 투입된 청군에는 조선인 출신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정규군의 파병 병력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기사)
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수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시기 수군 도독으로 참전하였던 진린의 후손이다. 명나라 무신들은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와의 전투에 나섰던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청나라 치하에서는 좋은 꼴을 보기 어려웠던 것. 여러 차례의 전란과 기근으로 인구가 크게 부족해 출산 장려 정책이라도 실시해야 할 판이던[47] 조선으로서는 이민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인구 흡수를 위해 환영했으며, 청나라에서는 명나라 유민들의 쇄환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하고 각 지역에 나눠 정착시켰다.
인조 대부터 시작된 망명은 현종 대에 절정을 이루어 수십명 단위의 유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우가 많았고, 후일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은 요동에서 명나라 출신 인물들과 친해졌는데 왕이문(王以文 : 일명 王鳳 岡)·양복길(楊福吉)·풍삼사(馮三仕)·왕미승(王美承)·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정선갑(鄭先甲)·황공(黃功) 등의 8인이 반청복명을 위하여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훈련 도감에 속한 명나라 출신 아병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명나라 궁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매우 장수하여 숙종 시기까지 살았다. 아마 전체 숫자는 적어도 수만 단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8] 그리고 청나라는 겉으로는 송환을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모른 척 했다. 어차피 불만 세력이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청나라 입장에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훗날 새로운 불만 세력들이 청나라를 무너뜨렸지만
명나라 출신 유민들은 전세를 줄여주거나 요역에서 몇 년간 감면 해주는 등 여러모로 우대받은 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항왜처럼 세금도 안 내고 자기네들끼리 뭉쳐 살면서 따로 놀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숫자가 모문룡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많긴 했지만 대신 모문룡 세력처럼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뒤를 봐주는 명나라도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조선 조정과 사대부, 특히 숙종은 명나라 유민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는 건 몰라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참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금 면제를 핑계로 그 이상의 부역을 강제 부과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유민들의 귀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영조때부터 다시 이들을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명나라 유민들을 일반 귀화민인 향화인과는 달리 황조인(皇朝人)이라고 불렀다. 이전에도 귀화한 사람들은 향화인이라고 불렀고 여진족이나 일본 귀화인은 여전히 향화인이었지만, 명나라 귀화인은 특별히 우대하느라 명칭을 달리했다. 명나라 출신 유민들에게는 충량과 같은 특별한 과거를 실시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은 관직을 주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다른 향화인보다 우대했다. 그렇다고 엄청난 특혜를 받은건 아니고, 그냥 일반 양민과 비슷하거나 조금 혜택을 받은 정도이다. 정조도 이 같은 우대방침을 이어갔고, 이후 우대정책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조선이 사라지는 고종때까지도 어느정도는 우대정책을 유지했다. 명나라 유민들은 이주해온 유민들이라서 농토가 없었던지라 포졸등 하급 군직에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는 복식이 유사하였고,[49][50] 명나라가 청나라에 침공당하여 멸망한 뒤에도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홍치제 때 고려양 폐지한 건 뭐지?.그 때문에 명나라 문화가 조선에서 보존되는 효과가 일어났는데,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는 한족의 복식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족이 겪은 문화적 상실감을 조선에서 보충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후금의 공세가 요동을 공격하자, 많은 요동의 명나라 백성들이 일단 안전한 조선으로 피신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수군 요새를 건설하고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은 \'상국(上國)\'의 백성과 군대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심하게 횡포를 부려서 조정에서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고 지역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이 요동 난민에 대한 감정은 물론 명에 대한 감정도 상당히 나빠져서, 모문룡이 죽고 가도를 토벌하게 되자 조선 군대는 가도의 명나라인들을 개박살 내고 철저하게 살육한다. 게다가 명나라가 망할 당시 투입된 청군에는 조선인 출신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정규군의 파병 병력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기사)
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수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시기 수군 도독으로 참전하였던 진린의 후손이다. 명나라 무신들은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와의 전투에 나섰던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청나라 치하에서는 좋은 꼴을 보기 어려웠던 것. 여러 차례의 전란과 기근으로 인구가 크게 부족해 출산 장려 정책이라도 실시해야 할 판이던[47] 조선으로서는 이민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인구 흡수를 위해 환영했으며, 청나라에서는 명나라 유민들의 쇄환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하고 각 지역에 나눠 정착시켰다.
인조 대부터 시작된 망명은 현종 대에 절정을 이루어 수십명 단위의 유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우가 많았고, 후일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은 요동에서 명나라 출신 인물들과 친해졌는데 왕이문(王以文 : 일명 王鳳 岡)·양복길(楊福吉)·풍삼사(馮三仕)·왕미승(王美承)·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정선갑(鄭先甲)·황공(黃功) 등의 8인이 반청복명을 위하여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훈련 도감에 속한 명나라 출신 아병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명나라 궁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매우 장수하여 숙종 시기까지 살았다. 아마 전체 숫자는 적어도 수만 단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8] 그리고 청나라는 겉으로는 송환을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모른 척 했다. 어차피 불만 세력이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청나라 입장에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훗날 새로운 불만 세력들이 청나라를 무너뜨렸지만
명나라 출신 유민들은 전세를 줄여주거나 요역에서 몇 년간 감면 해주는 등 여러모로 우대받은 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항왜처럼 세금도 안 내고 자기네들끼리 뭉쳐 살면서 따로 놀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숫자가 모문룡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많긴 했지만 대신 모문룡 세력처럼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뒤를 봐주는 명나라도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조선 조정과 사대부, 특히 숙종은 명나라 유민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는 건 몰라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참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금 면제를 핑계로 그 이상의 부역을 강제 부과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유민들의 귀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영조때부터 다시 이들을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명나라 유민들을 일반 귀화민인 향화인과는 달리 황조인(皇朝人)이라고 불렀다. 이전에도 귀화한 사람들은 향화인이라고 불렀고 여진족이나 일본 귀화인은 여전히 향화인이었지만, 명나라 귀화인은 특별히 우대하느라 명칭을 달리했다. 명나라 출신 유민들에게는 충량과 같은 특별한 과거를 실시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은 관직을 주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다른 향화인보다 우대했다. 그렇다고 엄청난 특혜를 받은건 아니고, 그냥 일반 양민과 비슷하거나 조금 혜택을 받은 정도이다. 정조도 이 같은 우대방침을 이어갔고, 이후 우대정책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조선이 사라지는 고종때까지도 어느정도는 우대정책을 유지했다. 명나라 유민들은 이주해온 유민들이라서 농토가 없었던지라 포졸등 하급 군직에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는 복식이 유사하였고,[49][50] 명나라가 청나라에 침공당하여 멸망한 뒤에도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홍치제 때 고려양 폐지한 건 뭐지?.그 때문에 명나라 문화가 조선에서 보존되는 효과가 일어났는데,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는 한족의 복식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족이 겪은 문화적 상실감을 조선에서 보충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