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큼직큼직한 국책사업을 많이 했슴.
금나라,거란족 막기위한 천리장성을 만든 것이라든지...
해인사에 불교법전 팔만대장경이라던지...
항상 보따리 싸놓고 도망갈 만반의 태세를 다 준비해 놓고,
행여나 고려충신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곧바로 전주이씨
가족들만 명나라로 톡낄 계획만 짜놓았기 때문에,
그냥 지들 왕권 유지되는 최소한의 일만 한 거임.
(이게 나중에 나라가 위태로우면 항상 강화도, 남한산성으로
톡끼는 것으로 표출됨. 명나라가 망할 쯤 망명할 곳이 사라졌으니)
본인 생각엔, 이성계를 비롯한 전주이씨들이, 지들이 세운 나라가
500년씩이나 갈 거라고는 전혀 상상 못한 것 같음. 그냥 고려호족들이
언젠간 반란을 일으킬테니, 그전까지 잠깐의 interim정권으로
명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줄 때까지 어떻케든 지켜보자... 라는 생각으로.
그러니, 이씨조선은 굴직한 국책사업같은게 없었던 거임.
그냥, 명나라와 함께 북방민족들 정벌이나 하러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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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런 배경속에서 세종이 즉위했을 당시를 보자면,
이 때는 이성계가 조선을 만든지 26년째 되는 해였슴.
고작 26년밖에 안지난 거임. 고려망하고 세종즉위까지가.
즉, 세종 당시 대신들은 대다수 고려 출신의 충신들이었다는 얘기.
그 충신들 대다수는 젊었을 20대쯤에 갑자기 나라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을 경험한 세대였을 뿐.
그렇다면, 세종때 집현전 학자들 또한 전부 다 실은 고려때
집현전 학자들인데 나라만 바뀐 거임.
[세종때 대다수 아직 고려 출신이었던 집현전 학자들]
원래 고려때 추친하려 했던 국책사업들이었을 가능성이 큼.
계중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게 불교계와 협력해서 추진한
표음문자 발명, 백성들에게 배포하는 사업.
장영실의 온갖 발명품, 등등
원래 고려에서 국책사업으로 추친했던 것인데,
나라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차질이 생긴거임.
더군다나, 이씨조선은 불교계 승려들을 궁궐에서 전부 다
쫓가내고 불교을 억압했슴.
하지만, 고려때부터 있었던 집현전 학자들은 불교계와 시작한
이 국책사업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세종을 꼬득였던 것 같음.
고려말때 수년, 수십년의 노력으로 개발했던 표음문자인데,
나라가 바뀌어서 없었던 것으로 하기엔 그동안의 노력이
너무나 아까웟던 거임.
이런 국책사업들을 세종이 이어받은 것이고, 본인 생각엔
신숙주와 박팽년이 세종을 많이 꼬득인 거임.
세종은 우매한 백성들 절대로 글을 가르쳐 줄 마음이 없었슴.
그런데, 이 집현전 학자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꺼라는 식으로
세종을 설득한 것으로 판단됨. 고려때 시작된 표음문자의 창제가
세종때 계속 하도록 설득시킨 것이고, 세종은 최소한 이 일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추친해왔던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이런 불교계에서 추친하는 표음문자 사업은
이씨조선의 기조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거든. 이씨조선은
명나라 한족을 받들고, 조선민들은 우매하게 놔둬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한말 불경이 아닌 성경이 번역되기까지
이씨조선에선 한글을 거의 쓰지 않은 거임)실제로, 한글이 창제되고 나서도, 어디 조정에 쓴다던지,
백성들에게 배포한다든지 그런 일 전혀 없었슴. 한글창제후
곧바로 불교법전을 백성들이 읽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은 했지만.
즉, 한글창제는 불교계와 고려때의 충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을 설득해서 고려때 시작된 국책사업을 결국 성공적으로
완성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집현전 학자들 + 신미스님이 한글창제 이후 번역된
불교 법화경언해]

세종의 입장에서도, 이미 고려때 한참을 진행한 고려국책사업을 조선이 들어섰다고 그냥 뭉갤 수는 없었을 꺼임. (세종시 이죄명이 계속 한다잖아. 그런식임)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도 쎄었을테니깐. 그래서, 불교를 억압한 이씨조선이었지만, 그래도 표음문자 창제 사업만큼은 끝을 보게 해주자, 그냥 안쓰면 된다. 라는 식으로 계속 추진하게 세종이 허락한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