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보다 도입이 더욱 늦은 것은 배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장김치를 담그는 결구배추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추를 먹기 시작했을까? 고려시대의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시로 읊은 여섯 가지의 채소(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에 배추는 없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서인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원시형 배추를 뜻하는 송(菘)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이 책은 치료를 위한 처방전들을 엮은 것으로, 고려 시대는 배추가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쓰였으며 적어도 13세기에는 배추가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세기부터는 국내에서 발간된 농사에 관한 책에 배추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이때쯤은 배추가 전국적으로 재배되는 중요한 채소의 하나가 되었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쓰였다고는 할 수 없다. 이때의 배추는 결구배추가 아닌 볼품없는 벌어진 배추였기에 겉절이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김치의 재료로는 쓰인 것 같지 않다.
조선시대 최세진의 <훈몽자회>나, <중종실록>, <선조실록>과 같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무역품 목록 가운데 배추 종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국내의 배추 종자를 생산하는 기술이 미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정조 때의 실학자 박제가는 "배추는 중국 북경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어야 좋은 것이 생산되고 농가에서 채종한 종자를 3년만 계속 심으면 순무가 되어버린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되었으며, 중국에서 수입하는 귀한 종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배추는 여전히 귀한 작물이었을 뿐, 서민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 1906년 지금의 농촌진흥청 전신인 권업모범장이 설립되면서 품질이 우수한 배추 품종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육종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종묘 회사를 통해서도 배추 종자가 들어왔다. 바야흐로 배추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주로 먹는 결구배추가 우리나라에 제대로 보급된 역사는 겨우 100년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요즈음 우리가 먹는 통배추가 전국에 보급된 것은 20세기로 들어오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김치의 재료는 무나 순무를 가지고 담근 깍두기와 나박김치가 대종이었으며 파, 부추나 갓을 가지고도 김치 재료로 썼을 것이다.
김치의 재료가 다양했다는 것은 요즘도 남아있는 고들빼기김치처럼 식물의 뿌리까지 통째로 쓰는 김치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김치의 주재료였던 무도 사실은 옛날 무와는 다르다. 옛날 조선무는 지금 무보다는 훨씬 작은 것이었다. '왜무'라고 했던 것은 길쭉한 무였고, 지금에서 보통 쓰이는 무는 나중에 개량된 종자다.
나박김치는 무를 얇게 썰어 김치를 담근 것을 이르는 말로 변질했지만 원래 무를 이르는 '나복(蘿卜)'이라는 중국어에서 온 말이다. '나복'이 '나박'이란 말이 된 것이고 그냥 순수하게 무김치를 뜻하는 말이었다. 무김치가 주종일 때에는 이런 구분을 별로 하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배추김치가 김치의 대종을 이루면서 이런 구분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김치 하나면 고봉밥도 뚝딱
그렇다면 "김장김치를 포함하여 배추김치가 김치의 대종을 이룬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가 결론이다. 물론 무와 여러 가지 채소를 가지고 김치를 담그기는 했겠지만 100년 이전의 김치는 지금의 배추김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수라상에 올라간 김치를 보아도 무로 만들었지 배추김치는 보이지 않는다.
김치의 제법은 오래되었지만 요즘과 같은 김치를 완성한 것은 100년 남짓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와 순무를 가지고 담근 김치는 결국은 먹기 좋은 통배추가 들어오면서 젓국과 고추, 해산물이 어우러지면서 화려한 김치로 꽃을 피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