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주거住居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모두 모초茅草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오직 불사佛寺·신묘神廟[註031] 및 왕궁王宮·
기와官府만이 기와를 쓴다. 가난한 사람이 많다. 겨울철에는 모두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덮힌다."-구당서 고(구)려전
연개소문 정권은 최초의 공산주의적 정권이었을 것이다.
귀족들은 전부 다 죽이고 왕을 토막내고도 정권이 유지되었다는건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엄청난 전쟁을 여러차례 치루었음에도 천리에 걸쳐 장성을 영류왕이 지었다는건
백성들이 혹독했다는거고. (구당서 고려전 보면 당시 고구려는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경관을 허문건 수나라를 물리친 무장들과 백성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린거고,
귀족들은 전부 당나라에 아부하기 바빴으며 천리장성 공사에서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연개소문이 귀족들 전부 다 죽이고 왕까지 죽인건 거의 왕정정치를 부정하고
귀족에 의한 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반란이 안일어나고 민중들이 외세에 열심히 대항한걸로 보아
연개소문의 대막리지 직위는 일종의 수령제였으며, 최초의 공산주의적 정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이 집권 직후 당나라의 도교를 들여오고, 신라 정벌에만 매진한걸로 볼 때
그의 반란 이유는 반당이냐 친당이냐가 아니라 지배층에 대한 분노였다.
왕과 귀족의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연개소문의 생각은 당시 고대 사회에선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기에
당나라 기록들과 신라 기록들에선 철저하게 무조건 사악하고 잔인한 놈이라고 적혀져야했다.
연개소문은 분명 노비 해방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대부분 군사화시켰을 것이다.
고구려가 당태종,당고종의 집요한 공격에도 집요하게 무너지지않은건 바로 그런 대규모 인력과 민심 마저 확보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우호를 취할뿐,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내정간섭하면 사신을
가차없이 가두는 과감한 행동을 여러차례 보였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유럽 강대국들에 의해 반드시 파괴되어 사라져야될 죄악이었듯
고구려 역시 그런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者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註053]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泉氏[註054]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 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동부東部[註055]대인大人[註056] 대대로大對盧[註057]이다. [그가] 죽자,
개소문蓋蘇文이 위位를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攝職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建武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建武 아우의 아들인 장藏[註058]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註059]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莫離支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용모가 걸출하고 준수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관복冠服은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다.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귀인貴人을 시켜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밟고 말을 타며, 출입出入할 때는 군사를 벌려 놓고,
큰 소리로 [행인行人을] 엄격히 금하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하여 갱곡坑谷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신당서 고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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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의 주역..... 더불어서 고려를 나락으로 떨어 뜨린 무신정권도 오늘날 북괴랑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