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동아시아 최초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정관貞觀] 16년(A.D.642; 高句麗 寶藏王 1) 에 서부西部[註061]대인大人[註062] 개소문蓋蘇文[註063]이
섭직攝職하여 [왕王을] 범하려 하자,[註064] 여러 대신大臣들이 건무建武와 의논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사전에] 누설되자, 이에 소문蘇文은 부병部兵을 모두 불러 모아 군병軍兵을 사열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城의 남南쪽에다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놓았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보게 되었는데,


소문蘇文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신大臣을 모조리 죽이니, 죽은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다. 이어서 창고를 불사르고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建武를 죽인 다음,[註065] 건무建武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註066]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스스로 막리지莫離支[註067]가 되니, [이는] 중국中國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중서령兼中書令에 해당하는 직職이다.[註068]
이로부터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소문蘇文의 성姓은 천씨泉氏이며,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형체形體가 아주 걸출하였다.
몸에는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註069]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언제나 그의 관속官屬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밝고
말에 타며, 말에서 내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외출外出할 적에는 반에는 반드시 의장대儀仗隊를 앞세우고,
선도자先導者가 큰 소리로 행인行人을 벽제辟除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여 모두 스스로 갱곡坑谷으로 뛰어 들었다. "-구당서 고(구)려전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여 모두 스스로 갱곡坑谷으로 뛰어 들었다. "-구당서 고(구)려전
군대가 되지못하는 이들, 쓸모없는 자들은 지하갱 골짜기로 가서 철 캐는 막노동이 되었다는걸 알 수 있는 기록.

"이에 태종太宗은 시신侍臣들을 돌아 보며
“막리지莫離支는 그의 군주君主를 시해하고 대신大臣을 다 죽였으며, 용형用刑이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구당서 고(구)려전

"개소문(蓋蘇文)[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泉)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東部)[혹은 서부(西部)라고 한다.]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그 직을 임시로 맡을 것을 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쫓겨나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잇게 되자 흉포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논의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部)의 병사를 모두 모아 마치 사열할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대체로 보아 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 그리고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겸중서령(兵部尙書兼中書令)의 직위에 해당한다." -개소문 [蓋蘇文] 삼국사기
위 기록을 통해 알수있는 사실.
1. 연개소문은 귀족들이고 신하들이고 '전부' 죽여버려 귀족,지주,신하를 전면 부정하였다.
2. 왕을 토막내 죽여서 왕정 통치도 사실상 부정시켰다. 보장왕은 천황같은 상징적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3. 형벌을 사용함이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대로 죽였다. = 인민재판
백성들은 두려워서 갱곡으로 뛰어들었다. = 군대가 되지못하는 이들은 철광 노예로 부려먹음.
4. 막리지라는 '독재적 수령'이 되고 세습독재함. 막리지라는 직위는 '병부상서 겸 중서령'인데. 한마디로 최고군사대장군.
국방위원장 혹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랑 똑같음.
의장대로 하여금 매우 웅장한 대규모 군사행렬도 벌임. 기록의 묘사로 보아 그 위용이 엄청나게 대단했던거같다.
연개소문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였고 동아시아 최초의 수령이었다.
연개소문 정권의 지배층은 평양조선처럼 최고사령관 연개소문과 그 아래의 장군들로 구성되었으며
거기에 귀족,신하,지주 따윈 존재치않았다.
장군들은 모두 그 출신들은 바부 온달처럼 한미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 사회는 장군이 되는건 쉬워도 귀족이 되기는 어려웠다.
왜냐면 귀족,신하,지주가 깡그리 뒤지거나 인민재판으로 죽어나가는데.
연개소문에게 대항한 장군이 중국계 양만춘 빼고 한 사람도 없던걸 빼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귀족,신하,지주 이 인간쓰레기들을 전부 다 죽여버렸고. 왕까지도 토막내 똥변기에 집어넣어버려서
그의 나라에 노비 따윈 존재하지않았고, 있어봤자 군대가 되지못하는 자들을 철광 노예로 부려먹은 것뿐이었다.
그러자 고구려는 순식간에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거가車駕가 안시성安市城[註095] 북쪽으로 진주하여[註096] 진영陣營을 벌려 놓고 군사를 내보내 성城을 공격하였다.
고려高[句]麗의 북부욕살北部傉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耨薩 고혜진高惠貞[註097]이
고려高[句]麗·말갈靺鞨의 무리 15만명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였다."-구당서 고(구)려전
당태종의 1차 침공 당시 이 15만 대군은 주필산에서 전멸해버리고 3만명만 탈출해서 오지만, 그러나 고구려는 무너지지않았
고 멀쩡 끄떡했다.
이것은 봉건 지주제 그것도.. 중국 군현의 4개 군현을 합친 것 밖에 안되는 소국 정도에서의 나라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당나라 전문가 황룡도 항상 이 기록을 보며 무척 고심하고 의문스러워하고 이상하다고 여러번 여겼는데.
이 의문은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니 가능했던 것이었다.
왕을 토막내고 귀족,신하,지주 다 때려죽이고
형벌을 사용하기를 함정과 같이 하여 주민을 서로 고발시켜 남은 지주 조차 다 인민재판시켜 때려죽였고..,
연개소문 따르는 장군들은 경당에서 무술 배워서 장군된 바부 온달같은 애들 즉 서민들이니 당연히 연개소문에게 깝칠 이유가 없고
이런 상황이니 노비 해방은 당연 이루어지고 그러니 당연히 안시성 10만 대군, 주필산 15만 대군, 신성 10만 대군.
고구려 수군은 몇만인지 모르겠으나 당나라 4만 정예수군 바른거보면 분명 만만찮은 병력이었던거가고..
아무튼 이런 개사기 전력은 공산주의에서만 가능한거고...,
연개소문 자신은 수령이자 최고군사사령관 동지가 되어서 대규모 군사행렬 퍼레이드를 벌여대고..,
군사가 되기싫어하는 겁쟁이 백성이나 사상 불온 범죄자 등은 색출하여 철광 있는 갱 골짜기로 추방시켜 강제노동시키고.
겨우 좆빨아 살아남은 고연수,고혜진 조차 15만대군 중 3만군을 이끌고 무식하게 주필산으로 쳐들어갈 정도로 연개소문 수령을 지독히도 싫어했고 , 백암성 성주 손대음 역시 연개소문 수령을 지독히 싫어해 당나라에 투항한다.
고구려 왕자 약광도 더이상 남아있다가 인민재판당해 뒤질까봐 일본으로 도망가고.
백성들은 다 초가집에서 사는데. 왕족,귀족과 마찬가지로 잘먹고 잘살아 기와집으로 치장하고사는 고구려 불교 승려들도 뒤지는 인민재판 당햇던 모양인지 전부 신라로 튀어버려 고구려엔 종교란게 남지를 않아 연개소문 수령은 당나라 노자의 도교를 들여올 정도였고 심지어 절을 당나라에서 온 도교 도사의 사원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 사실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보덕화상 보덕이암' 편에 기술되어있다.
연개소문이 불교 박멸해버리고 도교 받아들인 이유는 공산주의이기 때문.
아나키즘은 도교를 좋아한다.
도교, 아나키즘, 공산주의 모두 세속적이고 돈에 쩔은 지배층의 통치, 인위적 통치를 부정한다.
도교를 숭배하여 한나라 왕조,귀족들,지주들에게 반란일으킨 황건적도 도교를 숭배했다.
불교는 지배층을 인정하지만 도교는 지배층을 싫어한다.
당나라는 도교를 이용했지만 연개소문은 노자,장자가 말하고싶었던 공산주의를 그대로 실현해줬다.
연개소문 말기~고구려 망한 직후 평양의 노자 도교 도사들에 의해 도입된 환웅 강림 신화도
사실은 한나라 시대 산동반도 무씨사 고분 화상석에 그려진 천제와 풍백,우사,뇌공의 강림도 개념을
가지고온 것이고, 곰,호랑이의 대립도 무씨사 화상석에서 곰과 호랑이 도철거인의 대립으로
나온다.
연개소문 수령은 자기가 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며, 연개소문의 모습은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김일성) 형체가 아주 걸출(뚱뚱)하고
몸에는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완전 김일성 그 자체.
그야말로 공산주의 그 자체...,
그럼 당연히 공산주의의 기본 아이템은 국유화된 협동농장은 필수.
아래 기록 보면 고구려는 기근이 거듭되자 사람들이 서로 약탈하여 팔고 아주 혼란이 되어버리는데.
협동농장 하다가 아주 좆망한 평양조선의 대기근 굶어죽는 사태랑 비슷해.




"태종太宗은 건무建武의 죽음을 듣고 거애擧哀하였다. 사신使臣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구당서 고(구)려전
" 현장玄獎이 돌아 와서 [사실대로] 아뢰자, 태종太宗은,
“막리지莫離支가 임금을 죽이고 [용형用刑을] 함정과 같이 하여 아랫사람을 너무 포학하게 다루니, 원망의 소리가 길에 넘치고 있다.
우리가 출사出師하는 데 명분이야 없겠는가?”"-신당서 고(구)려전

"태종太宗은,
“나도 [그 이유를] 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좋지 못한 일로서 고려高[句]麗를 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소문蓋蘇文이 군주君主를 시해하고, 또 대신大臣을 죽여 [제 야심을] 충족시키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구원해 주기를 목을 늘여 기다리고 있다. 의자議者들은 아직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신당서 고(구)려전
당태종은 역시 지주들의 신망을 얻어 용상에 앉아있는 황제의 옷을 입은 '양반'일뿐이다.
그에게 있어 고구려의 공산주의 혁명 소식은 엄청나게 놀랄 소식이었다.
이대로 가만 놔두면 혁명 사상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국운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응징해야하는게 당나라와 신라 김씨 왕조의 숙명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쳤으나 끔찍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가 이끌고간 군사가 육군이 10만. 정예 상륙 수군이 4만이었는데.
고구려는 사기적인 인구 동원을 벌여댔으니 당연했다.
연개소문은 요동 개모 현도 비사같은 낡은 퇴물성들에 연연치않고 안시성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수비전술. 그리고 수군으로 당나라 수군 4만을 수장시켜버리고,
당태종을 안시성 쪽으로 고립시켜 천천히 포위해가는 전술. 군량을 끊어버리는 전술을
벌여 겨울이 오자 당나라군은 동사자,아사자가 속출했고 당태종은 살기위해 요택으로 피신했으나
전부 전멸하고.
탈출 직후 당태종과 신하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있다.
얼마나 연개소문이 대단했겠으면 중원 정벌까지 벌여대서 산동성까지 가서 당태종을 맹렬히 추격했다는
경극 유형의 전설들이 산동성 강소성에 파다하게 퍼졌겠는가.
군주의 수치를 가려주는게 공자의 춘추春秋 이래로 유교 사관들의 전통 필법이었으니...,

귀족들을 전부 죽이고 왕을 토막내고 수령(대막리지) 독재 체제로 무사들과 민중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통치하고있는 연개소문이 김유신과 평화회담을 열고,
김유신이 김춘추 죽인 결과 최초의 남북 우호가 이루어져.
이렇게하여 남북조 구조가 이루어진건데.
그렇게 되니 적으로 삼아야될 대상이 중국이 되는데...,
연개소문은 사람이 착해서 남생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죽이는걸 하지않았다.
그 결과 남한을 먹기위해선 친중을 해야된다는 안시성 세력과 복수를 위해서 반중,친남의
평양 세력으로 갈렸을 거고.
남생은 아버지의 정책을 따라 반중,친남을 하자했으나 동생들이 안시성 세력과 연합해
형 남생을 쫓아내고 남생은 중국으로 튄다.
그 때 기근에 지진이 잇달아 터져대서 공산주의적 정치체제의
연개소문 정권은 살기위해 도둑질 약탈해대는 백성들로 인해 와르르 급속하게 무너져내렸다.
그 결과 고구려를 쳐들어온 이적,설인귀의 군대는 거의 무인지경 지나가듯이 성들을
너무나 쉽게 먹었다.
"이 해에 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남생男生[註124]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의 아우 남생男建·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여 각자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男生이 두 아우에게 쫓겨 달아나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여 성[城을] 사수死守하면서,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와 궁궐宮闕에 이르러 구원을 요청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자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응접應接케 하였다.
남생男生이 [국내성國內城에서] 몸을 빼 도망오자,
조서詔書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겸평양도안무대사兼平壤道安撫大使를
제수除授하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封하였다."-구당서 고(구)려전
우리 남양홍가도 연개소문피해서 신라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