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의 고모이니 나에게는 고모 할머니가 계셧는데<?xml:namespace prefix = o />
그고모 할아버지가 해방전 서란에서 제일큰 조선족 지주였다.
배급소를 여나무개 가진 정도였다. 아마 서란에서 사신
오래된 노인들은 김상진이라 하며는 다 아실것이다.
내가 70년대 우리 가정이 살던 고향으로 찾아 가보니
고모 할아버지가 살던집이 그동네의 소학교였다.
어려서 혼인하고 본마누라가 원산에
있고 원산에서 아버지가 소문난 지주인 그 고모 할아버지가
일본 동경에서 나의 고모 할머니와 대학을 다니든 중에 둘이 눈이 맞아서
필업후 고향으로 가지 않고 가죽 트렁크와 바이올린통 달랑들고
만주 우리집으로 오셨는데 봉건이 심한 전주이씨며 청춘과부로
어린 자식 들을 키우다 나니 성질이 험하여 암범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의 증조모가 들복지 않을수 없었다. 매일 바이올린이나 켜고
책이나 읽으며 소일 하니 장모되시는 증조모가 더욱 심하였다.
하루는 양복을 빼입고 서란 시가지를 갔다 오시더니
당시 서란에서 할빈까지 철로 부설을 일본사람들이 하는데
그침목을 맡아 가지고 한해동삼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가서
나무를 벌목하여 침목을 철로에 납품하고는 벼락 부자가
되였다 한다. 당시 일본에서 떡호박종자를 들여 와서는
산골의 중국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가을에는 그떡호박을
관동군에 납품하여 많은 돈도 벌엇다한다.
여하튼 돈버는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서란에 온지
불과 석삼년에 당지에서 제일큰 지주로 고모할머니와 자식이 없어서
첩도 두명을 두었지만 자식은 보지 못하였다.
아마 고모 할아버지의 모병이라 생각된다.
해방나기 전에 벌써 자식같이 생각하는 나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시기를 대일본은 망할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하였고 쏘련군이 들어 오니 앞으로는
공산공처 라 하시였다. 국민당이 길림까지 들어 오자
당시 서란 조선인 부녀회장을 맡은 고모 할머니와 함께
장개석위원장의 군대를 맞이할려고 국민당기발을 만들어 가지고
서란역에 매일나가 국민당 맞이를 하였다한다
그런데 오라는 중앙군은 오지않고 팔로군이 오자
이분들은 나의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 부부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89년 한국에 가서야 큰 삼춘 에게서 이분들이 해방후 한국에 건너같으며
서울에서 살다가 세상을 뜨셧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또한 고모 할아버지의 동생들이 아직 서울에 사시는 분이 계신다하여
귀국전에 서울에서 찾아 보았다.
당시 이미 80세 중반을 훨씬 넘기신 이분이 옛이야기를
하시다가 작으만한 트렁크에서 낡은 문서장을 꺼내시면서
이문서들이 그형이 서란에서 가지고 오신 각종 토지 문서들이라한다.
또한 그 분 부친의 이북에서의 땅문서도 꺼내 보이시였다.
나는당시 중국 문화 혁명때 배운노래가 생각났다.
[계급의 적들은 시시 각각 칼을 갈며 복벽을 꿈꾼다.]
공산당이 계급투쟁에 대한 론리가 나의 가정도 적대계급에 속하기에
제일 반감을 가졌엇지만.알고보니 확실이 계급투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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