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석기 후반 혹은 청동기 초기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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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을 바다동물은 파란색으로, 육상동물은 빨간색으로 나누어 CG를 덧그린 그림입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최대 5,000년전, 최소 3,000년전에 새긴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식별 가능한 것만 220~230 종류의 동식물들이 넓이 1미터, 높이 3미터 정도의 크기의 돌에
그려져 있습니다. 세계에도 유래가 드물정도로 대규모적인 암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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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이 있는 고래그림만 잠깐 보죠.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그림들은 어부들이 정말 근접에서 관찰하거나 사냥해서 고래의 특징을
꽤 오랜 시간 연구하지 않고는 그릴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고래의 종류도 긴수염고래, 긴수염고래, 향유고래, 귀신고래 등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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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뼈처럼 보이는 저 것은 배가 고래를 끌고 가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배 위에는 약 20여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고, 고래가 동그란 그림과 함께 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그란 것은 에스키모인들이 역시 고래사냥에 쓰는 것과 비슷한 도구라고 합니다.

저렇게 작살을 맞은 고래가 주는 저향을 줄이기 위해 쓰는 '무고'라는 도구는
고래가 빨리 지치고 또 고래가 죽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해주는 용도라고 합니다.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 초기로 볼수 있는 3000~5000년 사이에 울산 반구대 인들은
울산 근해에서 작은 규모이지만 선단을 꾸려 집단적으로 고래를 사냥할수 있는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울산에서도 저런 고래잡이가 성행했다면 일본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부산과 김해에서도
충분히 십수명이 작은 배를 타고 대마도를 경유하여, 오키섬과 북큐슈지역으로 이동이 가능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문제는 수렵어로인들이었던 신석기 혹은 청동기 초기인들이 구지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집단으로 일본 북큐슈로 이동했을 것이냐인데, 수렵어로인들이 자신의 터전을 버리는 상황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터전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때, 혹은 타부족이 침입하여 생존을 위해 이동해야 할 때, 아니면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중에 조난을 당하여 표류 후에 일본열도로 도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정착하는 상황 등...

아마 저 시대에는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북큐슈로 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인원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청동기 송국리 유적의 집단 거주민들의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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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600년전의 청동기 중기의 유적인 송국리 유적은 한반도에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대규모 취락으로 집자리만 51기로 3인 가족 기준으로 150명 이상이 모여 살던 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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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책으로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환호와 이중 환호를 파서 외부 칩입을 방비 했습니다.

벼농사를 지었고 쌀과 조를 저장하던 저장고와 대형 민무늬토기가 있었습니다. 수로가 있었고, 관개시설이 있었습니다.

의례용 청동기와 각종 농기구도 사용하였으며, 의례와 분묘 공간이 분리가 되어 있었고,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도 출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고인돌도 자리잡고 있는 송국리 유적은 한국 청동기 중기의 최상위 취락지라고 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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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기원전 10~5세기경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야요이문화彌生文化가 형성되었는데, 집자리는 물론 토기ㆍ마제석기・각종 건축물・환호・논 그리고 무덤에 이르기까지 송국리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송국리유적은 그 기원지로서 국제적인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근해를 이동하여 고래를 소규모 선단으로 사냥하던 경상도 남해지역의 항해술이 송국리문화로 대표되는 청동기 대규모 취락사회와 결합하면서 일본 북큐슈로 비교적 다수의 인원이 건너갈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송국리 문화가 2,600년전 탄생하였으니 이 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자리를 잡는데 약 200~300년이 소요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일본 북큐슈에서 발견된 2,300년전 탄화미와 관개수로, 마제석기 등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3. 국제무역으로써의 일본으로 이동

 

井上主稅(이노우에치카라)의 영남대학교 2007년 박사학위논문인 '嶺南地方 출토 倭系遺物로 본 한일교섭'의 결론부분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1단계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 영남지방과 북큐슈와의 교류인데 이는 영남지방에서 출토되는 야요이계 유물을 통해 알수 있다.

이시기에 열도에 한반도계통의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됨. 그래서 북큐슈의 수장이 철과 청동기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교섭. 한반도 세력과의 직접적인 교섭보다는 거제의 늑도유적과 같은 중개자를 통한 교섭함. 주로 김해와 늑도가 교역의 주요지역.

 

2단계는 진한과 변한과 큐슈노국사이의 교섭이 중심.

기원전후로 영남지방에 야요이토기가 급감하고, 왜계청동기가 출현.

이는 교섭형태의 변화를 의미. 한사군 설치 이후에 중국산 사치품이 등장.

진한과 변한의 철이 유통되면서 한반도 각지의 정치체계간의 활발한 교섭전개.

왜와도 철을 매개로 교섭. 늑도의 역할이 줄고 김해지역가 주요거점으로 등장.

 

3단계는 3세기 후반에서 5세기초로 야마토정권과 금관가야사이에 교섭이 주로 이루어짐.

이때부터 대성동고분의 파형동기 등과 같은 왜계유물이 많이 확인되어 대왜교섭의 중심세력이었을것으로 추정.

이시기부터 교섭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낙랑군이 멸망하면서 동아시아의 교역체계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남.

하여 금관가야와 왜의 통교 관계가 한층 강화. 하지만 4세기 후반이 되면서 왜계 유물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부장이 종료. 즉 그 정치적 관계에 다시 변동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백제와 왜의 통교 등 역시 국제 정세의 변화와 연관.

 

이노우에 치카라 박사의 논문을 살펴본다면 기원전 2세기부터는 한반도 영남지역과 일본열도는 긴밀한 교류와 무역이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본열도 입장에서도 그 당시에는 철이 생산되지 않았기에 한반도로부터 철과 청동기 등을 들여와야할 필요가 있었고, 한반도의 거제 늑도, 김해는 그 시기에 벌써 중국과 한반도 중부지방, 일본의 무역을 중개하는 곳 국제 무역항 거제 늑도 지역이 발생하였습니다.

신석기 후기, 청동기 중기시기에는 한반도 토착세력과의 인적 교류가 있었다면 기원전후로는 가히 국제적인 인적교류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항해술도 발달하였고, 어느정도 국가체계가 잡힌 상황에서 귀족 상류층들은 각종 사치품과 무기들을 수입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와 열도의 인적 교류는 적어도 신석기 후반에서 청동기 초기에는 벌써 시작이 되었고, 아마 그들은 한반도 남부의 토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국리 문화가 시작되면서 한반도 중부지역의 사람들이 한반도 중남부로 인구 확장 혹은 문화의 전파가 되었고, 이들도 김해나 부산지역에서 북큐슈로 다수가 넘어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기원전후로는 국가가 발생하면서 국제무역이 성행하였고, 이미 발달된 해로를 통해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 큐슈 혹은 돗토리 지역으로 이동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