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이 Geno 2.0 검사결과가 O2b1b-L682 CTS7620으로 나왔을 때만 해도 나올 것이 나왔다 싶어서 마음이

덤덤하기만 했는데, jeksh님의 친구인 경주최씨분이 나와 똑같은 O2b1b-L682 CTS7620으로 나오자 왠지 놀라운

느낌이다. 내 자신의 선조들께서 대대로 1000여년을 마한, 백제의 고토인 전라도 쪽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내

자신 스스로를 마한이나 백제인의 후손일 것이라고 여겨왔던 때문이다. 신라인, 그것도 신라 6촌장 중의 한 사람인

소벌도리의 후손인 경주최씨와 나의 혈통이 Geno 2.0 검사결과로는 완전히 같다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결국 신라인인 소벌도리의 후손이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집안의 족보가

고려 중엽 이상을 올라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억울하다. ㅎㅎ 이것은 바로 Geno 2.0 검사의 한계인 것이다. 나와 jeksh님의 친구인

경주최씨가 Big Y 검사를 한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우리 집안과 경주최씨 집안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이다. ㅎㅎ

 

그러나 일면 생각하면 O2b1b-L682 CTS7620이 결코 경주최씨에 한정된다고 할 수는 없다. 경주최씨 외에도

Y-STR상으로 17좌위가 나와 같거나 거의 비슷한 성씨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 모든 성씨에서 Geno

2.0 검사결과가 나와야 O2b1b-L692 CTS7620의 정체가 명확하게 들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면 또 생각해보면 O2b1b-L682 CTS7620이 나온 경주최씨분, 본관은 경주최씨임에 틀림없지만,

경주최씨분에게서 나온 이 SNP 자체가 경주최씨 문중에게서 나온 여러 SNP 중의 하나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경주최씨의 시조가 곧 O2b1b-L682 CTS7620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경주

최씨의 시조의 SNP는 따로 있는데, 후대에 O2b1b-L682 CTS7620이 경주최씨 집안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예초에 내가 추정했던 대로 O2b1b-L682는 예맥계 종족인데, 그들이 고구려, 백제, 발해 멸망 후 신라, 고려

땅에서 살다가 고려시대 이후에 신라계 성씨 속에 편입이 되거나,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자신의 성씨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일어나지만, 벌써 마음 속은 경주최씨분, 그분의 Geno 2.0 검사를 결과를

긍정하고 그를 나와 핏줄이 아주 가까운 집안으로 여기게 되는 마음이 가득해지니, 역시 사람의 마음은 이성 따로

감성 따로인가 보다. 그리고 신라 6촌장 소벌도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6촌장들이 고조선의 유민(遺民)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 또한 긍정하려는 마음 또한 강해지려하니 이거 큰일이다. ㅎㅎ

 

이제 여기에 신라 6촌장이 고조선의 유민이었음을 논증하는 글을 올린다. 물론 내가 쓴 글은 아니고, 이인철님이 쓴 

'신라정치경제사연구'라는 책에서 퍼온 것이다. 

 

 

 

 

고조선유민의 남하와 이들의 신라 사로6촌 지배층 형성과정 

 

 

 

경주 지역 지석묘의 시기적 하한은 기원전 2세기이다. 지석묘에 이어 경주 지역에 새로운 무덤 양식으로 토광목관묘가

등장한것이다.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1세기 초에 경주 지역에 토광목관묘를 축조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위만조선 후기의 혼란을 피해 내려온 고조선계 유민들이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도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고, 그 노인들이 전하여 오는 말에 자신들은 옛날의 망명인들로 秦役, 즉 진시황의

침입을 피해 한국으로 온 사람들인데,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위략에서는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는데, 그때 조선왕 否는 정략상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지에서 말하는 진역은 위략에서 말하는 진의 습격이다. 따라서 진역을 피해 조선의 유민들이 신라지역으로

왔다면 그 시기는 진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2년경이었다고 하겠다.

 

魏略에서는 또 위씨조선 우거왕이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 조선상 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쓰이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에 갔는데, 그때 따라가 산 자가 2천여 인이라 하였다. 여기서 진국을 삼한 이전 한반도 남부에 있던 나라로 보면

동쪽으로 해서 가는 진국은 진한, 즉 신라쪽일 것이다. 진국이 진번 바로 남쪽, 지금의 경기도 일대에 있던 나라였다고

해도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조선 유민의 남하로 인해 진국이 경상도 지역으로 밀려내려갔다고 생각되므로 이 경우에도

조선상 역계경을 따라온 무리들이 신라로 갔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漢의 침입으로 위만조선이 망하게 되었을 때 혹은 망한 직후에 전란과 한의 수탈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해 온 조선인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동해 간 곳 역시, 한강 남쪽의 경기 지역보다는 경상도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한강 하류는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서 유민들이 건너기 어렵다. 이에 어느 시기에나 유이민들은 북한강을 건너 남한강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듯하다. 자연히 남하해 온 유이민들은 제천 부근에서 충청도 쪽으로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백산맥을

넘어서경상도 쪽으로 갔는데, 위만조선의 유민들은 대개 소맥산맥을 너머 경상도 쪽으로 간 듯하다(토광목곽묘의 경우,

대부분이 낙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고, 금강 유역에서는 청주 송절동 유적이 있다(성철, 1997,[락동강 및 금강 류역에서

드러난 나무곽무덤의 류형])) 이같은 사실은 비단 경주뿐 아니라 경상도 일대에서 발견되는 서북한 계통의 토광묘가

입증하고 있는 바이다.(최근 조사된 경산 임당지역에서도 토광목관묘와 토광목곽묘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漢대의 화폐인

오주전이 출토되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유민들이 진 혹은 한의 침략과 수탈을 피해 남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에서 기원전2세기 말까지

5차례정도 이동해 온 것이 된다. 그러나 이는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커다란 사건에 따른 이동이고, 그 밖에도 수시로 주민의

남하가 있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주지역에 정착해야 하는 조선 유민들에게 토착민의 저항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사안이었을 것이다.

 

이에 조선유민들끼리 생존권적 결속이 이루어졌을 것이 예상된다. 반면에, 토착 원주민들은 지석묘의 분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러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물론 직접 자신들의 주거지와 토지를 빼앗긴 집단은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을 것이다.

조선 유민들이 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경주시내 방면의 원주민 마을의 저항은 강했을 것이다. 자연히 조선 유민들은 경주

외곽쪽 마을 주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원주민사회를 분열시키면서 경주시내 쪽 마을원주민을 정복 지배하는

형태로 정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과정에 조선 유민들은 6촌에서 각기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라건국설화에 6촌의 촌장이 모두 하늘에서 산 정상에서 내려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또한 6촌의 촌장이 이주민이었음을

나타낸다. 조선 유민들은 남하하기 이전에 이미 국가체제를 경험했기 때문에 경주 지역에 와서도 그러한 경험을 되살려 촌

단위의 행정조직을 형성하고 촌장을 선출하였을 것으로생각된다. 이처럼 조선 유민들이 6촌의 촌장을 비롯한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철기문화가 토착 원주민들에게 확산되면서 생산성이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져 갔을 것이다. 더구나 계속

되는 조선 유민의 남하는 지배층 뿐 아니라 피지배층에게 더욱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출현된 신라 국가는 사로6촌을 기반으로 성립되었으므로 그 영토 또한 오늘날 경주시 전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

계층상으로는 신라 국가를 출범시킨 주도 세력인 고조선 유민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토착민이 피지배층을 이루고 있어서 이것이

후대에 골품과 두품의 신분층으로 발전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 이인철 저 신라정치경제사연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