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왜관을 짓는 역사에 선방군 200명과 호남의 승군을 부역하게 하다
“왜관(倭館)을 새로 짓는 역사는 갖가지의 역군이 50여 만 명이나 되어야 하니,
(주)오늘날 경상남도에 있음.
호남(湖南)의 각 고을 중에 영남(嶺南)과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의 승군(僧軍)을 갈라주어 부역하게 하소서.”
하고, 또 도내(道內) 각 진포(鎭浦)의 선방군(船防軍)을 매달 2백 명씩을 차출하여 부역하게 하도록 청했다. 비국에서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시행했다.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8월 28일(갑술) 2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가 왜인을 접대하는 일이 약조 이외라고 뒷날의 폐단을 말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세화(李世華)가 폐사(陛辭)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했다. 이세화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절반이 왜관(倭館)에서 쓰는 것을 책임하여 수응(酬應)해야 하는데, (주) 수응 - 달라는 데로 다해줌..
요사이는 또한 왜인(倭人)을 접대하는 일을 해가야 하니, 이는 진실로 약조(約條) 이외의 일입니다. 한 번이라도 혹시 약조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뒷날의 폐단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인데, 이러한 일을 동래부(東萊府)에서 직접 상문(上聞)하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도신(道臣)과 함께 상의해서 치계(馳啓)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아뢰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나마 경상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절반은 나라살림에 쓰이지도 못했다. 일본에게 주었던 것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왜란 때 왜군의 태반을 섬멸했으므로 저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저들은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처럼 생각하여, 다시 왜란을 일으키면 중국이 필시 지원군을 보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조약대로 대마도에 매년 식량을 준다면 저들은 무모하게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다.…조약을 맺은 뒤 경상도 세금의 절반을 왜관(倭館)의 왜인들에게 주어서 남도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경상도인은 세금의 절반을 조센왕조에 절반을 일본에 지불하므로 반쪽바리로 수백년동안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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