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영호와 너무 과음을 한 탓도 있지만, 그가 말해준 소연이에 관한 일이 머리를 너무도 혼란스럽게 한다.
영호자식. 소문을 크게 퍼트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녀석은 말은 과장 되게 하긴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 놈이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사람이 살인 같은 걸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 소연씨 저에요. 오늘 만나서 할 얘기가 조금 있어서요."
"네? 아 뭔데요? 그럼 있다가 요 옆 공터에서 만날까요? 도시락도 싸갈게요."
"아.. 그런 일이 아니에요. 도시락은 됐고, 공터에서 3시쯤 만나서 얘기 좀 해요. 이따 봐요."
"네~"
옷을 차려입고 공원으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공원 밴치에 그녀가 단아하게 앉아있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무슨 피곤한 일이 있었는지 눈 밑도 거므스름 하다.
잠을 잘 자지 못한걸까.
그녀가 날 발견하더니 환히 웃으면서 뛰어온다.
"평소엔 그렇게나 도시락 좋아하더니, 오늘은 배가 안고프신가 봐요?"
"아 그냥 오늘은 얘기좀 할게 있어서 부른거에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물론, 바보 같은 얘기라는건 알아요. 당연히 소연씨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아이, 괜찮으니까 빨리 말하세요."
언젠가는 물어봐야 할 일이다.
"사람.. 죽여본적 있어요? 혹시 이 마을에서도.."
"......네?"
"아 물론 헛소문이겠지만.. 저기, 그게.."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말을 더 이상 잇을 수가 없다. 이 순간, 그녀의 이 표정이 말하고 있는건 뭘까.
당혹감? 어이없음?
아니 이건.. 슬픔. 이렇게 까지 슬퍼할 줄이야..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나를 올려다 본다.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려 하는 순간, 벤치에서 일어나 뒤돌아 뛰어가 버린다.
내 말에 상처입은 것일까. 여린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그녀를 잡아야 한다. 사죄해야 한다. 일어나는 순간 앞에 뛰어가던 그녀가 넘어졌다.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서럽게 울먹인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해버렸네요. 그냥 지나가는 말이니 넘겨주세요."
"소문.. 들으셨나봐요.. 신우씨 만은 안 듣기를 바랬는데 ....죽였었어요. 사람."
"네?"
"전에 사람.. 죽였었다고요."
심장이 쿵하고 가라 앉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길가에서 치한을 만나서.. 정당방위였어요. 너무 놀라서 밀쳤더니,
쓰러지면서 머리를 박아 죽어버렸어요. 무죄 판결까지 받았고, 잘 정리된 사건이에요."
절박하게 나를 보며 말한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기 바란다는 처절한 말투. 그녀가 너무나 흐느끼면서 말했기 때문에 알아 듣기가 힘들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듣기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머지 일들은 전부 과장되서 소문이 난 거에요! 지금도 제가 살인을 하고 있다니, 그건 아니에요!!
전에 있었던 일도 사고였거니와, 제가 살인을 하고 있다니요.
절대로, 절대로...."
울먹이는 그녀의 눈은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느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진정하세요. 저는 소연씨 믿어요. 소연씨가 절대 그럴 리가 없죠."
"그렇지만.. 그렇지만.. 사람을 죽였는데도.."
"괜찮아요. 전 여전히 소연씨 사랑해요. 그때 제가 보내준 케익 속 고백처럼."
"고마워요.."
눈물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이제야 작은 미소가 보인다.
공원에 앉아 밤이 깊도록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다. 쏟아지는 별들이 아름답다. 시간이 늦어서 그녀를 보냈다.
새하얀 원피스를 하늘하늘 펄럭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
오늘은 완벽한 날이다. 그녀에 대한 오해도 풀었고,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었다. 별들
도 쏟아질 것 같이 아름답고, 풀냄새도 향기롭다.
단지, 그녀의 하얀 원피스 뒤에 작게 방울져 묻어있는 빨간 자국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집에 와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렇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녀가 발품을 하면서 까지 꿀을 팔아야 될 정도로 물건이 팔리지 않았던 건,
살인자라는 소문 때문이었던 건가.
그리고 내가 꿀을 사며 잠시 얘기 좀 하자 했을 때 그렇게 기뻐하던 것도...
외로웠겠지...
살인자라는 누명.
그리고 사람들에게서의 고립.
그런 그녀와 처음으로 마음을 트고 대화 해 준 내가 고마웠을 것이다.
내가 소문을 들은 걸 알았을 때 그렇게나 떨면서 울먹였던 것도,
자신과 가까운 유일한 사람인 나마저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나.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조금 불안해 지는 건, 그녀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단지 '고마움'일 수도 있다는 것.
자기를 받아 줄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와 만나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피스 뒤에 묻어있던 빨간 자국. 그것은 뭘까..
'혹시..'
수고 굿. 헠헠 담편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