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많은 수납장을 일일이 열어보는건 무리이다. 어디에 있는걸까.
저 수납장에 쓰여있는 알파벳이 힌트라도 되는 걸까. 대체 어떻게 해야..


......소연이가 아까 했었던 말.


방금 전 소연이가 퀴즈라고 냈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밤하늘을 빼라고 했었나.


소연이가 알고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단연 딸기다.
소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밤하늘은..
그때 그녀가 말했었지.
그녀가 나에게 살인을 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내가 그것을 이해해 주던 날 함께 올려다 본 밤하늘.
그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처음이라고.
별이 쏟아질것 같이 빛나던 밤하늘이였다.
수납장에 써있는 것은 영어 알파벳이다. 단어를 영어로 변환해 보았다.

 

딸기는 Strawberry.
별이 많은 밤하늘은 Starry.

 

중복되는 철자들을 제거하면.. R, W, B, E가 된다.
여기서 자음만을 뽑으라 했었나.

모음인E를 제거하니 R, W, B만이 남는다.


'R, W, B'


이 알파벳으로 구성된 서랍을 서둘러 찾아 보았다. 그녀는 왜 이런 짓을 했던걸까.
갑자기 그 힌트를 나에게 가르쳐준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 상황에서 퀴즈만을 그렇게.. 불안한 예감이 점점 커져만 간다.


"R, B, W... R, B, W..."


끼이익 끼이익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으스스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창고 가장 오른쪽 서랍에 다다랐을 때였다. 작은 글씨로 두려운 알파뱃이 써있었다.


'R W B'


...... 이건가.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열어선 안될 것 같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호흡을 한번 고르고, 나무 선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진득 진득한 시뻘건 액체가 담긴 유리 병이 보인다....

정말로 있었던 건가.


그리고 그 액체 속에 담긴 작지만 길다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누르스름한 빛깔..

그녀는 대체 왜.. 사이코 패스란 이런걸까. 병을 열어보았다. 진득 진득한 그 병을 열어보았다.

 

......
......

 

.... 뭐지, 이 달콤한 향기는..


피의 비릿한 향 대신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건......

진한 딸기향..

그리고 약간의 꿀냄새..

병 앞에 조그마한 라벨이 붙어있다.

 

Rose Wine Blended」
(프랑스식 딸기 와인)

 

'R W B'는 이것의 약자였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는다.


나를 위해 그녀가 만든 건가. 그동안 바쁘다고 한건, 이걸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수척해질 정도로 만들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옷에 빨간 자국이 묻어 있었던 것.

전화 상에서 들려오는 '콰직' 거리던 소리.

그녀가 들고 있던 몽둥이 모양의 물체.

 

나를 위해 직접 딸기를 찍어 와인을 만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과장된 소문과, 나의 의심이 오히려 그녀를 죽였을 뿐..


그런데 대체 왜. 나에겐 그렇게나 비밀로..


무언가에 홀린것처럼 와인을 입에 한모금 갔다 대보았다.

아아.. 그 달콤함에 온몸이 마비가 되어버릴 것 같다.


'탁'


입에 무언가가 걸린다. 와인병에 들어 있었던 그것이다. 조심히 빼보았다.


'이건..'


감정이 이성의 선을 돌파하기 시작한다. 모여있던 눈물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유리 관속에 들어있는 누런 양피지 종이.

그것이 손가락의 정체였다.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고백 편지.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가.
유리 관 코르크를 빼내어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담은 나의 고백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소연씨께-

 제가 만든 딸기 케익, 잘 드셨나요?

 어린 새와 같은 그대에게, 이제야 고백을 하네요.

 그대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는, 그럼 사람이 될께요.


 사랑해요.
 


     I am only a STRAW.
 
 But I want be your BERRY.

 
 (저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를 위한 과실이 되어주고 싶어요.)』

 

 

나의 맹세는 어디로 간 걸까.
그대를 지켜주겠다던 나의 맹세는.. 누구보다도 그대를 믿어줬어야 하는 나인데..


양피지 뒤편에는 또 다른 글이 쓰여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쓴 답장이었다.

 

 

『-신우씨께-

 제가 만든 퀴즈, 잘 푸셨나요?

 번거롭게 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나름 이벤트라고 열심히 준비한 거에요!

 항상 고마워요. 언제나 저를 믿어주신 당신. 정말 고마워요.

 그대에게 드리는 첫 '사랑한다.'는 말은, 이 이벤트를 통해서 해드리고 싶었어요.

 오늘이 아마 그대와 제가 100일째 되는 날이겠죠.

 신우씨가 만들어준 케익, 맛있게 먹었어요.

 저도 그래서 준비한게 이 와인이에요. 역시나 딸기와 꿀이 섞여있는..

 맛이 어떨 줄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함께 지금 함께 이 와인을 마시고 있겠죠?

 이 꿀과 딸기의 만남이 달콤한 와인과 케익이 됐듯이, 우리도 영원히 그렇게 되길

 바래요.

 요새 제가 이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바뻐, 자주 만나주지 못한점 죄송해요.

 그러나 무엇을 걱정하나요.

 걱정하지 마요.

 당신은 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인걸요.


 사랑해요.

 

 You're the only man who can be my HONEY  AS

               real   HON. -EYAS

 
 (당신은 진정한 연인으로써 저의 honey가 될 유일한 사람이에요. -작은 새가)』

 

 

이 달콤한 와인에 홀려서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독한 와인에 취해서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딸기가 피로 착각 할 만큼 새빨갛다는게 미웠다.

꿀은 그 색을 변화시키지 못할 정도로 투명하다는 것이 미웠다.

결국 딸기와 꿀이 섞인 와인은 죽음을 가져왔다.

 

너무나 새빨갛던, 그녀를 믿지 못한 내 마음이 미웠다.

너무나 투명해 이를 막아 줄 수 없던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미웠다.


결국 우리 둘의 마음은 슬픈 마지막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입을 감도는 와인의 맛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우리들의 사랑이 너무나 달콤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미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