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무능한 군인처럼 보이는 내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수 차례 정상병의 발길질이 끝나자 그제서야 나는 제 정신이 드는 듯 했다.

온 몸에 독기같은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난 정상병의 마음을 이해한다.

나도 내 자신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정상병은 한 동안 내 앞에 서서 거친 숨을 수차례 몰아 쉬었다.

"헉헉...뭐가 있다는거야©강아지...헉헉."

이 말이 끝나자 정상병은 초소문을 거칠게 열어제끼고 들어가 서치라이트 스위치를 올렸다.

순간 전방 50여미터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역시나 장대비 때문에 빛이 산란되어 사물은 정확히 확인이 안되었다.

주변이 밝아졌음을 느낀 정상병은 다시 그 소리가 나던 덤불 숲으로 미 친듯이 뛰어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소총을 움켜쥐고 정상병을 따라 뛰어갔다.

"이 신발년아!! 나와!! 어딨어©이 신발년!!!"

미친 사람처럼 정상병은 덤불 숲속에 들어가 발길질을 하고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이 개년 죽여버리겠어!!! 나와 이 썅년아!!"

무려 5분여동안 미친듯한 행동을 반복하던 정상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상병이 덤불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판쵸우의의 여기저기가 찢겨있고, 그의 온 몸은 빗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뒤집어쓴 판쵸우의와 헬멧라인 아래로 콧날과 입만 보이며 긴 숨을 내 뱉고 있는 정상병의 모습은

조금 전의 그 형상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돌아가자."

좀 전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나즈막한 억양으로 정상병이 말을 했다.

정상병이 총을 쏘지 않은 걸 보면 행동은 친미친 듯 보였지만 정신은 있었나 보다.

초소로 돌아와서야 우리는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상병은 초소 문앞에서 한 번 멈칫하더니 천천히 초소 문을 열고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보안, 상병 정ㅇㅇ입니다."

서치라이트의 스위치를 조용히 내리며 정상병은 수송관에게 서치라이트를 켜게 된 경위를 보고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치광이 수송관이 우리 말을 믿어줄까 염려가 되었지만 정상병의 판쵸우의가 여기저기 찢겨있고

두려움에 휩싸인 듯한 우리 둘의 모습을 본 수송관은 30분이 넘도록 조용히 우리 얘기를 들어 주었다.

결론은 역시 내가 헛 것을 본 걸로 끝났다.

"들어가 쉬어라. 오늘 들은 얘기 내일 중대장한테 보고하겠다."

그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은 이 부대에 처음 배치받은 날 빼놓고 처음이다.

다음 날 우리는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결론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날 만큼은 중대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군인정신 부족같은 훈계는 하지 않았고, 근무에 열중하라는 말만 하였다.

그 날 이후로 정상병은 말이 없어지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내무반 뒷뜰에 혼자 앉아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우리는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 동안 식당청소와 아침 근무자 식사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주는 우리 소대가 담당이었다.


DCInside for iPhone